II-3. 문화와 계급

[노트] 부르디외 계급론에 대한 노트

김성윤 2006. 10. 24. 02:14

오인하면서 생산하는 구조, 그리고 상동성으로 구성되는 사회공간

―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급론에 대한 노트


김성윤, 2006년 10월 24일



1. 구조: 부르디외는 맑스와 베버 그리고 뒤르켐의 사회학을 연결시키고 다양한 형태의 자본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계급개념의 외연과 함의를 확장시켰다. 그는 아비투스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각 개인들이 ‘구조’로부터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지닌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그의 구조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부르디외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그의 작업이 계급관계의 재생산을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지만 새로운 장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행위자들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2. 생산: 애초에 그가 상정했던 구조가 역동적인 것이라면, 구조와 행위자라는 이분법적 잣대는 온당치 못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부르디외에 대한 일반적인 논평들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비판이다. 왜냐하면 그는 계급관계의 재생산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생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구조가 동일한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더라도, 만약 철저하게 분석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사회계급 내에 다양한 분파들이 분할되어 있고 다원적인 욕망들이 균열되어 있음을 목도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계급분석에 있어 ‘시간’이라는 변수를 빼먹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즉 부르디외의 관점에서는 재생산 대 생산, 혹은 정태성 대 역동성이라는 대립항은 허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3. 오인: 그렇다면 새롭게 생산된 계급관계에 대한 가치 판단이 내려질 차례이다. 이 변화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혹 지배자들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위협하는 것일까. 물론 부르디외는 그러한 변화가 애초에 이전의 것들에 혼융되고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예컨대 우리는 ‘이전의 것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로부터 100%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부르디외는 장의 상태에 따라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상징자본의 분포에 목도하는 한편, 이러한 변화가 근본적으로 지배 일반과 피지배 일반의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가령 프롤레타리아가 무계급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꿈이 있다면, 그는 생산관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것이다. 피지배자들은 상징권력의 장에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지고 또 한편으로는 (의식적으로) 기꺼이 지배당한다. 그는 여기에 일종의 일루지오(illusio; 환상 즉 게임에 대한 믿음)가 개입한다고 본다. 일루지오는 무의식적으로 오인(mis-recognition)을 야기하며, 의식적으로는 승인(re-recognition)을 유도한다. 이러한 동학은 피지배계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양한 사회계급들의 분파들을 열거하며(상업경영자, 대학교수, 예술가 등등), 여기에 게임이 작동한다고 여긴다. 이것이 그가 역설하는 ‘장’의 한 측면이다.


4. 사회공간: 계급은 관계적이다. 달리 말해 계급은 사회공간에서의 ‘위치’를 의미할 뿐이며, 정형화된 특징이나 속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는 알튀세르가 이야기한 토픽적 사고와 매우 유사한데, 사회공간이라는 위상학적인 어떤 것을 상정하고 그 틀에서 계급의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다면, 부르디외의 계급론에 대한 일반적인 수용에는 수정이 뒤따라야만 할 것이다. 그의 분석이 특정한 계급 성원들의 특징적인 실천 양상을 규정내리고 공식을 도출하는 작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실천은 행위자들이 전개하는 전략에 불과한 것이지, 특정한 계급위치가 가지는 고유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급은 실재하지 않는다. 계급은 사회공간에서의 위치이며 상징적인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계급에는 아무런 규정력이 없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상징적인 이 무엇은 언제는 실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계급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부르디외가 보이는 시각은 상징체계가 물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명목론적인 유물론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5. 상동성: 각 행위자들의 실천은 특정한 장 내에서 일정한 속성을 획득한다. 이 속성들 간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구별적 가치가 생겨나며, 이 구별적 가치에 의해, 사회공간 내에서의 위치가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패턴을 명명(naming) 과정이라 부르고, 이러한 구별 자체가 애초부터 언어적 능력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이뤄지는 권력적 함의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명명과 구별의 연쇄적인 과정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계급들이 사회공간 내에서 일정한 상동성(homology)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동성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제기된다. 첫째, 상동성은 동일성(identity; 혹은 정체성)에 반대하는 개념이다. 동일성이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개념이라면, 상동성은 환원보다는 수렴의 원리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만약 상동성을 동일성과 혼동하게 된다면, 부자가 정치의 장에서도 학문의 장에서도 예술의 장에서도 지배자라는 파악으로 이어지고, 다차원적인 사회를 부자와 빈민의 항상적인 싸움터로 환원시킬 것이다. 그런 원칙은 없다. 계급투쟁은 언제나-이미 사회공간을 둘러싼 상징투쟁이었다. 둘째, 상동성 개념은 장들간의 관계에서도 설명된다. 장들간의 상동성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장들이 균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독립예술가처럼 경제의 장에서 피지배적이었던 무리가 특정한 문화의 장에서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알튀세르가 모순들의 불균등성(unevenness)이라고 개념화했던 측면과 상통한다. 즉, 장들의 집합이라는 사회공간 내에서 다른 장들을 종속시키는 경제적 생산의 장이 특정한 상황과 국면에 따라서는 다른 장들에 대해 종속적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