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 문화이론

[자료 혹은 노트]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김성윤 2006. 6. 9. 12:38

[진보평론] 9호(2001년 가을)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 글은 윤수종의 글인데, 김성윤이 『제국』론에 대한 문제제기의 일환으로 몇 군데 밑줄을 그었다. 그 중 ‘[……]’의 부분은별도로 주해나 논평을 달아놓은 것이다.

윤수종(전남대 사회학과)


1. 머리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쓴 『제국 Empire』은 저자들의 말대로 맑스의 『자본론』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모델로 삼아 현재의 제국주의(세계 지배 상황)를 분석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기여하고 싶은 것은 전반적인 이론적 틀과, 제국을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제국 안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활동하기 위한 개념들의 도구 상자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제국』은 한편으로는 맑스의 『자본론』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적인 설명들을 많이 계승하고 있다.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가 문화 쪽으로 기울고 사회 변화에서 생산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해 온 점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생산의 새로운 변화를 강조하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제국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인 설명 및 비판은 커다란 흐름을 형성해 왔다. 저자들은 맑스의 제국주의적 경향에 대한 단편적인 서술들에 이어 레닌의 독점자본주의의 반동화 테제에 입각한 제국주의 설명, 그 후 힐퍼딩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에 대한 설명들을 비판적으로 전유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탈근대 사상의 흐름을 뚫고 나아가 반근대적인 문제설정을 공유해 나간다. 마키아벨리, 니체, 스피노자 등에 근거하여 근대적인 문제설정의 한계들을 비판하고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는 탈근대적인 문제설정을 흡수해 나간다. 그러나 탈근대적인 문제설정을 차이와 해체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또한 권력처럼 차이를 통합하거나 초코드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통해 표준화되지 않은 구성을 구축해 나가려고 한다.

이러한 문제설정에서 근대적 주권 개념을 분석해 나간다. 국민 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은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이행에서 탈근대화의 생산적 내용으로서 생산의 정보화에 주목한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변형 과정에서 권력의 문제, 즉 주권의 변형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주권이 유지되는 지형으로서 생산의 영역으로 하강한다. 더욱이 생산을 객관적인 경제적 영역의 생산으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생산이란 측면을 강조해 나간다. 이러한 사고의 밑바탕에는 자본주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은 대중의 저항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푸코와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받아들여 생체 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과 차이를 용인하면서 통합을 해 나가려는 제국적 권력의 새로운 양상을, 기존의 훈육 통치에서 통제 사회로의 이행을 강조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제국』은 그간 경직된 맑스주의적 분석들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문화 및 상부구조 설명에 치우쳐 온 탈근대주의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함의를 지닌다. 근대의 이성 중심성을 비판하고 해체를 지향하였던 탈근대주의의 흐름은 대중에 대한 관심, 특히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대중의 양상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또한 『제국』은 그간 다양하게 제기되어 온 제국주의에 대한 상을 정리해 주는 의미를 지닌다. 국민 국가의 경계를 강조하던 그간의 제국주의 상을 해체하며, 특히 세계체제론적인 관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문제의식을 확대하면서 세계시장의 보스로서 제국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어 나간다. 특히 제국은 탈근대적인 양상들을 포섭하면서 새로운 지배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국』의 핵심적인 주장을 테제식으로 말한다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넘게, 식민지 체제가 무너졌을 때 그리고 나서 자본주의 세계 시장에 대한 소비에트의 방해물이 최종적으로 붕괴하자마자, 저항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경제적 교환들과 문화적 교환들의 지구화[세계화]가 진행되었다. 전지구적 시장 및 전지구적 생산 회로와 더불어 전지구적 질서, 새로운 지배 논리 및 지배 구조, 즉 새로운 주권 형태가 등장해 왔다. 제국은 바로 이러한 전지구적 교환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정치적 주체, 다시 말해 세계를 통치하는 주권 권력이다. 세계 시장의 우두머리인 셈이다.

여기서는 네그리와 하트의 설명을 요약 정리해 보자.



2. 현재의 정치적 구성


1) 세계 질서

제국이란 문제 설정은 먼저 세계 질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세계 질서란 이질적인 전지구적 세력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전지구적 세력들을 초월하는 단일한 권력과 중심에 의해 명령되지도 않는다. 이제 제국주의 열강들 모두를 과잉 결정하고 통합적인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결정적으로 탈식민지적이고 탈제국주의적인 권리에 대한 하나의 공통 관념 하에서 다루는 단일한 권력이 생겨나며, 이것이 제국이다.

제국은 구성된다. 전지구적 체계의 발전은 체계적 균형을 가져오는 지속적인 계약화 절차를 부과하는 기계의 발전이다. 이 기계는 전체 사회 공간을 가로질러 권위와 행위의 실행을 결정한다. 그리고 제국주의와는 달리, 무력 자체에 기반해서가 아니라 무력을 권리와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에,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기반하여 성립되고 구성된다.

새로운 초국적 사법적 질서의 동학 및 접합 구조는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에서 내적 질서화를 규정하게 된 새로운 특성들에 강하게 일치한다. 국제적 법률 체계와 국내 법률 체계는 절차, 예방, 청원과 같은 사법적 실행에 대한 헤게모니를 지닌다. 규범성, 제재, 억압은 이러한 것들에서 나오며 절차적 전개 과정 안에서 형성된다. 여기서 국내법과 초국적 법의 새로운 기능 작용으로 볼 때, 그 법들은 위기의 지형에서 작동한다. 법 적용의 영역에서 위기는 법률 생산의 계기에서 작동하는 “예외”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법률의 적용에서 예외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유동적인 상황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예외적으로 개입 요구를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을, 그리고 위기에 처해 있는 배열 장치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무력과 도구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개입 권위에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개입의 예외성이란 이름으로 정말 경찰권이라는 권리 형태가 생겨난다. 예외를 지배할 수 있는 사법 권력과 경찰력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제국적 권위 모델을 규정하는 좌표이다.

그러나 초국적 법의 현대적 변형을 통해서 제국적 구성 과정은 직간접적으로 국민 국가의 국내법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다시 윤곽지운다. 이러한 변형의 가장 중요한 징후는 개입권의 발전이다. 개별적인 주권 국가나 초국적 (유엔) 권력은 자발적으로 맺은 국제 조약들의 적용을 확보하거나 부과하는 데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의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초국적 주체들이 모든 형태의 비상 사태나 보다 상위의 윤리적 원리의 이름으로 개입한다.


2) 생체 정치적 생산

사법적 개념들과 사법 체계들은 사회적 현실 위에서 자신들의 작용을 규정하는 물질적 조건들을 나타낸다. 물질적 조건들의 변화와 관련하여 푸코의 작업에 기대어 설명해 나갈 수 있다.

제국적 지배의 구체적 기능 작용과 관련하여, 먼저 훈육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의 이행을 생각할 수 있다. 훈육 사회는 관습, 습관, 생산 실행을 생산하고 규제하는 배열 장치dispositifs나 장치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적 명령이 구축되는 그런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작동시키고 자신의 포섭 그리고/혹은 배제의 메커니즘과 자신의 지배 규칙에 복종시키는 것은 사회적 지형을 구조화하고 훈육의 “이성”에 적합한 논리를 제공하는 훈육 제도들(감옥, 공장, 정신 병원, 병원, 대학, 학교 등등)을 통해 수행된다. 자본 축적의 첫 국면은 이러한 권력 패러다임 하에서 수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통제 사회는 명령 메커니즘들이 더욱 더 “민주적”이고 더 한층 사회적 장에 내재적이며 시민들의 두뇌와 신체를 통해 배분되는 사회이다. 권력은 이제 두뇌(정보 체계, 정보 네트워크 등에서)와 신체(복지 체계, 감시 활동 등에서)를 생활 감각 및 창조 욕망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소외되는 상태로 직접 조직하는 기계들을 통해 실행된다. 그러므로 통제 사회는 우리의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실행들을 내적으로 활성화하고 정상화[표준화]하는 훈육 장치들의 강화와 전면화에 의해 특징지어지지만, 훈육과는 반대로 이러한 통제는 유연하고 동요하는 네트워크들을 통해 사회 제도들의 구조화된 자리들을 훨씬 벗어나 확장된다.

권력 패러다임의 변화에서도 이러한 생체 정치적 성격을 읽어낼 수 있다. 권력은 모든 개인을 포괄하고 그 또는 그녀를 자발적으로 재활성화하는 본질적인 결정적인 기능이 될 때만, 주민의 전체 생활에 대해 효과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은 생활[삶]을 철두철미하게 침투하여 관리하려고 한다. 이처럼 사회 생활을 내부에서 규제하고 따라다니고 해석하고 흡수하고 재접합하는 권력 형태를 생체 권력이라 할 수 있다.

통제 사회와 생체 권력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는 제국 개념의 중심적 측면들을 묘사한다. 제국 개념은 주체들의 새로운 다변성을 이해해야 하는 틀이며, 새로운 권력 패러다임이 나아가고 있는 끝이다. 국제 질서의 정당성은 더 이상 매개를 통해서 구축되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다양하게 직접적으로 파악된다. 독재나 전체주의의 사법적 기술과는 반대로 권리는 효율적인 채 남아 있지만 정확히 예외 국가와 경찰 기법에 의해서 절차가 된다. 이것은 권력과 주체성들 사이의 비매개적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처럼 제한되지 않은 전지구적 공간 전역에서, 생체 정치적 세계의 깊은 곳까지, 그리고 예견할 수 있는 시간성에 대처하는 것이 새로운 초국적 권리를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다국적이고 초국적인 산업적 금융적 기업들이 정말 전지구적 영토들을 생체 정치적으로 구조화하기 시작한다. 기업들의 활동은 더 이상 추상적인 명령의 부과와 단순한 도적질과 부등가 교환의 조직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 활동은 직접적으로 영토와 주민을 구조화하고 접합한다. 초국적 자본은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다양한 시장에 배분하며, 자원을 기능적으로 할당하며, 세계 주민의 다양한 부문을 위계적으로 조직한다. 투자를 선별하고 재정적 화폐적 동원을 지시하는 복잡한 장치가 세계 시장의 새로운 지도, 혹은 정말로 세계의 새로운 생체 정치적 구조화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거대한 산업적 재정적 기업들의 역능은 상품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생산한다. 즉 욕구, 사회 관계, 신체, 그리고 마음을 생산한다. 그와 더불어 생체 정치적인 질서 생산은 소통 산업에 의해 발전되는 언어, 소통, 그리고 상징의 생산이 지닌 비물질적 연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소통 네트워크의 발전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과 유기적 관계를 지닌다. 소통 산업은 생산을 새로운 규모로 조직하고 전지구적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구조를 부과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질서를 정당화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정당화는 이제 소통 산업들에서, 즉 차이를 강제로 중화시키기 전에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 조절적인 균형이란 놀이에서 차이를 흡수하는 상황을 창조하는 제국적 기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정당성의 이러한 새로운 틀은 정당한 무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형태를 포함한다. 제국적 개입을 위한 정당한 힘[무력]의 병기고는 정말 이미 광대하고, 군사적 개입 뿐만 아니라 도덕적 개입과 사법적 개입과 같은 다른 형태들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도덕적 개입은 뉴스 매체와 종교 조직을 포함하는 다양한 기구들에 의해 실행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NGO들 가운데 몇몇일 것이다. NGO들은 정부에 의해서 직접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정언 명제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렇지만 인도주의적인 NGO들은 실제로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장 강력한 평화적 무기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제국 자체의 주권은 경계[국경]가 유연하고 정체성이 잡종적이고 유동적인 주변들에서 실현된다. 제국의 구성은 어떤 계약 메커니즘이나 조약에 기초한 메커니즘에 기초해서도 어떤 연방적 근거[자원]를 통해서도 형성되지 않는다. 제국의 기반을 이루는 제국적 규범성의 자원은 새로운 경제적-산업적-소통적 기계, 즉 전지구화된 생체 정치적 기계에서 생겨난다.


3) 제국 안에서의 대안들

제국의 구성과 제국의 전지구적 네트워크는 근대적인 권력 기계들에 대항하는 다양한 투쟁들에 대한 그리고 특정하게는 대중의 해방 욕망에 의해 추동된 계급 투쟁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중이 제국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비판적 사고의 많은 부분이 사회적 주체들이나 국민적 지역적 집단들의 정체성에 기반한 저항의 장소들을 재조성해 왔고 종종 정치적 분석을 투쟁의 국지화에 근거지워 왔다. 특히 전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의 방어라는 좌파의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 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 [가령 스크린쿼터 사수투쟁과 국내영화산업자본의 시장 독점 사이의 연결. 그러나 좌파의 전략이 국지적 정체성, 즉 단일국가 차원의 문제설정을 포기하는 것 또한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또한 그간 항상 제기되어 왔던 국제주의는 국민 국가를 파괴하고 새로운 전지구적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그 결과 제국이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시대는 끝났다. 투쟁들이 하나의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관련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투쟁들이 각자의 맥락에서 적합한 숙주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형태를 조율하는 바이러스처럼 소통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지구화를 미리 보여주는 투쟁들은 산노동의 힘의 표현이었다. 산노동은 자신에 대항하여 축적된 죽은 노동과 대결하기 때문에, 항상 고정된 영토화하는 구조들, 국민[일국]적인 조직들, 자신을 죄수로 만드는 정치적 인물들을 파괴하려고 한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새로이 구성된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적인 생산 및 재생산의 규범들에 의해 자신의 노동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착취되고 그 규범들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주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말 차이와 층화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분절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능동적인 다양한 생산 형상들 사이에서 비물질적 노동력의 형상이 자본주의 생산의 도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성 양자에서 점차 중심적인 지위를 점한다.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형태를 보면, 그들이 표현한 욕망과 욕구는 다른 맥락으로 번역될 수 없다. 우리가 상당히 칭송하는 소통 시대에, 투쟁들은 거의 소통할 수 없게 되어 왔다. 물론 이러한 투쟁 모두가 그들 자신의 국지적이고 직접적인 환경에 집중되어 있을지라도 초국적 관련성의 문제들, 제국적 자본주의 규제의 새로운 모습에 고유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이러한 투쟁들 모두는 상당히 다르고 국지적인 조건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을지라도 즉각적으로 전지구적 수준으로 도약하고 제국적 구성을 전반적으로 공격한다. 또한 이러한 모든 투쟁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파괴하며 동시에 경제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이다. 그러므로 그 투쟁들은 생체 정치적 투쟁이며 생활 형식을 둘러싼 투쟁이 된다.

그럼에도 투쟁들은 소통할 수 없다. 투쟁의 소통을 막는 실질적인 장애물은 투쟁들이 저항하는 공통의 적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과, 각각의 특수한 언어를 사해 동포적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공통적인 투쟁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때문에 유사성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차이, 즉 특이성들의 소통에 기초해서 기능하는 새로운 소통 유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투쟁 방향과 관련하여 기존의 약한 고리론은 그 힘을 잃는다. 이제 제국의 구성에서 권력에 “외부”는 없으며 그러므로 약한 고리들도 더 이상 없다. [… 글 중후반부에서 차이를 강조하는 탈근대론이 제국에 봉사할 뿐이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차이의 정치학을 무한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만약 모든 투쟁들이 등가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공통적인 투쟁 언어가 없는 것이라면, 투쟁들 간에 새로운 소통의 유형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원천봉쇄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알튀세르식의 과잉결정과 레닌식의 약한 고리의 사고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애초에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과 진배없다.] 모든 투쟁은 제국의 핵심을, 제국의 강점을 공격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 어떤 지리적 지역(워싱턴이나 도쿄 등)에 공격의 우선권을 두는 것이 아니며, 제국의 가상적 중심을 어떤 지점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주권(통치권)의 이행


네그리와 하트는 현재의 정치적 구성을 ‘제국’이라고 제시하고,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의 주권의 이행과 생산의 이행으로 나누어서 탐색한다. 주권의 이행, 이른바 상부구조의 변화를 살펴보자. 물론 네그리와 하트는 상부구조와 토대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토픽을 거부하지만 말이다.


1) 두 개의 유럽, 두 개의 근대성

유럽과 근대성은 처음부터 투쟁, 갈등, 위기로 특징지워졌다. 그 과정에서 근대 주권 개념은 내재성 구도에 대한 혁명적 발견, 이러한 내재적인 힘들에 대항한 반작용과 권위 형식의 위기, 이러한 위기를 내재적인 힘들의 구도를 초월하고 매개하는 주권의 장소로서 근대 국가 구성체 속으로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계기들을 통해 정립된다.

이 과정에서 근대성의 두 가지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근대성 양식은 철저한 혁명적 과정이었다. 자신의 과거와의 관계들을 파괴하고, 세계 및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닌 내재성을 선언한다. 이러한 근대성은 지식 및 행위를 과학적 실험으로 발전시키고, 인간성과 욕망을 역사의 중심에 설정하면서 민주주의 정치를 향한 경향을 규정한다. [… 가령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평등?박애의 정신 등을 단순히 세속화된 가치관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네그리/하트의 설명대로 거기에는 분명히 구성적 권력의 계기가 작동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이 추상화되었던 역사적 사실에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흔히 세속화 과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이 등장하는 운동들 및 역동성들의 힘을 포획하기 위해 지배권력을 수립하려는 두 번째 근대성 양식이 있다. 이것은 내재적인 구성 권력constituent power에 대항하여 초월적인 구성된 권력constituted power을, 욕망에 대항하여 질서를 설정한다. 근대성 자체는 이처럼 내재적인, 구축적인, 창조적인 세력들과 질서를 재건하려는 초월적 권력 간의 부단한 갈등에서 태어나는 위기에 의해 규정된다.

유럽 근대성의 내부적 갈등은 또한 동시에 전지구적 규모에서 외부적 갈등으로 비추어졌다. 유럽 안에서 구성적이고 전복적인 세력들을 통제하려는 동일한 반혁명 권력이 또한 다른 주민[인구]들을 유럽의 지배에 종속시킬 가능성 및 필요성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근대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반혁명적 기획은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수많은 주체들을 훈육시킬 수 있는 초월적 장치를 구축함으로써 내재성 관념을 지배[제압]하는 것이었다.

초월적인 정치적 장치를 발견하는데서 근본적인 이행은 대중이 지닌 모든 자율적인 권력[힘]을 그것을 지배하고 그것 위에 서있는 주권 권력에 이전하는 계약에 의해 수행된다. 주권은 초월성과 대표성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근대 주권의 토대에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장을 사회적 재생산 가치의 근거로 확인하는 것이 있다. 이처럼 주권과 자본의 종합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 그리고 권력의 초월성이 완전히 선험적인 권위 실행으로 변형될 때, 그때 주권은 전체 사회를 가로질러 지배하는 정치 기계가 된다.


2) 국민 국가의 주권

근대성의 위기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봉쇄하기 위해 권력 기계들이 구축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주요한 대응 방식이 바로 국민의 탄생이었다. 영토 세습제의 신학적 근거를 초월적인 새로운 근거로 대체하는 점진적 과정에서 왕의 신성한 신체보다 오히려 국민의 정신적 정체성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권은 국민[민족]적 정체성, 즉 혈연 관계의 생물학적인 연속성, 영토의 공간적인 연속성, 그리고 언어적 공통성에 근거한 문화적이고 통합적인 정체성에 의해 안정화됐다.

또한 주권의 변형 과정에서 봉건적인 신민에서 훈육적인 시민으로의 주민의 전환은 주민의 수동적 역할에서 능동적 역할로의 전환을 나타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승리는 국민 주권 개념을 통해 근대 주권 개념을 완성하는 것과 일치했다. 이제 주권의 초월적인 모습들은 현실로 내려와 현실의 제도적이고 행정적인 과정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정당화 문제는 권력 실행의 분절들을 통해 기능하는 행정 기계의 측면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주권은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처음에는 국민을 언급했고, 그 후 국민이 불안정한 해결책으로 드러났을 때는 인민을 언급했다. 근대적 인민 개념은 국민 국가의 산물이고 국민 국가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맥락 안에서만 생존한다. 인민은 자신을 벗어나 있는 것을 배제하고 그것과 자신의 차이를 설정하면서 내적으로는 정체성과 동일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중의 다양한 의지들 및 행동들로부터 독립적이고 종종 그것과 충돌하는 하나의 단일한 의지 및 행동을 제공한다. 따라서 모든 국민 주권은 자율적인 대중을 복종하는 인민으로 만들려고 한다.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에서 국민 개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작용이 근대적 인민 개념의 구축에 기여한다. 하나는 자신들의 원주민 [대문자]타자와의 변증법적 대립의 놀이 속에서 [대문자]유럽 인민들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식민적 인종주의의 메커니즘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헤게모니적인 집단, 인종, 혹은 계급이 전체 인구[주민]을 대표한다는 것을 통해 내적 차이를 가리는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국민 개념은 지배자의 수중에서는 울혈[정지]과 복고를 촉진하는 반면, 피지배자의 수중에서는 변화와 혁명의 무기인 것 같다. 국민은 더 강력한 외부 세력들에 대항하는 방어선인 한에서, 그리고 잠재적 공동체[하나의 국민]의 공통성(통일)을 제시하는 한에서 진보적이다. 그러나 국민[민족]은 공동체를 상상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며, 또한 외부[다른 국민]와 관련하여 방어적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들은 내적으로 억압적 역할을 수행한다. 더욱이 국민 국가 형태 하에서 민족이익이란 깃발 아래 국민은 전체주의로 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3) 식민지 주권의 변증법

처음부터 근대성의 위기는 인종적 종속 및 식민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국민국가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인민의 순수성을 창조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애쓰는 반면, 외부에서는 [대문자]타자들을 생산하고, 인종 차이를 창조하고, 그리고 근대적 주권 주체를 한정하며 지지하는 경계들을 세우는 하나의 기계이다. 비유럽적 타자들을 부정[소극]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유럽적 정체성 자체를 창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식민지는 필연적으로 이중적이고 억압할 수 없는 자신의 적대자로서 유럽적 근대성에 변증법적으로 대립한다. 식민지적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마니교적[이원론적]인 배제 논리를 통해 기능한다. 이러한 식민지적 정체성들의 구축은 중심부와 식민지 사이의 경계의 고정성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자본과 식민 노예제의 관계는 훨씬 더 밀접하고 복잡하다. 자본은 세계 도처에 현존하는 노예 생산 체계를 포섭하고 재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예 체계를 창조했다. 식민지들에서 노예 노동은 유럽에서 자본주의를 만들었으며, 유럽의 자본은 노예 노동을 결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유럽 열강들이 대서양을 건너 노예 경제의 기초를 다졌던 바로 동일한 시기에 유럽에서 농업 경제의 재봉건화가 존재했고, 그러므로 노동 이동을 차단하고 노동 시장 조건을 동결하려는 매우 강력한 경향이 존재했다.

식민지에서의 실제 사회적 상황은 결코 순수한 적대 세력들 간의 절대적 이항으로 깔끔하게 분류되지 않고, 현실은 항상 증식하는 복수성들을 나타낸다. 하지만 정체성들과 타자성들을 생산하는 추상 기계로서 식민주의는 식민지 세계에 이항 분할을 부과한다. 이러한 타자성의 절대적 부과는 부메랑식의 효과로서 대항 폭력에 직면한다. 노예제는 경제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반란 노예들에 의해 전복되게 된다. [… 역사의 변화과정을 지나치게 행위자 중심으로 기술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노예제의 폐지 혹은 전복에 대해 어째서 자본 축적의 논리에 따른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일까?]

또한 민족[국민] 해방이라는 국민 주권의 진보적 기능은, 반제투쟁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대개 근대화 기획을 수행할 책임을 진 새로운 지배 집단을 강력하게 확립하는 대리delegated 투쟁이 됨으로써 퇴색된다. 대중을 대표하는 인민, 인민을 대표하는 국민,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라는 대표제의 연쇄고리에 입각한 국민 국가의 주권은 부르주아 권력을 만들어 내지만,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민 국가는 내부의 억압적인 지배구조를 지닌 채 전지구적인 자본 질서에 종속된다.


4) 이행의 징후들

식민주의의 종결과 국민의 쇠퇴하는 역능은 제국 주권 패러다임으로의 전반적 이행을 나타낸다. 여기서 탈근대적인 제국 주권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징후들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먼저 근대적인 이분법을 공격하고 파편화된 정체성들을 긍정하며 표준적인 권력적 인물[상](백인, 남성, 유럽인)을 공격해 나가는 차이의 정치를 언급할 수 있다. 급진적인 탈근대적 차이의 정치는 난민, 주변자, 피착취자, 그리고 피억압자들의 가치와 목소리를 체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 지배의 기능들과 실행들에 대항하여 효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들에 일치하고 그것들을 지지할 수조차 있다. 또 다른 징후는 잡종성들의 해방을 추구하고 식민지적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탈식민주의 담론이나 탈식민주의 기획에서 볼 수 있다. 지배적인 이분법적 구조를 지닌 권력을 전복하기 위해 차이의 복수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탈식민주의 기획은 탈근대주의와 만난다. 이행의 색다른 징후로는 근본주의를 들 수 있다. 근본주의는 흔히 이해되듯이 전근대 세계의 재창조가 아니라, 오히려 진행중인 현재의 역사적 이행에 대한 강력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들은 근대성과 근대화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는 데서 매우 일관되게 통일되어 있다.

다만 탈근대주의 담론들은 우선적으로 전지구화 과정에서의 승리자에게 호소하는 반면, 근본주의 담론들은 패배자에게 호소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증가된 이동성, 비결정성, 그리고 잡종성을 향한 현재의 전지구적 경향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는 일종의 해방으로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들의 고통의 악화로 경험된다.

이러한 징후들에 덧붙여 가장 강력한 징후는 세계 시장 이데올로기이다. 세계 시장은 자신의 무한한 복수성들을 가지고 모든 이분법적 분할을 압도한다. 세계 시장은 국민 국가의 경계들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민 국가가 부과해 왔던 종류의 이분법적 분할로부터 해방되어 차이들을 관리해 나간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 차이를 포함하려 하며, 따라서 기업 작업장에서 창조성, 자유로운 활동, 다양성을 최대화하는데 목표를 둔다. 이러한 기획은 “다양성 경영”으로 적절하게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의 징후를 읽으면서 전복의 주체로는, 공통의 생활 형식 주위에서 확인되는 모든 역사 시기에 항상 현존하며 어디에서나 동일한 사회적 주체인 가난한 자[빈민]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는 삶의 공통 분모이며, 대중의 토대이다. 오늘날 생체 정치적인 생산 체제에서 그리고 탈근대화 과정에서, 가난한 자는 종속되고 착취당하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의 모습[모습]이다. 이들을 정치적이고 생산적인 지형의 중심에 다시 놓는 것이 탈근대성의 핵심적 발견 내용일 것이다.


5) 네트워크 권력: 미국 주권과 새로운 제국

미국 주권의 형성과정은 유럽의 근대적 주권과 중요한 차이를 보이며, 미국 주권의 구성에서 새로운 제국적 주권이 형성된 기반을 식별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은 전체 대중을 활성화함으로써, 그리고 대중의 구성 능력을 조직화된 대항 권력들의 네트워크에서, 다양하고 평등화된 기능들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역동적이고 팽창적인 자기 조절 과정에서 조직함으로써, 부패에 빠져드는 모든 주기적 쇠퇴를 저지하기 위해 고안됐다. 이렇게 형성된 미국 주권 관념이 지닌 특징은 권력의 내재성에 대한 긍정이다. 그러나 내재성의 구도 위에서 주권을 구성하는 과정에는 대중 자체의 갈등적이고 다원적인 본성에서 결과하는 경험이 나타나게 되는데, 주권 권력은 이를 통제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국의 새로운 주권 개념은 마치 통제라는 생각을 자신의 헌법에서 없애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외부를 향해 아주 강하게 열린다. 즉 주권이 무한한 지형 위에서 작동하는 개방적이고 팽창적인 기획으로 향한다. 물론 여기서 팽창 경향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다. 따라서 제국의 발전 및 팽창의 기저에는 내적 갈등을 조절한다는 내재적인 평화 관념이 있다.

팽창 경향을 지닌 미국 주권은 광대한 제국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 헌정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미국 주권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을 그들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할 수 있었으나, 흑인 노동은 새로운 미국의 본질적인 지지물이었기에 포함하였다. 하지만 흑인들은 [미국] 헌법에 평등하게 포함될 수는 없었다. 흑인 노예제는 역설적으로 헌법의 예외인 동시에 토대였다.

이러한 모순은 새롭게 발전된 미국의 주권 관념에 위기를 가져왔는데, 이 모순이 미국의 주권 관념의 토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자유로운 순환, 혼합 그리고 평등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 자유인과 노예 사이의 거대한 내적 장벽은 제국의 통합 기계를 차단했으며 열린 공간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꺾어버렸다. 미국 내 계급투쟁의 전개에 따라 공간의 팽창을 더 이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전략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사회적 갈등은 직접적으로 폭력적이고 화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열린 공간들은 마침내 쇠퇴하였다. 공간의 폐쇄에 대한 내부적 해결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국적 과정은 외부와 관련하여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루즈벨트와 윌슨의 정책). 미국은 자신이 점차 계급 적대를 진정시킬 필요에 의해 추동된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반공이 최우선적인 정언 명제가 되었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가장 과장된 마니교적[이분법적] 분할 형태를 발생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근대 유럽의 주권이 지닌 몇 가지 중심적인 요소들이 미국에서 다시 나타났다. 냉전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면서 미국은 국내외에서 직접적이고 잔인한 제국주의적 기획들의 창시자가 되었다.

1968년을 전후하여 베트남전쟁에서의 돌이킬 수 없는 군사적 패배와 더불어, 공화주의적 원리들로 복귀하도록 하는 압력과 애초의 헌법 정신이 강력한 내부의 사회 운동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미국이 이제 해외에서 제국주의적 모험에 아주 깊숙이 휩쓸려 들어갔을 때, 신좌파의 출현은 구성 권력 원리에 대한 거대하고 강력한 긍정[확인]이었으며 사회적 공간들의 재개방에 대한 선언이었다.

이제 냉전을 넘어서 네트워크 권력이라는 전지구적 기획은 미국의 현 위치를 규정지었다. 냉전이 약화되자, 국제 경찰력을 행사하는 책임은 미국의 어깨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오늘날 국제 조직들은 미국에게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도록 요청한다. 20세기 후반의 모든 지역 갈등에서 미국은 군사 개입을 요청받는다. 내키지 않을지라도, 미군은 평화와 질서의 이름으로 이 요청에 응답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제국의 중심적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제국적 권력에서 미국이 특권적인 지위를 지니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역할(특히 그 군사적 역할)이 소련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중심적인 인물에서부터 새롭게 통합되는 세계 질서에서 중심적인 인물로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 자신의 고유한 헌법이 지닌 제국적 경향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 미국이 제국 내에서 경찰국가로 부상하게 된 경제적 요인, 즉 자본의 (축적의) 동학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가간 갈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6) 제국적 주권

제국적 세계로의 이행에서 변화한 것은 경계[국경]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외부는 없다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별은 점차 약화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자유주의 정치의 장소를 구성하는 근대 사회의 공공 공간은 사라지는(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제국 사회에서 스펙터클은 가상적 장소, 혹은 더욱 정확하게는 정치의 무-장소non-place이다. 스펙터클은 어떠한 내부도 외부와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통일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분산적이다. 군사적인 의미에서도 더 이상 외부는 없다. 제국주의 전쟁, 제국주의 사이의 전쟁, 그리고 반제국주의 전쟁의 역사는 끝났다. 이제는 정말 제국 내부의 국부적minor이고 내적인 갈등의 시대에 진입했다. 모든 제국적 전쟁은 시민 전쟁[내전], 경찰 행동이다.

위계와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분적으로 강화된다. 제국적 인종주의는 인종들 간의 본질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에 집중했던 근대 인종주의 이론과는 달리, 미분적differentialist 인종주의, 즉 인종 없는 인종주의 혹은 생물학적 인종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인종주의이다. 제국은 인종적 차이를 결코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항상 정도의 차이로,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우연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복종은 더욱 이동적이고 유연한 일상적 체제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잔인한 인종적 위계를 창조하는 일상적 실행 체제 속에 규정된다. 끊임없이 팽창하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차이의 놀이와 미시-갈등성의 관리에 의거한다.

제국으로의 이행에 따라 주체성의 생산은 훈육사회에서와는 달리 어떤 특수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생산 장소의 불확정성은 생산된 주체성 형태의 비결정성을 가져온다. […국민국가의 역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제국에서는 명령 장치는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인 얼굴을 가지고, 제국 영역 안에 수용된 차이들의 긍정을 포함한다. 대개 제국은 분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는 혹은 잠재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찬양하며, 그 차이를 일반적인 명령 경제 안에서 관리한다. 그래서 제국의 세 가지 명령은 ‘포괄하라, 구별하라, 관리하라’ 이다.

이제 제국 주권은 하나의 중심적인 갈등을 둘러싸고 조직되지 않고 오히려 미시 갈등들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된다. 제국 사회의 모순은 파악하기 어렵고, 증식하며, 국지화할 수 없다. 즉 모순은 도처에 있다. 권력의 장소도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 이때 제국 주권을 규정하는 개념은 총체적 위기, 즉 부패일지도 모른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여 근대 주권에서 제국 주권으로의 이행을 개념적으로 표시하면, ‘인민에서 대중으로, 변증법적 대립에서 잡종성의 관리로, 근대 주권의 장소에서 제국의 무-장소로, 위기에서 부패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형과정 속에서 (노동)거부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새로운 생활양식들을 창조해 나가려 할 때 해방의 정치로 나아갈 수 있다.



4. 간주곡: 대항 제국


제국에서 제국에 대항하는 기획은 운동의 조직적 이동성mobility과 운동의 인종-언어적 잡종성hybridity을 보여주는 세계 산업 노동자 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IWW)의 사례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세계화에 대항하는 지방화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지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는 공장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전체 영역을 점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어디에서나 팽창하고 있다. 노동력이 지닌 바로 그 특질들(차이, 척도, 그리고 결정)은 더 이상 파악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착취 또한 더 이상 국지화局地化되거나 양화量化될 수 없다. 제국은 바로 노동이 착취당하는 세계적 생산의 무-장소이다. 물론 무-장소는 전지구에 두뇌, 가슴, 몸통, 손발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가’, 라이히의 문제설정 대로 ‘왜 인간들은 마치 예속이 자신들의 구원인 것처럼 완강하게 자신들의 예속[노예 상태]을 위해 싸우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사실상 제국 권력은 더 이상 대중의 역능을 훈육[규율]시킬 수 없다. 제국 권력은 대중의 역능들의 일반적인 사회적 능력과 생산적 능력에 대해서 통제를 가할 수 있을 뿐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연하고 전지구적인 화폐 체계가 조절 기능자로서의 임금 체제를 대체한다. 규범적인 명령은 통제 절차와 경찰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지배의 실행은 소통 네트워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착취와 지배가 제국적 영역 위에 일반적인 무-장소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비록 여전히 대중의 살갗 위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있다할지라도, 착취와 지배는 너무나 무정형적amorphous이어서 감출 여지조차도 없는 것 같다. 만약 외부라고 인식될 수 있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장소에서 저항해야만 한다.

훈육 시대에는 사보타지가 저항의 근본 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적 통제 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근본 관념일 것이다. 도주는 어떤 장소를 갖지 않지만,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비우는] 것이다. 근대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노동 인구의 이동성 및 이주는 항상 거부와 해방 추구를 표현한다. 이주migration라는 유령을 볼 때, 뒤에서 밀고 있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제국적 재생산이 지닌 비참한 문화적, 물질적 조건으로부터의 도주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앞으로 당기는 것은 풍부한 욕망이고, 표출적이며 생산적인 능력의 축적이다. 이렇게 볼 때 도주와 탈출은 제국적 탈근대 안에서 반대하는 강력한 계급 투쟁의 한 형태이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 조건의 국지적이고 특별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서,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투쟁한다는 것은 제국 내부에서 투쟁하고, 제국의 잡종적이고 변조해가는 영역 위에서 제국에 저항하여 색다른 공동체들을 건설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 노동의 국제적 이주를 분명 모국에 대한 (상징적) 저항으로 읽어낼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첫째, 그러한 도주/탈출을 (실질적) 계급투쟁으로 읽어낼 명분은 없다(따라서 이러한 견해야말로 네그리/하트가 경계하는 문화편향적인 탈근대론적 문제설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주노동이 새로운 잡종성을 산출해내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강조는 그들의 경제적인 처지에 대해 무심한 소치인 것으로만 읽힌다. 셋째, 게다가 이 모든 풍경들을 제국이라는 틀에서 독해하는 것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네그리/하트가 선호하는 그들의 저항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국민국가 단위에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생산의 영역으로 하강해 보자.



5. 생산의 이행


생산의 영역은 사회적 불평등이 분명히 드러난 곳이며, 더욱이 제국의 권력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과 대안이 생겨나는 곳이다. 이처럼 생산의 영역을 강조하는 것은 탈근대주의의 문화 편향에 대해 정정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1) 제국주의의 한계

제국주의에 관한 맑스주의적 사고의 전통에서 중심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와 팽창 사이에 내생적인 관계가 존재하며 자본주의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실현과정에서 유통 부문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지니며 비자본주의적 환경인 외부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자본은 실현의 욕구를 채우고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축적 주기 즉 자본화 과정에서 다음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팽창한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환경을 점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화하여 본원적 축적과정을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비자본주의적 환경 자체를 자본화한다. 즉 외부를 내면화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의 불가피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반제 투쟁은 반자본 투쟁이 된다. 자본은 또한 이윤율의 균등화와 포섭을 통해서 독점체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인 세계 시장으로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지녔다.

제국주의적 과정이 가져온 경계선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고 제국주의 세계 시장의 완전한 실현을 가로막는다. 자본은 결국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내부와 외부 사이의 장애물들을 파괴해야 한다. 이제 자본주의적 조절은 국민 국가의 조절에서 전지구적 시장의 정치적 조절로 나아가게 되며 이것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의 주요 특징이다.


2) 훈육 통치

점차 전지구적인 훈육국가가 등장하여 주민들의 생활주기를 더욱 광범위하고 깊게 포괄해 나가고 주민들의 생산 및 재생산을 자신의 교섭 틀 안에 질서지워 나간다.

지배 자본주의 나라들의 제국주의 정치는 새로운 전지구적 무대에서 탈식민화, 탈중심화, 그리고 전세계에 훈육적인 생산 및 지배 형태의 확산을 둘러싸고 조직되었다. 탈식민화 과정의 완성은 지배 관계의 새로운 세계적 서열화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표시했다. 미국이 확고하게 열쇠를 쥔 상태에서, 군사적 중장비를 통해서 권력을 휘두르던 국면에서 달러를 통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국면으로 넘어갔다. [… 그러나 유로화 움직임과 달러화 포기와 같은 최근의 추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네그리/하트는 미국 헤게모니의 확립이라는 세계적 정세를 두고 지금의 역사가 종착지에 다다랐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그 헤게모니 자체가 균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은 이 문제를 단순하게 간주할 수는 없게 하고 있다.] 탈중심화는 생산의 장소 및 흐름을 분산하는 과정으로 나타났다. 점차 초국적 기업들이 전지구를 횡단하여 자신들의 활동을 확실하게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들과 종속국들에서 경제적 정치적 변형의 근본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생산적 흐름의 분산을 통해 새로운 지역 경제와 새로운 전지구적 노동 분업이 결정되기 시작했다. 훈육과 지배 양식의 확산은 포드주의 임금체제, 테일러주의적 노동조직 방식, 근대적이고 온정주의적이고 보호적인 복지국가 모델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복지국가에 대한 약속은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충분한 동의를 얻어내는 미끼로 작용하였고, 그 효과는 바로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을 관통하는 훈육 체제의 확산이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식민지 이후의 제3세계가 거대하게 변형되었다. 특히 대중의 혁명적인 해방과정은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엄청나게 새로운 주체성 생산을 드러냈다. 세계 시장의 통일 경향으로부터도 몇 가지 중요한 효과들이 나타난다. 노동 및 사회를 조직하는 훈육 모델이 지배 지역으로부터 바깥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됨으로써, 나머지 세계에 수많은 주민들이 임금체계에 들어갔다. 새로운 훈육 체제는 훈육 체제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구축하고 자유롭고 싶어하는 훈육되지 않은 다수의 노동자들을 경향적으로 만들어낸다. 또한 대부분의 전지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동성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주체성의 움직임을 기존의 훈육 조건들 속에서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통제 형태가 제시되어야 했다.


3) 저항, 위기, 변혁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의 공격은 일차적으로 훈육적인 자본주의 노동 체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 공격은 일반적인 노동 거부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장 노동 거부로 표현되었다. 두 번째로, 노동자의 공격은 자본주의적인 노동 시장 분할을 전복시키는 데 일조했다. 사회 집단들의 분리, 노동 시장의 유동성, 그리고 추상 노동 시장의 위계들을 위협하면서 보장된 사회적 임금과 아주 높은 수준의 복지에 대한 전반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세 번째로, 노동자의 공격은 자본주의 명령[지배]에 직접 대항하여 전개되었다. 또한 종속적인 국가들에서의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지역 정치 체제와 국제 정치 체제에 개혁을 강요하였고, 특히 위기를 본국 영역에서 종속 영토들로 옮기는 구제국주의적 전략의 가능성을 제거했다. 제국에 들어서서 이러한 다양한 투쟁들은 하나의 공동의 적, 즉 국제적인 훈육 질서에 대항하여 결집하였다.

대중의 저항에 의해 야기된 위기에 대해 [… 저항에 의해 야기된 위기라기보다는 축적의 위기에 의해 야기된 위기가 옳지 않을까?] 자본은 억압 전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구성을 변형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택하였다. 자본의 억압 전략은 사회적 과정을 완전히 역전시키고, 노동 시장을 분리하고 해체시키며, 전체 생산 주기에 대한 통제를 재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자본은 보장된 노동자와 비보장된 주민층 사이의 분리를 재강화하였다. 각 국가 내부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사회적 이동성과 유동성을 통제함으로써 위계적 부서화 체계를 재구축하였다. 이러한 시도에서 휘두르는 중심 무기는 생산의 자동화와 컴퓨터화를 포함한 기술의 억압적인 사용이었다.

억압 전략에 이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구성을 변화시키려는,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노동 실행들을 통합하고 지배하며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려는 기술적 변형을 수반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적대심과 자율성 속에서 실제로 자본이 미래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만 할 사회적이고 생산적인 혁신 형태들을 발명한다. 자본은 이를 포획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트 주체성의 새로운 생산에 직면하고 대응해야만 했다. 이러한 주체성의 새로운 생산은 결국은 비물질적 노동의 전개 속에서 표현되는 생태적 투쟁, 즉 훈육 체제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생산성 형태의 실험으로 나타나는 생활 양식에 대한 투쟁에 도달했다.


4) 생산의 정보화

세계 시장의 경향적 실현은, 오늘날 한 나라 혹은 한 지역이 과거의 조건들을 재창조하고 한때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발전했던 것처럼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전지구적 권력 네트워크에서 격리시키거나 분리시킬 수 있다는 모든 통념을 파괴한다. 지배적인 국가들조차도 이제는 전지구적 체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세계 시장의 상호 작용은 모든 경계를 전반적으로 해체해 왔다. 점점 더 모든 고립이나 분리의 시도는 단지 전지구적 체계에 의한 더욱 잔인한 종류의 지배, 즉 무력함과 빈곤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생산 부문의 변화로서는 산업의 지배에서 서비스와 정보의 지배로의 이행을 지적할 수 있으며, 이것을 경제적 탈근대화 즉 정보화라고 부를 수 있다. 서비스업이 건강 보호, 교육, 그리고 금융에서부터 운송, 오락[연예], 그리고 광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활동을 포함하게 되고, 산업 생산도 정보의 요소들을 흡수해 감에 따라, 생산에서 지식, 정보, 정서, 그리고 소통이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생산은 서비스 생산을 향하고, 정보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생산 흐름들과 네트워크들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단호하게 나아간다. 또한 그러한 경향은 세계의 종속된 국가들과 지역들에게도 이러한 정보화 방향에서 하위 파트너로 합류하도록 강요한다. [… 최근에는 정보산업 이외에 문화산업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드림 소사이어티』참조). 생산의 정보화와 생산의 문화화(문화산업 not 작업장문화)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분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는 것은 산업에서의 자동화와 컴퓨터의 사용 증가이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컴퓨터처럼 생각하고 있고, 소통 기술들과 그것들의 상호 작용 모델은 더욱 더 노동 활동에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탈근대화 즉 정보화는 인간 되기의 새로운 양식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산업 기계의 전통적인 기법을 정보 및 소통 기술의 인공 두뇌적 지성cybernetic intelligence으로 실질적으로 대체해야 한다.

생산의 정보화는 주체의 측면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의 확산으로 볼 수 있다. 비물질적 노동의 첫 번째 형태는 정보화되어 온 그리고 생산 과정 자체를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소통 기술들을 통합해온 산업 생산 속에 포함되어 있다. 제조업은 하나의 서비스로 간주되고, 내구재를 생산하는 물질적 노동은 비물질적 노동과 혼합되고 비물질적 노동을 향한다. 두 번째 형태는 분석적이고 상징적인 일들을 하는 노동인데, 한편으로는 창조적이고 지성적인 처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따분한 일(예를 들어 타자 치기)들로 나누어진다. 세 번째 형태는 정서의 생산과 처리를 포함하고 (가상적인 혹은 현실적인) 인간적 접촉, 즉 신체적인 양식의 노동을 요구한다. 이런 비물질적 노동의 각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비물질적 노동의 협동적 측면은 외부로부터 부과되거나 조직화되지 않는다.

정보 경제로의 이행에서, 일관 작업은 생산 조직화 모델로서의 네트워크로 대체됐고, 이 네트워크는 각각의 생산 부지 안에서 그리고 생산 부지들 사이에서 협동과 소통 형태들을 변형시켜 왔다. 생산은 이제 수평적인 네트워크 기업들로 조직되는 경향이 있다. 생산의 탈영토화와 자본의 이동성 증가를 향한 이런 경향은 노동의 협상 지위를 약화시켰다. 확실한 안정성과 계약의 힘을 누려 왔던 전체 노동 인구는 점점 더 불확실한 고용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일단 노동의 협상 지위가 약화되면, 네트워크 생산은 자유 계약 노동, 가정 노동, 파트타임 노동, 그리고 삵일과 같은 다양하고 낡은 비보장 노동 형태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의 정보화를 특징짓는 생산 과정과 부지들의 탈중심화와 전지구적 분산은 생산 통제의 집중화를 촉진하였다. 몇몇 핵심 도시들이 금융 서비스, 무역과 관련된 서비스가 전지구적 생산 네트워크를 경영하고 지배하는 통제도시들로 떠오른다.

이제 소통 네트워크의 구조와 관리가 초국적 기업들에게는 가장 적극적인 합병과 경쟁의 지형이 되어왔다. 새로운 정보 인프라가 새로운 생산 과정에 완전히 내재적이게 된다. 전지구적 정보 인프라는 리좀적이며 완전히 수평적이고 탈영토화된 민주주의적 메커니즘과 방송국들에 특징적인 소수 독점적 메커니즘의 결합체로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전지구적인 정보 인프라를 사유화하는 자본주의 권력의 작동(소수 독점적인 모델)에 저항하여 공통적인 것(민주주의적인 즉 리좀적인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생산한다는 것은 점점 더 협동과 소통적 공통성들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 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 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 [… 소유 개념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착안은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접속의 시대)』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적 소유의 종말이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가 유포하고 있는 대표적인 환상 중의 하나이다. 그런 가운데 네그리/하트가 사적 소유의 해체를 전망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들의 입론이 ‘제국’의 동학을 강화하는 이론으로서 기능할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5) 혼합된 구성

생산 패러다임의 네트워크 모델로의 전환은 초국적 기업의 권력을 증대시켜 왔다. 이제 정치적 매개 메커니즘은 갈등의 매개 및 계급 갈등의 화해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범주를 통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관료적 매개와 경영 사회학이라는 범주를 통해 실제로 기능한다.

주권 권력의 측면에서 단일 정부의 통일성은 해체되어 일련의 기구들(전통적인 기구들 외에 은행, 국제적 계획 기관들, 기타 등등)에게 맡겨져 왔으며, 여기서 기구들은 모두 점차적으로 정당성을 권력의 초국적 수준에서 찾는다. 이처럼 거인들(초국적 기업과 전지구적 생산 및 유통 네트워크)이 지배하게 되고 국민 국가의 일국적인 헌법체계는 약화되면서, 새로운 전지구적 구성의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미국이 있고, 그 바로 밑에는 초국적 기업들과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있다. 맨 밑에는 인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집단들로 구성된다. 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에서 국민 국가들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지구적 인민은 정부 기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국가와 자본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다양한 조직들에 의해서 오히려 대변된다. 전지구적 시민 사회에서 가장 새로운 세력들은 바로 NGO들로, 이들도 누구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대표하는 것은 인민의 근저에 있는 생명력이며, 따라서 그들은 정치를 일반적인 삶이란 문제로 변형한다. [… 이 피라미드 자체에 재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일단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네그리/하트는 현 정세 속에서 미국 헤게모니를 다분히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편향을 보이고 있다.]

이 피라미드 구조는 경직된 경계를 지닌 불변적 구조가 아니다. 이 구조는 별개의 기능(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들의 유기적 상호작용의 혼합적인 성격에서 기능들 자체의 잡종화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 구조가 가변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요소들간의 가변성이 아니라, 하나의 요소 안에 존재하는 기능들의 혼합적/복합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가변성에 불과하다.] 보편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잡종적인 주체들이 형성되며, 제국은 이들을 통제하는데 집중한다. 제국은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혼합된 구성[입헌] 모델에서 잡종적 구성 모델로 넘어간다. 잡종적 구성의 다양한 기능들과 기구들을 결합하는 접착제는 공적 담론과 여론을 생산하고 조절하는, 통합되고 동시에 확산되어 있는 이미지 및 관념 장치인 스펙터클이다. 매체조작을 통한 제국의 스펙터클은 공포의 소통을 통해 통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물론 이러한 스펙터클에 대항하여 주체들의 새롭고 더욱 강력한 투쟁 장소들과 투쟁 형태들이 나타난다.


6) 전지구적 통제 사회의 관리

이제 제국적 주권은 초월성에 근거한 근대적 주권과는 달리, 지배관계의 연계와 네트워크를 통해 내재성의 구도 위에서 작동한다. 시민 사회라고 이해되는 것과 대부분 동일하거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훈육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 제도들(학교, 가정, 병원, 공장)은 어느 곳에서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제도들의 벽들이 붕괴됨에 따라, 이전에 그것들의 제한된 공간들 안에서 작동했던 주체화의 논리들은 이제 사회적 장으로 퍼지고, 사회적 장을 가로질러 일반화된다. 제도들의 붕괴, 시민 사회의 소멸, 훈육 사회의 쇠퇴는 모두 근대 사회적 공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통제 사회의 네트워크들이 생겨난다.

훈육의 내재적인 실행―즉, 주체들의 자기 훈육화, 주체성들 자체 안에서 훈육 논리의 끊임없는 속삭임―은 통제 사회에서 훨씬 더 일반적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통제 사회에서 주체성의 내재적 생산은 공리계적인 자본의 논리와 일치해 나간다. 훈육 사회에서 각 개인은 다수의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생활의 서로 다른 장소들과 서로 다른 시간들에 의해 규정되었다. 통제 사회에서는, 정확히 이러한 장소들, 이러한 적용 가능한 개별 장소들은 자신들의 규정과 경계 설정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통제 사회에서 생산된 잡종적 주체성은 제도 바깥에 있지만 제도들의 훈육 논리에 훨씬 더 강하게 지배당한다.

시민 사회의 소멸과 국가 경계의 쇠퇴 속에서 사회적 공간이 전반적으로 균등화되고 매끄럽게 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과 분할은 여러 측면에서 형태를 달리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제국은 극도로 불평등한 주민들이 아주 밀접하게 접근해 있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렇게 근접해 있다는 것은 영구적인 사회적 위험 상황을 만들어 내며, 분리를 유지하고 사회적 공간의 새로운 관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통제 사회의 강력한 장치들을 필요로 한다.

제국의 노동 정치는 우선 노동의 가격을 낮추려고 하며 모든 사람에게 일하도록 강요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노동은 많아지고 임금이 적어진다. 새로운 생산성 규범들은 노동자들을 분화시키고 분할한다. 화폐 정책은 노동 정책이 명령한 분할을 강화한다. 나아가 폭력, 빈곤, 그리고 실업에 대한 공포는 결국 이러한 새로운 분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적 행정은 분산시키고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으로서 행동하며, 자기 조절을 통해 그리고 제국의 내부 경찰력에 의해 갈등을 조절하고 폭력을 실행함으로써 지배한다. 근대적 국민 주권 체제들에서는 행정이 갈등을 선형적으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갈등을 억압할 수 있는 일관된 장치를 향해 작용하는 반면에, 제국적 틀에서는 행정이 프랙탈fractal하게 되고 차이들을 통제함으로써 갈등을 통합하려고 한다.

그래서 행정 문제는 통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구적인 다기능성의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행위들이 지닌 특이성과 적합성이다. 행정 행위는 점점 더 자기 중심적으로 되고, 따라서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특정한 문제에만 기능을 하게 된다.

근대 체제는 행정과 명령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행정을 명령과 더욱 더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에, 제국적 명령[지배]은 행정에서 분리된다. 제국적 명령은 훈육 양태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생체 정치적 통제의 양태들을 통해서 실행된다.

제국적 통제는 세 가지 전지구적이고 절대적인 수단들, 즉 폭탄, 화폐, 그리고 에테르를 통해서 작동한다. 절대적인 폭력의 작동인 수소폭탄(핵) 무기가 지닌 최고의 위협은 모든 전쟁을 제한된 갈등, 내전, 추한 전쟁 등으로 축소하였다. 나아가 모든 전쟁을 행정력과 경찰력이 독점하는 영역으로 만들었다. 화폐는 국내 시장의 화폐적 파괴, 일국적 그리고/또는 지역적 화폐 조절 체제의 해체, 그리고 국내 시장들의 금융 권력의 욕구에의 종속을 통해 세계 시장을 구축해 내는 전지구적인 절대적인 통제수단이다. 에테르는 제국적 통제의 최종적인 근본적 매개체이다. 소통의 관리, 교육 체계의 구조화, 그리고 문화의 조절은 최고 대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에테르 속에 용해된다.

요약하자면, 제국적 권력의 효율성은 폭탄에 의한 파괴에, 화폐에 의한 판결에, 소통에 의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경우들 각각에서 이런 메커니즘들의 통제력을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무력의 독점과 화폐 조절에는 부분적인 영토적 한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소통에는 그럴 수 없다.

이러한 제국적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정부, 거대한 기업, 거대한 노동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협동의 네트워크 속에서 대중의 자율적 자치를 구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이 얘기 역시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생산적 협동의 네트워크를 통한 자치의 구성이라 함은 ‘생산의 정보화’라는 계기가 사적 소유를 해체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논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우또노미나는 일시적이며 찰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꼬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디즈니랜드’와 같은 마술적 공간과 다를 게 없다. 앞서 지적했던 대로 사적 소유의 해체는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이 유포하는 환상 그 자체이다. 네그리/하트는 계속해서 자본이 스스로 다중들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그러한 기대심리가 오히려 자신들이 상론한 ‘제국’에 봉사하는 결과로 회귀할 것이란 예상은 못하고 있다. 달리 말해 ‘제국’의 도처에 다수의 ‘약한 고리들’이 상존해 있다고 말하지만,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 인식을 흐리게 할뿐더러 나아가 현실 도피마저 양산할 따름이다.]



6. 제국의 쇠퇴와 몰락


이제 제국을 넘어서는 운동 노선들을 추적하고 대안들을 밝히는 방향으로 나가보자.


1) 가상성

제국 권력의 무-장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척도를 벗어난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주목하고 척도를 넘어선 것(가상적인 것)을 사고해야 한다.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미리 구성된 척도를 벗어나 있다는 것이고 상황성[우연성]을 가져온다. 그러나 제국은 이러한 상황성이 전복성으로 되지 못하도록 권력을 행사한다. 그래도 가치는 측정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길러진다. 즉 가치는 인간의 고유한 지속적인 혁신과 창조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실제로 제국에서 가치는 척도를 넘어서 발생한다. 착취가 지속되고 생산적인 혁신 및 부의 창조가 계속된다는 점에서 가치는 여전히 강력하며 편재해 있다. 이 척도를 넘어서는 것, 즉 가상적인 것은 어떠한 외재적인 척도로부터도 자율적인 생산 활동(대중의 활동 역능)에 의해 구성되는 장소를 말한다.

그에 반해 제국적 권력은 자신의 생명력을 항상 새로운 에너지 및 가치 원천을 창조하는 대중의 역능에서 끌어오는 기생충이다. 대중의 가상적 역능이 지닌 척도를 넘어선 활동은 제국의 존재론적 직조를 구성하지만 제국의 구성된 권력과 끊임없이 갈등한다.

세계 공간이란 가상성 속에서 이동적인 대중은 전지구적 시민권을 획득해야 한다. 여기서 탈주의 형태로 유목론과 이종혼합을 제기할 수 있다. 대중은 축적된 지식, 기술, 그리고 노하우가 창조한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지성으로서 노동 역능을 지니고 있다. 제국은 이러한 역능을 빨아먹으려는 드라큘라이다. 따라서 제국에서는 가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이행의 상이한 대안들을 둘러싼 정치 투쟁이 중심적인 투쟁 지형이 된다. 가상적인 것은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접속시키는 이음새이며, 척도 바깥에 있으면 파괴적인 무기가 되고 척도를 넘어서 있으면 구성 권력이 된다. [… 그 척도의 바깥에 위치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가령 다중으로 집약되는 오늘날의 인간이 이데올로기적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인가? 스피노자식의 내재성의 구도를 너무 손쉽게 수용한 나머지 다중의 역능이라는 것을 신화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지젝은 들뢰즈가 가타리와 결합하면서 초기와는 다르게 『앙띠오이디푸스』 등을 통해 내재성 개념을 과잉정치화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2) 제국의 생성과 부패

대중의 저항에 의해 촉진된 위기 속에서 형성된 제국은 생체 정치적 세계이며 이 생체 정치적 세계의 원동력은 생성generation이다. 생성의 내용은 주체성이 지닌 특이하고 창조적인 과정이 사회에서 만들어 내는 노동 및 다양한 실험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주체성들(대중)의 욕망을 표현한다.

생성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부패는 욕망의 사슬을 깨부수며 생체 정치적 생산 지평을 가로질러 욕망의 확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부패 형태는 무한히 많지만 몇 가지를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근본적인 생체 정치적 생산에 의해 규정되는 공동체 및 연대와 대립하고 이것을 파괴하는 것(마피아 형태의 부패),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이른바 착취, 이데올로기의 기능 작용이나 언어적 소통 감각의 도착, 그리고 제국 정부가 실천하는 테러위협 등이 있다.

생성이 탈근대 속에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척도를 넘어선” 신체들이다. 제국은 이러한 특이한 신체들의 공동체를 파열시키려 하며 그 공동체의 삶을 방해하려고 한다. 제국은 각종 부패를 통해 대중의 협동적 자율성을 부추기면서 동시에 그 자율성을 방해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반면, 대중multitude은 그 자율성을 확장하여 구성권력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3) 제국에 대항하는 대중

제국에서는 정치를 구성하는 사회적 갈등들은 어떤 종류의 매개 없이도 직접적으로 서로 대결한다. 여기서 모든 피착취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어떠한 매개도 없이 제국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대중을 제시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몇 가지를 제안할 수 있겠다. 세계를 이동하는 자율적 대중이 지닌 역능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서 ‘전지구적 시민권’을 주장한다. 이것은 대중이 자신의 체류권과 이동권을 가짐으로써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재전유하여 새로운 지도를 제작할 수 있는 권리이다. 또한 공간적으로 주변화되는 다양한 층들을 포괄할 수 있는 연대의 고리로서 말이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생체 정치적 생산이란 상황에서 사회적 임금과 모두에게 보장된 수입을 확보해주는 ‘사회적 임금권’을 내세운다. 제국의 생체 정치적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루 종일 도처에서 일반적으로(항상) 생산한다. 바로 생체 정치적 생산의 이러한 일반성에 근거한 사회적 임금에 대한 요구는 자본 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보장된 수입이라는 요구를 전체 주민에게까지 확장시킨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비롯한 지식, 정보, 소통, 정서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재전유권’을 주장한다. 제국적 생체 권력 영역에서 생산과 삶이 일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계급 투쟁은 삶의 전 영역에서 폭발할 잠재력을 지닌다. 언어 감각 및 소통 감각, 기계 및 기계의 사용이라는 문제, 대중의 집합적인 경험과 실험, 생체 정치, 대중의 구성 권력 등에 기반하여 궁극 목적으로서 제기하는 주장이다. 재전유권은 정말로 자기 통제 및 자율적인 자기 생산을 위한 대중의 권리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강령적 요구를 담지한 대중의 활동적 힘[역능]posse이 재전유와 자기조직화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중의 생산 양식은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에 대항하여,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소유권에 대항하여,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패에 대항하여 제기된다. 나아가 노동 속에서 신체들을 자기 가치 증식하고, 협동을 통해 생산적 지성을 재전유하며, 자유 속에서 실존을 변형시킨다.

오늘날의 생산 매트릭스에서 노동의 구성 권력은 인간의 자기 가치 증식(세계 시장의 모든 부문에서 모두에게 균등한 시민권)으로서, 협동(소통할 수 있고, 언어를 구축할 수 있고, 소통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으로서, 그리고 정치 권력으로서 혹은 그 권력 기반이 모든 사람들의 욕구 표현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의 구성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노동자와 비물질적 노동의 조직화, 즉 대중이 관리하고, 대중이 조직하고, 대중이 지도하는 생체 정치적 통일체―작용하고 있는 절대적 민주주의―로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방향에서 제국의 시대에 투사의 모습은 대중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람, 즉 생체 정치적 생산과 제국에 대항한 저항의 담지자여야 한다. 이념을 갖춘 대변인으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의 역능(욕망)을 활성화할 수 있는, 즉 대표제적인 활동이 아니라 구성적인 활동을 해 나가는 활동가의 모습 말이다. [… 이 절에 대한 비판은 앞선 비판과 중복되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7. 맺음말


이상과 같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이라는 테제로 지구화(세계화) 논의를 정리하고 대중의 역능에 기초한 저항운동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직면하는 제국은 엄청난 억압과 파괴력을 휘두르지만, 그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구 지배 형태를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제국으로의 이행과 세계화 과정은 해방[자유화] 세력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물론 세계화[전지구화]는 하나의 사태가 아니라 복수적 과정이며, 통일되어 있거나 단성적이지 않다.

우리의 정치적 과제는 이러한 과정에 단순히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재조직하여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시 방향지우는 것이다. 제국을 유지하는 대중의 창조적 힘은 또한 대항 제국을, 즉 전지구적 흐름과 교환의 대안적인 정치 조직을 자율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을 구축하기 위한 투쟁뿐만 아니라 제국에 항의하고 제국을 전복하는 투쟁은 제국적 지형 자체 위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투쟁은 이미 전지구(세계적 공장)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감옥에서, 사무실에서, 길거리에서, 내 머리 속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러한 (거부)투쟁들을 통해 대중은 새로운 민주적 형태들을, 새로운 삶의 형태들을 만들어 감(자기가치증식)으로써, 제국을 관통하고 제국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의 권력을 장악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기계들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기계들을 발명함으로써 말이다. [… 물론 ‘제국’과는 다른 기계들 고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작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연계되지 않고 오히려 동떨어진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흔히 제3세계라고 불리는 지역이나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대중들은 점점 더 제국과 직접 대립하게 된다. 제국은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대중에게 직접 압박을 가한다. 더 이상 매개를 통한 해결이 아니라 모두가 모든 곳에서 나서야 할 때이다. 다양한 분자적, 국지적 투쟁들과 전지구적 연대투쟁들을 뱀처럼 요동치게 하면서 사회적 공장, 전지구적 공장 곳곳에서 벌여 나갈 때, 제국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공간들을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