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 문화이론

[노트]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

김성윤 2006. 4. 25. 15:19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


김성윤/ 2002년 4월 30일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의 화가」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영감을 줬던 아티클로서도 유명하죠. 물론 저 역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기 전에 준비하는 전초전으로 이 글을 읽었습니다. 이거 세미나한 게 상우형이랑, 성희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니깐(같이 세미나했거든요), 대략 3월말쯤 될 겁니다. 벌써 한달이...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글에선 대략 두 가지 개념이 중요합니다. 현대성과 댄디죠. 그 외의 몇몇 개념들 - 이를테면 군인, 창녀와 같이 알레고리화된 개념들이 있긴 한데요, 현대성이나 댄디처럼 직접적인 개념으로 쓰이진 않기 때문에, 저같이 인문학적 사고력이 떨어지는 놈한테는 좀 덜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성희누나와도 동감했던 부분인데, 창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가부장적입니다. 근대 초기의 전형적인 ‘누드화 보는 신사’의 시선이라고 할까요. 암튼 좀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 글의 제목이 「현대적 삶의 화가」라고 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대 화가의 삶’이 아니라, ‘현대적 삶의 화가’라는 점입니다. 이 글은 일종의 미술평론인데요, 미술가 G의 그림을 평해놓은 거죠. 그런데 보들레르는 현대 화가의 삶을 얘기하지 않고, 현대적 삶의 화가를 얘기합니다. 이것은 보들레르가 말하는 현대성의 개념과 댄디의 개념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보들레르에게 현대적 삶이란 댄디적 삶을 의미합니다. 바로 자신이 사는 방식이기도 했죠. 아, 여기서 댄디는 우리가 통상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댄디와는 전혀 다른 긍정의 의미로 읽힙니다. 물론 그 안에는 반항의 긍정성과 복속의 부정성이 내재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현대적인 것이라는 게 보들레르의 이야깁니다.

보들레르의 이런 생각은 제가 평소에 하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참 많이 공감이 갔습니다. 가령 저는 윤상, 유희열, 롤러코스터 등의 음악을 좋아하는데요. 이들의 음악이 충분히 부르주아적인 측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들레르가 얘기한 현대성/댄디의 냉소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록이나 힙합이 하위문화의 담론과 함께 이데올로기화되어서 흉내내기의 문화로서 들어온 이질적인 경험축적물이라면, 애시드 재즈나 애시드 팝 등의 음악은 오히려 흉내를 내더라도 상당부분 동질적인 경험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령 음악적으로는 제3세계적인 실험적(?) 사운드 발굴에 공을 기울인다든지(적어도 미국적이지는 않습니다), 가사적으로는 도시와 도시적 삶에 관해 자조 섞인 얘기들을 내뱉는다든지 등의 예가 그러합니다. (앗, 썰이 길었군요)

먼저, 현대성! 현대성은 무엇일까요? 보들레르의 현대성은 우리가 흔히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modernity의 개념과는 분명 다릅니다. 현대성은 미학의 문제설정 중의 하나인 ‘영원한 것’이기도 하며, 말 그대로의 의미대로 ‘순간적인 것’이기도 하답니다. 정신적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며, 불변한 것이면서도 찰나적인, 그런 것이 현대성이라고 합니다.

앗, 그런데 졸립군요. 2부는 여러분의 요청이 있을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면제로는 역시 발제가 짱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