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에서 그람시의 적절성


스튜어트 홀



해설 : 현재 개방대학에서 그간의 개인적?집단적 연구성과를 대중화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는 스튜어트 홀은, 학제를 넘나드는 독특한 연구방식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축적하여 ‘문화 연구’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영국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소(CCCS)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하나이다.

문화연구는 한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단지 이론지향적인 기획으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 기원과 지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1950년대 영국 상황에 대한 검토로 잠시 우회할 필요가 있다. 1945년 파시즘의 패배 및 그에 이은 노동당의 집권이라는 상황을 맞이하여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행을 위한 전진적인 프로그램을 내지 못하던 노동당과 공산당의 무능함이 냉전의 격화와 중첩되면서 그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들은 다른 전략을 구상해야 했다(50년대 말 시작된 신좌파의 흐름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전쟁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노동계급 교육의 틀을 재편해야 하는 상황이 이와 맞물리면서, 노동계급 교육은 민중교육/성인교육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틀로 대학에 편입된다. 그 과정에서 대학 밖에서 노동계급과의 만남을 지속했던 지식인들도 함께 편입되었으며(대표적인 예로 에드워드 톰슨과 레이몬드 윌리엄즈를 들 수 있다), 성인교육 커리큘럼 또한 문학-예술 등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노동계급-민중의 문화에 대한 규명을 통해 사회운동에 기여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처럼 영국에서의 문화연구는 민중교육이라는 정치적 시도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1)

홀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현대문화연구소는 톰슨, 윌리엄즈, 호가트로 대표되는 50년대의 이러한 흐름의 연속선상에서 출발했다. 문학적 색채를 짙게 드리우면서 넓은 의미에서 정서구조(structure of feeling)와 관련된 연구에 집중했던 초기와 달리, 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알튀세르로 대표되는 대륙의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를 상당 부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영국 문화연구 1세대들과 기본적으로 연속선상에 놓여 있기에, 구조주의적 설명에 완전히 함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들은 70년대 중반 이후,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매개할 수 있는 인물로 그람시에 주목한다.

이 기간 동안의 홀의 지적 궤적 역시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틀, 즉 노동계급의 능동적 문화 생산에 주목하는 문화주의 및 의미작용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조주의적 문제틀의 비판적 수용, 헤게모니와 국면 분석 등에 관한 그람시 이론의 수용을 통한 양자의 종합 시도로 축약될 수 있다. 홀은 이러한 틀에 기초하여 미디어, 하위문화, 포스트모더니즘, 정체성 및 대처리즘에 대한 국면 분석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유용한 연구를 남겼다.2)


독창적인 대가라기 보다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자원들을 맥락에 따라 잘 정리하는 쪽에 가까운 홀의 스타일은, 1986년에 쓰여진 이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글에서 헤게모니, 국면-세력 관계 분석, 대중의 상식에 대한 주목 등 그람시 사상의 제 요소들이 문화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적절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진 주제인 인종-종족-민족 연구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이탈리아라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기반하여 그람시 사상을 조목조목 정리하되, 그 함의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확장하고자 하는 홀의 해석 방식은 매우 복합적인 그의 사상을 단 몇 개의 어구로 축소시켜 손쉽게 정리한 후 박제화시켰던 남한 연구자들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그람시 사상의 현대적 확장이 ‘특정한 문제에 대한 그의 사고를 직접적으로 이전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그의 독특한 이론적 조망을, 그 영역을 규정하고 있는 미발달된 이론적-분석적 문제들에 집중하는 문제’라는 홀의 지적은 기억할 만하다.


이 글에서 홀이 명쾌하게 정리한 내용, 즉 문화연구에 그람시 사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는 앞에서 거론한 톰슨, 윌리엄즈와 CCCS 외에도 수용이론과 관련된 성과 등 이미 여럿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인종-종족-민족 부문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작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리엔탈리즘 분석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이드는 자신의 방법론적 기반 중 하나로 그람시를 활용하면서, 시간성을 중심문제로 삼고 있는 루카치와 달리 그람시는 지형, 영역, 블록, 지역 같은 지리적 용어들로 역사적 현실을 파악하는 감각이 탁월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간 맑스주의가 간과한 측면 중 하나인 공간적-지리적 불평등과 위계제에 대한 비판적 감각을 회복하는 데 그람시가 중요한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 또한 이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3)

이처럼 그람시 사상에 대한 충실한 규명과 현대적 확장은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의 사상을 상당 부분 박제화시켰던 우리 맥락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에 우리에게 소개된 르네이트 홀럽의 저작4)은 주목할 만하다. 92년에 쓰여진 이 저작에서 홀럽은 문학, 연극, 언어학 등에 대한 그람시의 분석을 프랑크푸르트 학파, 벤야민, 브레히트, 블로흐 및 러시아의 언어학자 볼로쉬노프 등과 같은 20세기의 여타 지적 흐름과 비교-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그람시 사상의 함의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러한 분석은 그간 간과되었던 영역으로 그에 대한 연구를 단순히 확장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치/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분석과의 유기적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대응을 해명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람시의 ‘대응 구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홀럽의 저작은 이 글에서 홀이 시도한 방식과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체적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의 분석이 그람시에 대한 우리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며, 발달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그람시 사상의 광맥을 탐사하는 작업은 이제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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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5)의 목적은, ‘불관용성과 인종주의 및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에 관하여... 이제까지 별로 해명되지 않은 인종주의 현상에 대한 보다 정교한 검토 및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이론적 정식(定式)과 패러다임, 해석 체계의 적절성에 대한 검토'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항목(rubric) 덕분에, 나는 정확하게 그람시의 저작에 대한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을 보다 넓은 기획에 위치지을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람시의 저작은 비교적 넓은 범위의 역사적 사회들을 가로지르는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사회과학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가 잠재적으로 기여한 것은 보다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있는 중요성을 지닌 채로 남아 있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저작은 ‘정교한(sophi- sticating)’ 종류의 것이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맑스주의 패러다임 내에서 작업했다. 그러나 그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틀의 여러 측면들을 광범위하게 수정하고, 혁신하고, 정교화하여 그것을 20세기라는 동시대의 사회적 관계에 보다 적절한 형태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저작은 기존 사회이론들의 ‘적절성’이라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는 다름 아니라 ‘기존의 이론 및 문제들에 대한 복합적인 파악’을 지향한 것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이론적으로 기여한 것을 실재적으로 요약하고 평가하기 전에, 이 점을 보다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람시는 ‘일반적인 이론가’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어떠한 류의 탁상공론적이거나 학구적인 이론가로서 실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이탈리아 정치 상황에서 정치적 지식인이자 사회주의 활동가였고 계속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의 ‘이론적인’ 저작은 그 자신의 사회와 시대에 대한 이러한 보다 유기적인 관여로부터 진전되어 나갔고, 항상 추상적이고 탁상공론적인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을 알려내는’ 목적에 부합하려는 의도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그람시의 개념들이 작동하면서 적용되는 수준을 잘못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이,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 및 20세기 초반의 몇십년 동안 활동했던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라브리올라, 톨리아티 등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규정된 맑스주의 학문 전통에 의해 개설(槪說)된 역사유물론이라는 광범한 범위(parameter) 내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이름들을 인용한 것은 맑스주의 사상 내에서 그람시가 참조한 틀을 지적하기 위해서이지, 이러한 개개의 인물들에 대한 그의 정확한 입장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후자를 입증하는 것은 보다 복잡한 문제이다.) 이것은 그의 이론이 넓은 의미의 맑스주의 지형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이해한 상태에서, 그의 이론적 기여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맑스주의는 그람시의 발전, 정련화, 수정, 전진, 더 나아간 사상, 새로운 개념 및 독창적인 정식(定式) 모두가 작동하는 일반적인 한계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람시는 교조적이고 정통적인 혹은 ‘종교적인’ 의미의 ‘맑스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맑스의 전반적인 이론 체계가 지속적으로 이론적 발전을 해야 하며,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며, 맑스와 엥겔스가 예견할 수 없었던 사회의 발전과 연관되어야 하며, 새로운 개념의 추가를 통해 확장되고 정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람시의 저작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정통 맑스주의라는 체계에 대한 ‘주석’이나 이미 잘 알려진 ‘진리들’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순환적인 정설을 의례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람시는 맑스주의 이론에 담긴 통찰들 중 많은 부분을 새로운 문제들과 조건들을 향해 진전시킨 진정으로 ‘열려 있는’ 맑스주의를 실천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저작은,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현대 세계에서 조우하게 되는 복잡한 사회현상들을 맑스주의 이론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작동시켰는데 이는 고전적인 맑스주의가 제공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람시의 저작을, 기존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이론적 정식과 패러다임 및 해석체계’의 배경에 반하여 위치짓고자 한다면 이러한 점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람시의 저작은 일반적인 ‘사회과학’ 작업이 아닐 뿐 아니라 막스 베버나 에밀 뒤르케임 같은 ‘[사회과학의] 창시자들(founding fathers)’의 저작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곳에서도, 그들 경우처럼 인식될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이고 종합적인 형식을 지니고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람시의 이론적 사고의 주요한 부분은 목적의식적인(occasional) 논문과 논쟁적인 저작 -- 그는 활동적이고 다작을 생산하는 정치 저널리스트였다 -- 및 방대한 ??옥중수고?? 전집에 흩어져 있는데, ??옥중수고??는 체포된 후 토리노에 있는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강요된 여가를 보내야 했던 기간(1928-33) 혹은 석방되어 정식 병원에 있긴 했지만 이미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을 때(1934-5) 도서관이나 다른 참고서적들에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이 없는 상태에서 쓰여진 저작이다. 지금은 ??옥중수고??를 포함하여 이러한 파편적인 저작의 대부분을 주로 로마의 그람시 연구소(Istituto Gramsci)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곳에서는 그의 저작에 대한 중요한 한정판 출간을 완성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6)

저작들은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관성 있고 ‘완결된’ 글들이라기 보다는 종종 형식에서도 파편적이다. 그람시는 때로는 -- ??옥중수고??를 쓸 때처럼 -- 아주 불리한 여건에서, 예를 들면 감옥 검열관의 감시의 눈 아래에서 그리고 기억을 되살릴 어떠한 문헌들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썼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옥중수고??는 놀라운 지적인 업적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방식으로 ??옥중수고??를 써야만 했으며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간을 얻을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된 ‘비용’은 상당히 컸다. 사람들은 ??옥중수고??에 대해, 그것은 더 간략히 쓰여지거나 더 길게 쓰여져야 했으며 일관성 있는 담론이나 응집력 있는 텍스트로 짜여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가장 복합적인 주장들 중 몇몇은 주요 텍스트에서 긴 각주로 옮겨졌다. 몇몇 구절들은 재정식화되었지만, 남아 있는 판(版) 중에서 그람시가 보다 ‘명료한(definitive)’ 텍스트로 간주했던 부분의 구절들로 인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파편화’된 측면들이 우리에게 만만치 않은 어려움들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람시의 저작은 또다른, 훨씬 심층적인 의미에서 파편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나 정치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이론’을 사용했다. 즉 범주가 넓은 개념을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키는 것과 관련시켜 사고했다. 그 결과, 그람시의 저작은 종종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특수하며, 참조하는 데 지나치게 한계가 있으며, 지나치게 ‘서술적으로’ 분석하고 있고, 시간과 상황에 지나치게 구속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가장 눈부신 사고와 정식들은 이처럼 전형적으로 국면적인(conjunctural)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새겨져 있는 그것을 정교하게 파내어 상당한 주의와 인내를 가지고 새로운 토양에 이식해야 한다.

몇몇 비판자들은, 그람시에게는 자신의 개념을 고도의 개념적 일반화의 수준 -- ‘이론적 사고들’이 기능한다고 여겨지는 고양된(exalted) 수준 -- 까지 끌어올릴 시간도 의도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개념들은 단지 이러한 구체의 수준에서만 작동한다고 간주해왔다. 알튀세르와 풀란차스, 이 두 사람이 불충분하게 이론화된 그람시의 텍스트를 ‘이론화’할 것을 서로 다른 시기에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다. 여기에서, 인식론적 견지에서 볼 때 그러한 개념들은 매우 다른 추상수준에서 작동할 수 있으며 종종 그렇게 되도록 의식적으로 의도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점은 하나의 추상수준을 다른 것으로 ‘오독’하지 않는 것이다. 높은 추상수준에서 작동하도록 고안된 개념들이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낮은’ 또다른 작동 수준으로 옮겨질 때 마치 그 개념들이 자동적으로 동일한 이론적 효과를 산출하는 것처럼 간주하여 그 개념들을 ‘해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스스로 심각한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람시의 개념들은 명백하게 역사적 구체성이라는 낮은 수준에서 작동하도록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는 ‘높은 추상추위를’ 목표로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론적 목표물을 놓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그람시와 맑스주의의 연관성에 기초하여 이러한 역사적-구체적인 서술 수준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말했듯이, 그람시는 자신의 사고를 맑스의 전반적인 이론틀 내에서 발전시켰다는 의미에서 ‘맑스주의자’로 남았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 ‘생산력과 생산관계’ 등과 같은 개념들을 당연한 것들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가장 일반적인 추상 수준에서 맑스가 제시한(pitched)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러한 개념들은, 자본주의가 그 적나라한 본질을 드러냈을 때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발전의 어떠한 단계나 계기에서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조직하고 구조화하는 폭넓은 과정을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이다. 그 개념들은 범위와 준거(reference)에서 ‘획기적’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이러한 개념들이 특수한 역사적 사회구성체나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에 있는 특수한 사회들에 적용되어야 하자마자, 이론가는 ‘생산양식’ 수준에서 보다 낮고, 보다 구체적인 적용 수준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러한 ‘이전’은 보다 상세한 역사적 특성 뿐 아니라, 자본과 노동 사이의 착취 관계를 단순히 고수하는 것에 덧붙여 -- 맑스 자신이 주장한 것처럼 -- 새로운 개념과 더 진전된 결정 수준의 적용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후자[자본과 노동 사이의 착취 관계의 단순한 고수]는 단지 최고의 준거 수준에서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명시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장 정교한 방법론 텍스트(Grundrisse 1857년 ‘서문’)에서, 맑스 자신은 분석적 추상의 최고 수준에서 형성된 필연적으로 개략적이고(skeletal) 추상적인 개념들 각각에 더 진전된 결정 수준을 부가하는 일련의 분석적 접근을 통해 ‘사고에서 구체(the concrete)의 생산’이 발생한다고 전망했다. 맑스는 우리가 오로지 이러한 연속적인 추상수준을 통해 ‘구체를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구체는 ‘수많은 결정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 물론 우리가 구체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 활용하는 추상수준은, 사고 속에서 그에 근접해야만 한다.7)

그람시가 맑스의 성숙한 개념들(예를 들면, ??자본??에서 대략적인 모습이 그려진)의 일반적 지형에서 특수한 역사적 국면들로 이전했을 때, 그가 여전히 그들이 준거한 영역 ‘내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 즉 1930년대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 혹은 제국주의와 대중민주주의의 도래 이후 ‘서구’의 계급 민주주의의 복합성에서의 변화들, 혹은 유럽에서 ‘동구’와 ‘서구’ 사회 구성체 사이의 특정한 차이들, 혹은 새롭게 부상하는 파시즘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 형태, 혹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에 의해 작동되기 시작한 정치의 새로운 형식에 대해 논의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때, 그는 맑스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발전시키며, 새롭고 독창적인 것들로 보완할 필요를 이해한다. [그것은] 첫째, 맑스는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수준에서 보다는 가장 높은 적용 수준에서(??자본??에서처럼)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많은 것을 암시하는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영국 국가의 특수한 구조에 대한 맑스 자신의 실제적인 분석은 없다). 둘째, 그람시가 글을 쓰고 있던 시대의 역사적 조건들이 맑스와 엥겔스가 살았고 그에 대해 글을 썼던 시대의 역사적 조건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람시는 이론적 산물의 역사적 조건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로, 그람시가 맑스의 이론적 작업 자체가 매우 개략적이고 불완전했던 바로 그 수준에 대해 새롭게 개념화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고전적 맑스주의의 사회구성체 분석에서 가장 무시된 차원인,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대한 또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 대한 분석 수준에 대해서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가 단지 그람시를 맑스주의 전통과 관련시켜 ‘위치짓는’ 것 뿐 아니라 그람시의 저작이 실제적으로(positively) 작동하는 수준과, 확대된 수준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필요로 하는 변형을 명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람시의 저작은 특히 1870년대 이후 시기의 사회구성체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한 분석과 연관된 새로운 개념과 사고, 패러다임을 산출하는 것과 가장 적절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사회의 경제적 기반 및 그 관계라는 중요한 요소를 결코 망각하거나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분석의 그 수준에 대한 독창적인 정식을 통해 기여한 것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상당히 무시되어온 국면 분석의 영역에 존재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국가, 정치체제의 상이한 유형들의 특성, 문화적이고 국민적-민중적(national-popular)인 문제들의 중요성, 그리고 사회에서 상이한 사회세력들간의 균형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시민사회의 역할 --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람시는 엄청난 기여를 했다. 그는 20세기 후반을 지배하게 된 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최초의 독창적인 ‘맑스주의 이론가들’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인종주의와 관련된 그의 독창적인 기여는 그의 저작이 놓여 있는 상황으로부터 단순히 도매금으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람시는 인종, 종족(ethnicity) 혹은 인종주의에 대해 그것들의 현대적 의미나 명시적 표현으로 쓰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현대 세계에서 독특한 ‘인종주의적’ 경험과 관계들의 많은 수가 그로부터 발생했던 식민지 경험이나 제국주의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하지도 않았다. 그가 주로 몰두했던 것은 조국 이탈리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서구와 동구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문제, 발전된 ‘서구’ 자본주의 사회들에서 발생한 혁명의 실패, 전간기에 파시즘의 발흥으로 인해 제기된 위험, 헤게모니 건설에서 정당의 역할은 모두 그[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에 뒤따르는 문제들이었다. 피상적으로 파악할 경우, 이 모든 것은 그람시가 이른바 ‘서구 맑스주의자’라는 저명한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페리 앤더슨이 규정한 이 서구 맑스주의자라는 집단은, 보다 ‘선진적인’ 사회들에 대해 몰두하느라 주로 비유럽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나 자본주의 ‘중심’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지구화되고 식민화된 주변부 사회들 간의 ‘불균등 발전’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적절하게 발언한 경우가 거의 없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그람시를 독해하는 것은 축어적 이해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몇 가지 유보조건을 달고 있지만, 앤더슨 역시 그런 방식으로 그람시를 독해하고 있다). 실제로 그람시가 인종주의에 대해 글을 쓰지도 않았고 그러한 문제들을 특별히 언급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개념들은 이러한 영역들에 관한 기존 사회 이론 패러다임의 적절성에 대해 사고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여전히 유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지적 관심사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정식 또한, [그의 사상을]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보았을 때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달리,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실제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람시는 1891년에 사르디니아에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는 이탈리아 본토와 ‘식민지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가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상들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사르디니아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배경 하에서였는데, 그것[사르디니아 민족주의]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토리노로 이주하여 그 곳 노동계급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은 후 초창기의 ‘민족주의’를 포기하긴 했지만, 그는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부여된, 농민 문제 및 계급과 지역적 요소들간의 복합적인 변증법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8) 그람시는 공업화되고 현대화된 이탈리아 ‘북부’를, 농민적이고 저발전되었으며 의존적인 ‘남부’로부터 갈라놓았던 거대한 분할선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남부 문제’로 알려지게 된 논의에 심대하게 기여했다. 1911년 토리노에 도착했을 때, 그람시는 ‘남부주의적’ 입장이라고 불린 것에 거의 확실히 동의했다. 그는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고 있는 이러한 의존과 불균등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도시와 농촌,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 후견인주의(clientism)와 모더니즘, 봉건적 사회 구조와 산업화된 사회 구조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에 대하여 평생 동안 관심을 유지했다. 그는 계급 관계에 의해 결정된 분할선들이 지역적, 문화적, 민족적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관계들과 지역적 혹은 일국적인 역사 발전 속도의 차이에 의해 뒤섞여 버린 정도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1923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하나이던 그람시가 “통일(Unita)”을 당 기관지의 표제로 할 것을 제안하였을 때, 그는 그 이유를 “왜냐하면.....우리는 남부 문제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혔다. 1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그는 토리노 노동계급의 정치생활의 모든 측면에 몰두했다. 이 경험은 유럽의 산업화된 ‘공장’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서 가장 선진적인 층위 중 하나에 대해 그가 깊이있게 그 내부까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현대 노동자 계급의 이러한 선진적인 부문과 연관되어 있는, 활동적이고 지속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회당 주간지인 <민중의 소리(Il Grido del Popolo)> 편집부에서 정치적 저널리스트로서, 그 다음엔 토리노에서 격변의 파고(이른바 ‘붉은 시절 Red Years')가 이는 동안 공장 점거와 노동자 평의회에서, 마지막으로 저널 <신질서(Ordine Nuovo)>를 편집할 때부터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설할 때까지 그는 계속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내내 그는 구체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투쟁을 통일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동과 조직의 전략과 형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했다. 그는 특히 현대 이탈리아 국가의 복잡한 동맹들과 그 기반이 되는 상이한 사회 계층 간의 관계에서 어떠한 토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몰두했다. 지역적 특수성, 사회적 동맹 및 국가의 사회적 기반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가 몰두한 사실은 또한, 그의 저작을 ‘동구/서구’ 문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남반구/북반구’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게 해 준다.

1920년대 초반에 그람시는 정치 ‘정당’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개념화를 시도하는 어려운 문제와, 소비에트에 기반한 코민테른의 지배적인 추세(thrust)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의 민족적 조건에 고유한 발전 경로를 분별해내는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이 동구와 서구라는 다른 사회들의 매우 상이한 구체적인 역사적 발전과 연관된 ‘민족적 특수성’이라는 조건을 이론화하는 데 주요한 공헌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그람시의 관심사는, 1926년9) 무솔리니 세력에 의해 체포?억류될 때까지, 파시즘의 점증하는 위협이라는 맥락에 의해 주로 틀지워졌다.10)

따라서 그람시가 인종주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저작에서 몰두한 주제들은 주마간산격으로 그의 저작을 훑어볼 때 시사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이러한 동시대의 많은 문제들과 연관된, 심오하게 지적이고 이론적인 노선들을 제공해 준다.


2


우리가 이제 [논의를] 전환할 방향은, 바로 이러한 보다 심층적인 관련성 및 그 분야를 보다 충분히 이론화하기 위한 탐구를 풍요롭게 해 줄 그람시 사상의 영향력이다. 나는 그러한 방향을 가리키는, 그람시 저작의 핵심 개념들 몇몇에 대한 해명을 시도할 것이다.

나는, 그람시의 저작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접근하는 학생들에게는 그의 생애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더 다가오는 문제 즉 고전적 맑스주의 내의 ‘경제주의’와 ‘환원주의’의 모든 잔재들에 대한 그의 격렬한 공격에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경제주의’라는 용어를 -- 내가 이미 그 의미를 분명히 밝혔기를 바라지만 --, 사회생활의 전(全)체계를 형성하고 구조화하는 데 있어서 사회 질서의 경제적 기반이나 한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가 수행하는 강력한 역할을 무시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달리, 나는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유일한 결정 구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특정한 이론적 접근방식이라는 의미로 [그 용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사회구성체의 다른 모든 차원을 ‘경제(the economic)’와 접합되는 또다른 수준에서 그것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는 결정하거나 구조화하는 다른 힘을 갖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접근방식은 한 사회구성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경제적 수준으로 환원시키고, 사회관계의 다른 모든 유형을 경제적인 것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조응하는 것으로 개념화한다. 이것은 다소 문제를 안고 있는 맑스의 정식 -- ‘최종심에서 결정하는 요소’로서 경제 -- 을, 최초, 중간 그리고 최종심 모두에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경제가 결정한다는 환원주의적 원리로 망가뜨려 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주의’는 이론적 환원주의이다. 그것은 사회구성체의 구조를 단순화시켜서, 수직적?수평적으로 접합되는 그것의 복합성을 단일한 결정 노선으로 환원시킨다. 그것은 ‘결정’이라는 바로 그 개념(맑스에게 있어 이는 실제로 매우 복합적인 관념이다)을 기계적으로 기능하는 개념으로 단순화한다. 그것은 한 사회의 상이한 수준들 사이의 모든 매개를 단조롭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사회구성체를 --알튀세르의 말에 의하면 -- ‘단순한 표출적 총체성(expressive totality)’으로 제시하는데, 그것에서 접합의 모든 수준은 다른 모든 것에 조응하며 철저하게 구조적으로 투명하다. 나는 이것이 맑스의 저작에 대한 심대한 훼손과 단순화 -- 예전에 맑스로 하여금 절망에 빠져 “그것이 맑스주의라면,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게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단순화와 환원주의 -- 를 의미한다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맑스의 저작 중 일부에는 이런 방향을 가리키는 것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그것은 정통 맑스주의 버전과 가장 밀접하게 조응하는데, 이는 제 2 인터내셔널 시대에 신성시되었고 오늘날에조차 종종 ‘고전적 맑스주의’의 순수한 교의로서 제기된다. 사회구성체에 대한, 그리고 접합의 상이한 수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와 같은 개념 -- 이는 분명해져야 한다 -- 에는 인종, 종족(ethnicity), 민족(nationality), 성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사회적 분열과 모순 같은 사회적 차별의 상이한 유형들을 개념화하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차원을 개념화하는 방식이 가능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

그람시는 처음부터 이런 유형의 경제주의에 단호히 반대했으며, 생애의 후반 부분에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이를 신성시하는 바로 그것에 맞서 지속적으로 이론적 논쟁을 전개했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은, 그의 저작의 상이한 요소들에서 비롯된 두 가지 사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현대의 군주」에 대한 논문에서 그람시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대한 분석에 착수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는 경제적 결정으로부터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발전을 ‘읽어내는’ 환원주의적 접근을, 훨씬 복합적이고 차별적인 유형의 분석으로 대체한다. 이는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세력 관계’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여, 그와 같은 국면의 발전에서 ‘다양한 계기들 혹은 수준들’을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 차이를 없애버리기 보다는)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11) 그는 ‘구조에서 복합적인 상부구조 영역으로의 결정적인 이행’이라고 스스로 지칭한 것에 관한 이러한 분석 과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부구조 영역을 경제적 구조 내지 ‘기반’으로 환원시키는 어떠한 경향이라도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것이 환원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특정 시기의 역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력들을 정확히 분석하고 그들간의 관계를 결정하고자 하는 경우, 반드시 정확하게 제기해야 하는 문제는 다름아닌 구조와 상부구조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12) 그는 경제주의가, 이처럼 중요한 일련의 관계들을 제기하기에는 이론적으로 부적절한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그것은 특히, ‘모든 내적 관련성을 지닌....경제적 계급 조직’에 대한 보다 충분하고 구조적인 분석을 ‘직접적인 계급 이해’에 기반한 분석으로(‘이로부터 누가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는가’라는 질문 형식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13) 그는 “직접적인[강조는 필자] 경제적 위기가 근본적인 역사적 사건을 저절로 발생시킨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역사적 위기의 진전에서 경제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와 달리, 그[직접적인 경제적 위기] 역할은 ‘특정한 사고방식 및 국민적 생활의 이후의 발전 전체와 연관된 질문을 제기하고 풀어갈 특정한 방식을 확산시키는 데 보다 유리한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4) 간단히 말해서, ‘객관적인 경제적 위기’가 어떻게 사회 세력의 균형 관계 변화를 거쳐 국가와 사회의 위기로 실질적으로 발전하고, 윤리적-정치적 형태의 투쟁으로 성장하여(germinate) 대중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주기 전에는, 구조와 상부구조 간의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이행’에 기반한 적절한 분석을 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경제주의적 환원주의가 스스로의 흔적으로 남겨두는 자명한(immediate) 무오류성 같은 것은 ‘매우 가치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론적 중요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 함의나 실천적 유효성 또한 최소한일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단지 도덕주의적 설교와 인격에 대한 끝이 안 나는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15) 그것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미리 정해져 있는 목적론에 대한 믿음과 함께, 자연 법칙과 유사한 객관적인 역사 발전 법칙이 존재한다는 불굴의 확신"에 기반한 개념이다. ‘헤게모니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것 -- 그람시는 이것이 부적절하게 역사유물론과 동일시되어왔다고 주장한다 -- 의 붕괴에 대한 대안이 없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주장의 전반적인 추세로부터 우리는, 그람시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주요 개념들(예를 들면, 헤게모니)과 독특한 접근 방식(예를 들면, ‘사회 세력들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한 접근 방식) 중 많은 부분을 맑스주의의 몇몇 버전에서 드러나는 경제주의적 환원주의 경향에 대한 방어벽으로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경제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맑스주의 내에서 그와 연관되어 있는 경향들인 실증주의, 경험주의, ‘과학주의’ 및 객관주의와 결합시켰다.

이것은 부하린의 ??역사유물론의 이론: 대중적 사회학 소책자??에 내재되어 있는 ‘천박한 유물론’에 대한 명시적인 비판으로 쓰여진 텍스트인 「맑스주의의 문제들」에서 훨씬 명확하게 드러난다. 부하린의 책은 1921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어 여러 판을 찍었으며 (레닌이 그와 관련해 부하린은 불운하게도 ‘변증법에 대해 무지하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 맑스주의의 한 사례로서 종종 인용되었다. 「맑스주의의 문제들」이라는 자신의 논문의 두 번째 부분이던 「대중적 사회학 시도에 대한 비판적 노트」에서 그람시는 경제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인식론과 과학적 보증을 그럴듯하게 추구하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박하고 있다. 그람시는 그것들이, 사회과학자들이 자연과학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의 ‘객관성’과 같은 것으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했던 것에 직접적으로 기초하여 사회와 인간의 역사적 발전 법칙을 모델링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실증주의적 모델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규칙성’, ‘필연’, ‘법칙’, ‘결정’과 같은 용어들을, ‘자연과학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정치경제학의 지형에서 탄생한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정된 시장(determined market)’은 ‘생산기구의 결정된 구조에서 사회 세력들의 결정된 관계’를 실제로 의미해야 하는데, 그 때 이 관계는 ‘결정된 정치적, 도덕적, 법률적 상부구조’에 의해 보증된다(즉 영구적인 것으로 된다). 그람시의 정식이 분석적으로 환원된 실증주의적 정식에서 사회과학으로 틀이 잡힌 보다 풍부하고 보다 복합적인 개념화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그 대체물을 보면 훨씬 분명해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람시의 압축적인 주장에 무게를 더해 준다:


역사유물론의 본질적인 가정으로서 제시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모든 동요는 구조(즉 경제적 기초)의 직접적 표현으로서 제시되고 해명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 원시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실제로 구체적인 정치적?역사적 저작을 지은 맑스 자신의 신뢰할 만한 증언과도 어긋난다.16)


그람시가 맑스주의 지형 내에서 성취하고자 전념했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상당히 자기의식적으로 이룩된 것이었으며 그가 이후에 발전시킨 사상의 전체적인 추세에서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이론적 출발점에 대한 고려 없이는, 그람시와 맑스주의 학문 전통의 복잡한 관계를 적절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그람시가 환원주의의 단순함과 단절했다면, 그는 그 후 어떻게 하나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보다 적절한 분석에 착수할 수 있었을까? 주의 깊게 움직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간략한 우회에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람시에게서 심대하게 영향받은) 알튀세르와 그의 동료들은 ??자본을 읽자??17)에서 ‘생산양식’과 자신들이 ‘사회구성체’라고 부른 것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행하는데, 생산양식은 사회를 특징짓는 경제적 관계의 기본적 형식을 지칭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도 경제에 의해서만 기능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는 분석적 추상이다. 사회구성체라는 후자의 용어를 통해 그들은, 사회들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결합하는 상이한 접합 수준(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심급)을 지닌 필연적으로 복합적으로 구조화된 총체이며 각각의 결합은 사회 세력들의 상이한 배치 및 그로 인한 사회 발전의 상이한 유형을 발생시킨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본을 읽자??의 저자들은 ‘사회구성체’의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그[사회구성체] 내에서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이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며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다(우리가 이후에 다루게 될 포스트 식민 사회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실이 두 용어 사이의 가장 중요한 구분점인 것 같지는 않다. ‘사회구성체들’에서는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으로 구조화된 사회들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서 상이한 접합 수준들은 단순히 서로 조응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 알튀세르의 적절한 은유에 의하면 -- 서로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의해 ‘중층결정’된다.18) ‘생산양식’ 개념과 필연적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구성체’ 개념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단순히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접합 수준들을 이처럼 복합적으로 구조화한다는 것이다.

이 때 이 후자[사회구성체]가 바로 그람시가 본격적으로 착수했던 개념이다. 이것은 그가, ‘구조’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 혹은 어떠한 유기적인 역사적 운동이 전체 사회구성체를 거쳐 곧바로 경제적 ‘기반’으로부터 윤리적-정치적 관계로 ‘이행’하는 것은 결코 환원주의적이거나 경제주의적이지 않은 분석 유형의 핵심이라고 말하면서 의미했던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것은 어떠한 사회구성체에서 상이한 사회적 실천들 사이의 중층결정이라는 복합적인 관계들에 대한 이해에 적절히 기반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현대의 군주」에서 ‘상황을 분석하는’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개괄하면서, 그람시는 바로 이것의 프로토콜을 추구했던 것이다. 세부적인 사항은 복잡하며 미묘한 점 모두를 여기에 다 채워넣을 수는 없지만, 보다 ‘경제주의적’이거나 환원주의적인 접근방식과의 비교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개요만이라도 설명할 가치는 있다. 그는 이것을, “ -- 연구를 위한 일련의 실제적인 규칙이자, 유효한 현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보다 엄밀하고 보다 열정적인 정치적 통찰력을 자극하는 데 유용한 일단의 상세한 관찰로 이해되는 -- 과학과 정치 기예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여기에 특성상 전략적일 수밖에 없는 논의를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회 내의 근본적 구조 -- 객관적 관계들 -- 즉 ‘생산력 발전 정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발전의 전체 형태에서 가장 근본적인 한계와 조건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발전 노선에 유리할 수 있는 몇몇 주요 경향들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환원주의의 오류는 이러한 경향과 제약들을 전적으로 그[객관적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효과로 직접적으로 전환시키는 것, 다시 말해 양자택일적으로(alternatively) 그것을 추상화하여 ‘필연성의 철의 법칙’ 몇몇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실상, 그것들은 단지 역사적 세력들이 활동할 수 있는 지형을 규정한다는 --가능한 사항들의 지평을 한정짓는다는-- 의미에서만 구조화하고 결정한다. 그러나 최초심에서든(in the first instance) 최종심에서든 간에, 그것이 정치적?경제적 투쟁의 내용을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투쟁들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결정하거나 보증할 수는 더더욱 없다.

분석에서 다음으로 이전한 것은, 보다 ‘단속적이고(occasional), 직접적이며, 거의 우발적인 운동’으로부터 사회를 심층적으로 관류하고 상대적으로 장기지속될 수 있도록 정해져 있는(destined) ‘유기적’인 역사적 운동을 구분해 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람시는 우리에게, ‘위기’가 유기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수십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정적인 현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속적인 운동과 논쟁, 경합 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장기적인 헤게모니에 유리한 조건으로 위기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고자 하는 서로 다른 양측의 시도를 의미한다. 그람시는 ‘실제로는 단지 간접적으로만 작용할 뿐인 원인들을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라고 설명한다거나, 오직 직접적인 원인들만이 유효한 원인이라고 단언하는 것’에 이론적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것은 과도한 경제주의를, 두 번째 것은 과도한 이념주의를 낳는다. (그람시는 특히 패배기에 이 두 극단 사이에서의 치명적인 동요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 둘은 현실에서는 전도된 형식으로 서로를 반영한다.) 그람시는 몇몇 필연성의 법칙이 불가피하게 경제적 원인들을 직접적인 정치적 효과로 전환시킬 어떠한 ‘법칙적인’ 보증 같은 것이 있기는커녕, 그 기저에 놓여 있는 원인들이 새로운 현실이 되는 경우에만 분석이 성공할 수 있으며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실증주의적 확실성을 조건부 시제로 대체한 것은 결정적이다.

다음으로 그람시는 위기들의 길이와 복합성은 기계적으로 예측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시기를 거쳐 발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상대적 ‘안정’의 시기와 급속하고 급격한(convulsive) 변화의 시기 사이에서 움직인다. 결과적으로 시기구분은 분석에서 핵심적인 측면이다. 그것은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초기의 관심과 유사하다. “한편으로는 구조와 상부구조 사이의, 다른 한편으로는 유기적 운동의 발전과 구조에서의 국면적 운동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주기(frequency)가 계속 변하는 이러한 ‘간격들'에 대한 연구이다." 그람시에게 있어, 이러한 ‘연구’와 관련해 기계적이거나 [자명한] 처방전 같은(prescriptive)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동적인 역사 분석틀의 토대를 확립하고 나서, 그람시는 정치적?사회적 투쟁과 발전의 실질적 지형을 이루는 역사적 세력들의 운동 -- ‘세력관계’ -- 에 대한 분석으로 전환한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저 쪽에 대해 이 쪽이 절대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세력이 또다른 세력에게 완전히 흡수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한다. 오히려 분석은 관계적인(relational) 문제이다. 즉 그것은 ‘불안정한 균형’ 내지 ‘불안정한 평형 상태를 형성하고 대체해 가는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사고를 활용하여 관계의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내지 저러한 경향에 유리한 혹은 불리한 세력 관계’이다[강조는 필자]. ‘관계’와 ‘불안정한 균형’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어떠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패배한 사회 세력이 그로 인해 투쟁의 지형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상황에서의 투쟁이 중지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상기시켜준다. 예를 들면,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승리 혹은 부르주아지의 기획으로의 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흡수라는 사고는 -- 이 둘이 학문적인 논평에서 자주 혼동되긴 하지만 -- 그람시의 헤게모니 규정과 전혀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항상 세력관계의 경향적인(tendential) 균형이다.

그러고 나서 그람시는 ‘세력관계’를 상이한 계기들로 분화시킨다. 그는 이 계기들 사이에서의 어떠한 필연적으로 목적론적인 진화도 가정하지 않는다. 첫 번째 것은 상이한 사회 세력들을 배치하고 위치짓는 객관적 조건들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 것은 정치적 계기 -- ‘동질성 정도, 자기 의식 및 다양한 사회 계급들에 의해 달성된 조직화' -- 와 관련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계급 통일성’이 결코 선험적으로(a priori) 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급들은 특정한 공통적 존재조건을 공유하고 있지만, 또한 이해의 충돌에 의해 나누어지며(crosscut) 실제로 이러한 역사적 형성과정을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분절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계급들의 ‘통일성’은 필연적으로 복합적이며, 특정한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결과로서 산출 -- 건설, 창조 --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이거나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 근본 맑스주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자동적인 계급 개념에 대한 급진적인 역사화와 결부시켜, 그람시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에 대한 맑스의 구분을 훨씬 더 정교화한다. 그는 계급 의식, 조직, 통일성이 -- 정상적인(right) 조건 하에서 -- 발전하는 상이한 단계에 주목한다. [우선] 전문적이거나 직업적인 집단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공통적 이해관계를 인식하지만 보다 넓은 범위의 계급적 연대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경제적?조합주의적’ 단계가 있다. 그 다음은 이해관계에 대한 계급적 연대가 발전하지만 단지 경제적인 영역에서만 그러할 뿐인 ‘계급 조합주의적(class corporate)’ 계기이다. 마지막으로 ‘헤게모니’의 계기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연대의 조합주의적 한계를 넘어 다른 종속집단들의 이해를 포함하고 ‘자기 자신을 사회 전체에 선전’하기 시작하여 경제적?정치적인 통일 뿐만 아니라 지적?도덕적 통일을 이루며, ‘[조합주의적이 아닌 ‘보편적’ 지평 위에서] 수행되는 투쟁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을 제기하여 결국 한 기본적 사회 집단의 일련의 종속집단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창출한다.’ 특수한 역사적 블록의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것은, 지배집단의 이해를 여타 그룹들의 전반적 이해 및 전체 국가의 삶과 조절하는 바로 이러한 과정이다.19) 그가 ‘집합의지’라고 부른 것의 형성은, 오로지 그와 같은 ‘국민적?민중적’ 통일의 계기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람시는 우리에게, 이러한 특별한 정도의 유기적 통일성조차 특정한 투쟁의 결과를 보증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군사적이고 정치-군사적인 세력관계에서의 결정적인 전술적 문제의 결과에 따라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는 “군사적 측면에 비해 정치가 우위에 있으며 오로지 정치만이 기동(manoeuvre)과 행동을 위한 가능성을 창출한다"고 주장한다.20)

이 정식과 관련해 세 가지 점이 특별히 지적될 필요가 있다. 우선 ‘헤게모니’는 한 사회의 삶에서 매우 특수하고, 역사적으로 독특하며, 일시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한 사회가 스스로에게 매우 새로운 역사적 의제를 설정하게 할 수 있는 이 정도의 통일성을, 특정한 조직의 지도나 사회 세력의 배치 하에서 달성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와 같은 ‘안정’의 시기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그와 관련하여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전혀 없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건설되고 적극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위기는 그것이 해체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두 번째로, 우리는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의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투쟁 전선(예를 들면, 경제)에서 단독으로 건설되거나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동시에 일련의 상이한 ‘입장들’ 전체에 대한 지배 정도를 나타낸다. 지배는 단순히 강제로 부과되거나 그 본성상 지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상당한 정도의 대중적 동의를 획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인 지지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를 가로지르는,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도덕적 권위가 갖추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회의 도처에 걸친 지적,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집합의지의 ‘선전’을 한동안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권위’ 및 ‘지도’가 행해지는 장소의 범위와 다양성이다. 세 번째로, 헤게모니 시기에 ‘지도’하는 것은 이제 ‘지배계급’이라는 전통적인 용어가 아니라 역사적 블록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분석의 결정 수준으로 ‘계급’을 중요하게 거론하고 있지만, 계급 전체를 통일된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단계로 직접적으로 전환시키지는 않는다. 역사적 블록에서 ‘지도하는 요소’는 경제적 지배 계급에서 단지 하나의 분파 -- 예를 들면 산업 자본이라기 보다는 금융 자본, 국제 자본이라기 보다는 국내 자본 -- 일 수도 있다. ‘블록’ 내에는, 특정한 양보와 타협에 의해 획득되어 사회적 배치의 일부를 이루지만 부차적인 역할만을 할 뿐인 종속적인 피지배계급이 그[지도하는 요소]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부문들을 ‘획득하는 것’은 특수한 지도 아래 역사적 블록을 접합시키는(cement) ‘광범위하고, 보편화하는 동맹’을 만들어냄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헤게모니 조직은 그만의 특수한 사회적 구성과 배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는 느슨하고 부정확하게 ‘지배계급’이라고 종종 언급되던 것을 개념화하는 매우 상이한 방식이다.

물론 그람시가 헤게모니라는 용어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 레닌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에 대해 확립할 필요가 있던 지도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분석적인 의미로 이를 이미 사용했다. 이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맑스가 ??자본??에서 자신의 패러다임의 사례(즉 영국의 사례)로 제시했던 자본주의로의 ‘고전적’ 발전 경로를 거치지 않았던, 발전도상의(developing) 사회들에 대한 연구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핵심 문제들 중의 하나는 국가적?경제적 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상이한 사회 계급들 간의 균형과 관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산업 발전으로 특징지워지는 사회들에서는 협소하게 정의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농민 계급이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투쟁에서 지도하는 요소가 되고 몇몇 사례들(중국이 두드러진 예이지만 쿠바와 베트남 또한 중요한 사례들이다)에서는 심지어 지도적인 혁명적 계급이 되는 정도이다. 그람시가 헤게모니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920년 「남부문제에 대한 노트」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로지 “대다수의 노동 대중을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에 맞서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동맹 체계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는" 한에서만 ‘지도하는’ 계급이 될 수 있는데 “이는 광범한 농민 대중의 동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는 정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는 이미 이론적으로 복합적이고 풍부한 정식이 되었다. 이는 유기적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인 것으로 되는 실질적인 사회적 혹은 정치적 세력은 단일하고 동질적인 계급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회적 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두 번째로, 이는 통일의 기반은 경제적 생산양식에서의 위치에 따라 부여되는 자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동맹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세 번째로, 그러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세력은 사회의 근본적인 계급 분할에서 비롯되긴 하지만, 정치투쟁의 실제 형태들은 더 폭넓은 사회적 성격 -- 단순히 ‘계급 대 계급’ 노선을 따라 사회를 분할하기 보다는 오히려 가장 광범한 적대 전선(‘대다수의 노동대중’)을 따라 사회를 양극화하는 -- 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모든 민중적 계급들을 한 편으로 하고, 국가 주위에 모인 자본과 권력 블록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들을 다른 편으로 하는 정치투쟁 식으로 말이다. 실상 현대 세계의 민족적(national)이고 종족적인(ethnic) 투쟁들에서, 투쟁의 실제적인 영역은 종종 바로 이러한 보다 복합적이고 구별되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양극화된다. 난점은 그것이 종종 실질적인 사회적 구성의 복합성을, 명백하게 단순하고 동질적인 두 계급 블록들 간의 투쟁이라는 보다 단순하고 기술적인 용어들로 환원시키는 용어들로 이론적으로 묘사되는 일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람시의 재개념화는 민족적 투쟁을 위해 농민과 같은 계급을,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동의를 얻는 것’에 기반하여 획득할 수 있는 조건과 같은 중요한 전략적 문제들을 굳건히 의제로 삼고 있다.

후기 저작을 집필하는 동안, 그람시는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 ‘계급 동맹’으로 개념화하는 방식을 넘어서 헤게모니 개념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켰다. 우선, ‘헤게모니’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어, 모든 계급들의 전략에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만의 전략이 아니라 모든 지도적인 역사적 블록의 형성에 분석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그 개념을 보다 일반적인 분석적 개념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의 적용가능성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과 대립되는 백인 지배계급의 이해와 백인노동자들의 이해 간의 동맹의 형성을 통해 국가가 유지되는 방식, 또는 남아프리카 정치에서 농촌과 공업의 흑인 대중에 맞서는 동맹을 형성하려는 전략 하에 특정한 종속 계급들(subaltern classes) 및 집단들 -- 예를 들면 유색인층 혹은 ‘부족적인’ 흑인들 -- 의 ‘동의를 획득하려는’ 시도의 중요성, 또는 발전도상에 있는 포스트 식민 사회들에서 민족 독립을 위한 모든 탈식민화 투쟁들의 ‘혼합적인’ 계급적 특성: 이 개념[헤게모니]의 발전은 이것들 및 다른 많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들을 상당히 명확하게 할 수 있다.

두 번째 발전은 그람시가 ‘지배하는’ 계급과 ‘지도하는’ 계급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지배와 강제는 한 사회에 대한 특정한 계급의 우위를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동의를 획득하기 보다는 강제적 수단에 지속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국가를 변형하거나 사회를 혁신하기 위한 역사적 프로젝트에 사회의 다른 부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낼 수 없다. 다른 한 편으로 ‘지도’ 역시 ‘강제적’ 측면을 지닌다. 하지만 그것은 동의를 획득하고 종속 계급의 이해를 고려하며 스스로를 대중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의해 ‘지도된다’. 그람시에게 강제/동의의 순수한 사례는 결코 없으며, 단지 두 차원의 상이한 결합만이 있을 뿐이다. 헤게모니는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영역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도덕적, 윤리적, 지적 지도라는 중요한 영역을 포함한다. 몇몇의 장기적인 역사적 ‘프로젝트’--예를 들면 사회를 근대화하는 것, 사회의 전체적인 성취 수준을 고양시키거나 국가 정치의 기반을 변형시키는 것--가 역사적 의제로 효율적으로 배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러한 조건하에서만이다. 다수의 구별, 예를 들면 지배/지도, 강제/동의, 경제적-조합주의적/도덕적-지적 간의 구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통해 그람시에게서 ‘헤게모니’ 개념이 확장되는 것을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확장의 기반을 강화하는 것은 그람시의 근본적인 역사적 테제들 중의 하나에 기반한 또다른 구분이다. 이는 국가/시민사회의 구분이다.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논문에서 그람시는 몇 가지 방식으로 이 구분을 정교화했다. 우선 그는 투쟁의 두 유형 사이의 구분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기동전’인데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투쟁의 하나의 전선과 하나의 계기로 집중되며, 일단 만들어지면 새로운 세력이 ‘짓쳐들어가서 결정적인(전략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적의 방어’에서 단 하나의 전략적인 틈새가 있다. 두 번째로 ‘진지전’이 있는데 이는 상이한 그리고 변화하는 많은 투쟁 전선을 가로질러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여기에는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그람시가 말하듯이 ‘전광석화처럼(in a flash)’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거의 없다.21) 진지전에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적의 ‘전진 참호들’이 아니라 (군사적 은유를 계속 사용하자면) ‘전장의 군대 후방에 위치한 영토 전체의 조직적?산업적 체계’, 즉 시민사회의 구조와 제도들을 포함하는 사회의 전체 구조이다. 그람시는 ‘1917년’을 성공적인 ‘기동전’ 전략의 아마도 최후의 사례로 간주했다. 그것[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정치 기예와 정치과학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나타냈다.

이는 ‘동구’와 ‘서구’ 간의 두 번째 구분과 연결되었다. 그람시에게 이것들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구분, 러시아 혁명 모델과 산업화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닌 ‘서구’의 훨씬 더 어려운 지형에 적합한 정치투쟁 형태 사이의 구분을 위한 은유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그람시는 많은 맑스주의 학자들이 오랫동안 회피해 온, 러시아에서 1917년[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부합되거나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조건들의 ‘서구’에서의 패배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간의 근본적인 차이들( 및 고전적 유형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서구’에서의 결과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들이 혁명과 정치의 ‘겨울 궁전(Winter Palace)’ 모델에 지속적으로 강박되어 왔다는 점에서 이는 중심적인 문제이다. 그람시는 따라서 오랫동안 지체된 근대화, 팽창된 국가기구와 관료제, 상대적으로 미발전된 시민사회 및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조건을 지녔던 혁명 이전의 러시아와, 다른 한편으로 대중민주주의적인 형식들과 복잡한 시민사회를 지니고 있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 대중의 동의를 국가에 대한 보다 폭넓은 합의 기반으로 공고화한 ‘서구’ 사이의 중요한 분석적 구분을 이끌어내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었고 시민사회는 아직 원시적이고 무정형한 것이었지만,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국가가 동요할 때에는 당장에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국가는 단지 외곽에 둘러쳐진 외호(外濠)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토루(土壘)의 강력한 체계가 버티고 있었다. 물론 요새와 토루의 수는 나라마다 다를 것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나라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요구되었던 것이다.22)


그람시는 역사적 특수성의 차이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적 이행을 묘사하고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그가 ‘서구’의 조건이 점차적으로 나라마다 차례차례 근대 정치 영역의 특성이 되어감에 따라 ‘진지전’이 점점 더 ‘기동전’을 대체하고 있다고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서구’는 순전히 지리적인 동일성이기를 멈추고,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형식들 및 그들 사이의 새롭고 보다 복합적인 관계에 의해 창출된 정치의 새로운 영역을 나타내게 된다.) “시민사회가 직접적인 경제적 요소의 파국적인 ‘침입'에 저항할 수 있는....매우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이러한 보다 ‘선진적인’ 사회들에서 “....시민사회의 상부구조는 근대적 전쟁의 참호체계와 같다". 상이한 유형의 정치투쟁은 이러한 새로운 지형에 적합하다. “기동전은 전략적 기능보다는 전술적 기능을 지닌 것으로 축소[되고]" 전쟁은 ‘정면공격’에서, 일단 승리하면 ‘명백하게 결정적’이기 때문에 ‘헤게모니의 전례 없는 집중’을 필요로 하고 “집중되어 있고 어려우며 이례적인 인내와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진지전"으로 이행한다.23)

그람시는 이러한 ‘하나의 정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의 기반을 역사적으로 설정한다. 이는 ‘서구’에서 1870년 이후 발생하는데 ‘유럽의 식민지로의 팽창’, 현대 대중민주주의의 출현, 국가의 역할과 조직의 복잡화 및 ‘시민적 헤게모니’의 구조와 과정에서 전례 없는 정교화와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그람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적 적대의 다양화, 권력의 ‘분산’인데 이는 오로지 국가의 강제적 수단을 통해서만 헤게모니가 유지되기 보다는 헤게모니가 시민사회의 관계들과 제도들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들에서 일어난다. 그러한 사회들에서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단체, 관계, 제도들 -- 학교 교육, 가족, 교회와 종교 생활, 문화 조직들, 이른바 사적 관계들, 성, 성적?종족적(ethnic) 정체성 등 -- 은 실제로 “정치 기예에서....진지전에서 전선의 ‘참호'와 영구적인 요새가 되며, 예전에 전쟁의 ‘전부'였던 운동의 요소를 단지 ‘부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24)

이 모든 것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보다 심층적인 이론적 재규정의 노고이다. 실제로 그람시는 몇몇 맑스주의 판형들의 특징인 국가에 대한 제한적 규정, 즉 지배계급의 강제적 도구로 본질적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오로지 일거에 ‘분쇄함으로써만’ 변형시킬 수 있는 배타적인 계급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파악하는 규정을 점차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는 근대 시민사회 형성의 복합성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 형성의 복합성 역시 [시민사회의 그것과] 병행하여 발전한다는 것을 점차 강조하게 된다. 국가는 더 이상 단순히 행정적이고 강제적인 기구로서만 인식되지 않는다 -- 그것은 또한 ‘교육적이고 형성적이다(formative)’. 국가는 전체 사회에 대한 헤게모니가 궁극적으로 행사되는 지점이다(하지만 헤게모니가 건설되는 유일한 장소는 아니다). 국가는 응축 지점인데, 이는 강제적 지배의 모든 형식들이 필연적으로 그 기구들에서 바깥으로 발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순적인 구조 내에서, 다양한 상이한 관계들과 실천들을 제한적인 ‘지배체계’로 응축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가는 ‘가장 광범한 대중의 문명과 도덕성을 경제적 생산기구의 영속적인 발전의 필요에’ 순응시키거나(즉 조화시키거나) 혹은 ‘적응시키기’ 위한 장소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국가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대다수의 대중을 생산력 발전을 위한 요구(needs), 따라서 지배계급의 이해에 조응하는 특정한 문화적?도덕적 수준(내지 유형)으로 고양시키는 만큼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25) 여기서 그람시가 권력과 정치의 새로운 차원들, 적대와 투쟁의 새로운 영역들 -- 윤리적, 문화적, 도덕적 -- 을 전진 배치하는 방식을 주목하라. 또한 그가 궁극적으로 ‘생산력 발전을 위한 요구’, ‘지배계급의 이해’ 같은, 보다 ‘전통적인’ 문제들로 돌아오는 방식, 하지만 직접적이거나 환원적이지 않은 방식을 주목하라. 우리는 일련의 필수적인 전치(轉置)와 ‘중계(relays)’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즉 ‘구조로부터 복합적인 상부구조 영역으로의’ 불가역적인 ‘이행’을 경유해야만 그런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

그람시가 국가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개념을 정교화하는 것은 바로 이 틀 내에서이다. 근대국가는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지도력을 발휘한다--그것은 ‘계획하고, 강제하고, 추동하고, 호소하며, 처벌한다’. 국가는, 국가를 지배하는 사회세력들의 블록이 그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동의를 지도와 권위에 의해 획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는 헤게모니 건설에서 중추적인(pivotal)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해방식에서 국가는 포획되거나 전복되거나 혹은 일거에 ‘분쇄되어야’ 하는 어떤 것(a thing)이 아니라 상이한 사회적 경쟁의 무대이기 때문에 수많은 상이한 전략들과 투쟁들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 현대 사회들의 복합적인 조직(formation)이 된다.

이제 그람시의 사고에서의 이러한 구분과 발전들 모두가 어떻게 ‘헤게모니’라는 기본적인 개념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풍부하게 만드는지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에 대한 그람시의 실제 정식은 그의 저작 여기저기에서 변화하며 몇 가지 혼란을 야기했다.26)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사고의 근저에 놓여 있는 요점(thrust)에는 문제가 거의 없다. 이것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현대 사회들에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상호관계의 점증하는 복합성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들은 몇 가지 상이한 전선에서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다면적인 유형의 정치전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복합적인 ‘체계’를 형성한다. 그와 같은 국가 개념의 활용은 예를 들면 이른바 ‘포스트 식민 국가’에 관한 문헌의 많은 부분을 총체적으로 변형시키게 되는데, 그러한 문헌들은 종종 국가권력에 대한 단순하고 지배적이거나(dominative) 혹은 도구적인 모델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람시의 ‘동구’/‘서구’ 구분 또한 지나치게 축어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수많은 이른바 ‘발전도상의’ 사회들은 이미 복합적인 민주적 정치 체제를 지니고 있다(즉 그람시의 용어에 의하면 그들은 ‘서구’에 속한다). 다른 측면에서 국가는, 산업화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의 경우 시민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보다 광범하고 교육적이며 ‘지도적인’ 역할과 기능을 스스로 흡수했다. 따라서 핵심은 그람시의 구분을 축어적으로 내지는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변화가 야기한, 현대 세계에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변화하는 복합성 및 전략적인 정치투쟁의 주요 특성에서의 결정적인 변화 -- 특히 투쟁의 필수적인 무대로서 국가 뿐 아니라 시민사회를 포괄하게 된 -- 를 해명하는 데 그의 통찰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 (정의를 다소 확장하면서), 국가에 대한 확장된 개념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혹은 ‘강제의 철갑으로 보호되는 헤게모니’를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7) 그는 이러한 구분들이 다른 사회들에서 어떻게 차별적으로 접합되는지에 -- 예를 들면 파시스트 국가들에서 붕괴된 영역과 대조적인 것으로서 자유주의적인 의회민주주의 국가들의 특징인 ‘삼권 분립’ 내에서 -- 특히 주목한다. 또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기능, 즉 ‘대다수의 대중을 특정한 문화적?도덕적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기능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학교(“적극적인 교육적 기능”)나 법원(“억압적이고 소극적인 교육적 기능”)과 같은 중요한 제도들의 교육적 기능’을 지적한다. 이러한 강조들은 일련의 새로운 제도들과 투쟁의 무대들을 국가와 정치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화로 옮겨온다. 이는 그것들을 투쟁의 특수하고 전략적인 중심으로 구성한다. 그 취지는 정치의 다양한 전선들을 증폭시키고 확산시키며, 상이한 종류의 사회적 적대를 구별하는 것이다. 상이한 투쟁 전선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적대의 다양한 장소들이며 현대 정치의 대상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 때 그것은 ‘진지전’의 형태로 이해된다. 구별되는 투쟁 유형들, 예를 들면 학교교육, 문화 정치 내지 성 정치, 가족과 같은 시민사회의 제도들, 전통적인 사회조직들, 민족적?문화적 제도들 등이 작업장 주변으로 집중되는 산업투쟁과, 노동조합과 봉기적이거나 의회적인 정치 형식들 사이의 단순한 선택에 모두 종속되며 그것으로 환원되는 전통적 강조들은 여기에서 체계적으로 도전받고 결정적으로 전복된다. 정치 개념 바로 그 자체에 대한 충격은 [비유하자면] 거의 감전시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그람시 저작의 다른 많은 흥미로운 토픽과 주제들 중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 문화, 지식인의 역할 및 그가 ‘국민적-민중적’이라고 부른 것의 성격에 대해 더 진전될 가능성이 있는 작업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람시는 처음에는 “문화적 흐름(movement)이자 ‘종교', ‘신념'이 되어 버린, 다시 말해 내재적인 이론적 ‘전제'를 깔고 실천적 활동의 형태나 의지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어떤 세계관 내지 어떤 철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상당히 전통적인 규정처럼 보이는 것을 채택한다. 그는 “사람들은....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예술에서, 법에서, 경제 활동에서 그리고 모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삶의 표현 속에서 암암리에 드러나는 세계관이라는 최상의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조건하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이 말 다음에는, 그 사회적 기능에 관하여 이데올로기가 제기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정식화하기 위한 시도가 따라나온다. “문제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화되고 통합되는 사회적 블록 전체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을 보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28) 이러한 규정은 겉보기와 달리 단순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의 중심에 놓여 있는 철학적 중핵 내지 전제와, 문화적 흐름, 정치적 경향, 신념 혹은 종교의 형태로 사회의 광범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실천적이고 대중적인 의식 형태로 그 개념을 필수적으로 정교화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오로지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핵심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언제나 유기적인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는데, 이는 실천적이고 일상적인 상식에 영향을 끼치며 “인간 대중을 조직하고, 사람들이 활동하며 자신의 지위, 투쟁 등에 대한 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 지형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이다.

이것이 그람시가 ‘철학’과 ‘상식’ 사이를 중요하게 구분하는 기본원리이다.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구별되는 ‘층위’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일관성은 전문적인 철학적 정교화에 종종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일관성이 그 이데올로기의 유기적이고 역사적인 효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철학적 조류들이 대중의 실천적이고 일상적인 의식이나 통속적인 사고에 들어가서 그것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킬 때만,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후자는 그가 ‘상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상식’은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개 “따로따로 떨어져 있고 삽화적이며(episodic)", 파편적이고 모순적이다. 보다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들의 흔적과 ‘계층화된 침전물들’이 어떠한 명확한 목록을 남기지도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상식으로 침잠해왔다. 상식은 ‘전통적인 지혜 혹은 시대의 진실’로서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철저하게 역사의 산물이자 ‘역사적 과정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상식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인민 대중의 실천적 의식이 실제로 형성되는, 개념과 범주들의 지형이기 때문이다. 상식은 이미 형성되어 있으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형이며, 보다 일관성 있는 이데올로기와 철학들이 승리(mastery)를 위해 경합해야 하는 장소이다. 즉 새로운 세계관이 대중의 세계관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유효하고자 한다면 그것[새로운 세계관]이 고려하고 경합하며 변형시켜야 할 지반이다.


모든 철학적 흐름은 ‘상식’이라는 침전물을 남긴다. 상식은 그것들의 역사적 효력을 기록한 것이다. 상식은 고정되어 있고 비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들어온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견해들로 풍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상식’은 미래의 민속, 즉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민중의 지식의 비교적 고정된 단계를 창조한다.29)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취급하는 방식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대중적 사고의 구조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다. 따라서 그는, 그/그녀가 생각하는 한 모든 사람은 철학자이거나 지식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고, 행동, 언어는 성찰적이고, 도덕적 행동에 대한 의식적 방향을 포함하며 따라서 특정한 세계관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지식인’의 전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의 계급은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과 속박의 본성 및 착취의 형식들에 대해 자생적이고 생생하지만 일관성이 있거나 철학적으로 정교화되지는 않은, 본능적인 이해를 언제나 지니게 될 것이다. 그람시는 후자를 ‘양식(good sense)’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 사고의 구조 -- ‘상식’ -- 를 보다 일관성 있는 정치이론 내지 철학적 흐름으로 혁신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교육과 문화 정치라는 그 이상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중적 사고의 고양'은 집합의지가 건설되는 과정의 일부이며, -- 어떠한 헤게모니 정치 전략에서도 본질적 부분인 -- 광범한 지적 조직화 작업을 필요로 한다. -- 그람시의 주장에 의하면 -- 대중의 믿음, 인민의 문화는 자체의 논리대로 움직이도록(look after themselves) 내버려 둘 수 있는 투쟁 영역이 아니다. 그것들은 “물질적 힘 그 자체이다."30)

따라서 헤게모니 형성에 본질적인 지적?윤리적 통일성을 초래하거나 이룩하는 것은 광범한 문화적?이데올로기적 투쟁을 필요로 하는데, 이 투쟁은 ‘정치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 및 대립노선들과의 투쟁을 통하여 우선은 윤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야 본연의(proper) 정치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형태를 취한다.31) 이는 우리가 민족적이고 반식민주의적이며 반인종주의적 운동과 동일시하는 사회적 투쟁들의 유형과 매우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그람시는 결코 단순하게 ‘진보적인’ 접근법을 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그는 이탈리아의 경우 대중적인 집합의지 형성의 기반을 용이하게 제공할 수 있는 진정한 민중적-민족적 문화가 부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문화와 대중문학, 종교에 대한 그의 저작의 많은 부분은 그와 같은 발전의 기반을 제공해 줄 수 있었던 이탈리아인의 삶과 사회의 잠재적 지형과 경향들을 탐색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이탈리아의 경우 대중적인 카톨릭이 상당한 정도로, 스스로를 진정으로 ‘대중적 세력’으로 만들 수 있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이는 민중 계급들의 전통적 개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 카톨릭에 독특한 중요성을 부여하게 만들었음을 상세히 입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이 부분적으로, 사상의 조직화 -- 특히 철학적 사고 혹은 교의와 대중의 삶 혹은 상식의 관계를 보증하는 -- 에 대한 카톨릭의 철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사상은 유동적인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자생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정해진 방향 없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일체의 관념을 거부한다. 시민 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조직을 필요로 한다. 종교는 그것만의 특수한 발전 장소, 특수한 변형 과정, 특수한 투쟁의 실천들을 지닌다. 그는 “상식과 철학의 상위 수준 사이의 관계는 ‘정치'에 의해 보장된다"고 단언한다.32) 물론 이 과정의 주요 매개자들은 문화적?교육적?종교적 제도들, 가족과 자발적인 단체들이지만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조직의 중심인 정치정당 또한 마찬가지다. 주요 매개자들은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순환과 발전에 대해 전문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지식인들인데, 이들은 스스로를 기존의 사회적?지적 세력 배치와 일치시키거나(‘전통적’ 지식인) 혹은 스스로를 부상하는 민중 세력과 일치시키면서 새로운 사상 조류의 정교화를 추구한다(‘유기적’ 지식인).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경우 스스로를 고전적이고 학문적이거나 혹은 교권주의적인 기획들에 일치시킨 전통적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새롭게 출현하는 지식인 계층은 상대적으로 취약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생각은 이데올로기의 주체를 개념화하는 새롭고 급진적인 방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상당한 정도로 현대적인 이론화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는 미리 주어진 통일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체, 예를 들면 ‘올바른’ 혁명적 사상을 지닌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이미 보증되어 있는 현행의 반인종주의적 의식을 지닌 흑인과 같은 관념은 어떠한 것이라도 총체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사고와 사상의 이른바 ‘주체’를 구성하는 자아 혹은 정체성의 ‘복수성(plurality)’을 인지한다. 그는 의식의 이러한 다면적인 성격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현상이며 ‘자아(the self)’와, 한 사회의 문화적 지형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격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석기 시대의 요소들과 한층 진전된 과학의 원리들, 과거의 모든 역사 단계로부터 전수된 편견들, ...... 그리고 미래의 철학에 대한 직관들”을 포함하고 있다.33) 그람시는 순간적이긴 하지만 행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세계관과, 말로써(verbally) 혹은 사고 속에서 보증되는 그러한 개념들 간에 나타나는 의식에서의 모순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파편적이며 모순적인 의식 개념은, 맑스주의자들의 이론 작업에서 보다 전통적이지만 자기기만에 의존하는 설명이자 그가 부적합한 것으로 적절히 간주한 ‘허위의식’이라는 설명보다 훨씬 더 진전된 것이다. 그토록 많은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이 분야에 대한 이론화의 중심에 놓여 있던, ‘미리 주어진’ 그리고 통일적인 이데올로기적 계급 주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대해 수행한 그람시의 내재적인 공박은, 내가 앞에서 거론했던 국가[개념]에 대한 그의 효과적인 해체의 중요성과 부합한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람시는 이데올로기 영역의 필연적인 복합성과 상호담론적인(inter-discursive) 특성을 인정한다.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단일한, 그리고 통일적이며 응집력 있는 ‘지배이데올로기’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애버크롬비(Abercrombie) 등이 ‘지배이데올로기 테제’라고 부른 것34)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개념은 한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다른 집단의 그것에 총체적으로 병합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범주의 사상가들에 그람시를 포함시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그의 사상을] 심하게 오도하는 것이다. “수많은 철학적 사상 체계와 조류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분석의 대상은 만물과 만인이 흡수되어 버리는 ‘지배적인 사상’의 단일한 흐름이라기 보다는, 차별적인 지형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상이한 담론 조류들 및 그것들이 결합하고 분열(break)하는 지점 그리고 그들간의 권력관계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복합체이자 전체, 즉 담론 구성체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조류들이 어떻게 확산되며, 그 과정에서 왜 특정한 경향을 따라 특정한 방향으로 분열하는가”이다.

나는 그람시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영역이 항상 상이한 사회적?정치적 위치에 접합되더라도 그 형태와 구조가 사회의 계급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거나, 그에 부합되거나 혹은 ‘모사하는(echo)’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러한 경향의 주장에서 명확하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경제적 내용이나 역할로 환원될 수도 없다. 그는 사상은 “형성, 발산, 보급, 설득의 중심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상은 각 개인의 두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특성상 심리학적이거나 도덕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인식론적이다.’ 그것은 시민사회와 국가의 제도들 내에서 물질성을 가지고 유지되고 변형된다.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완전하며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계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활동을 혁신하고 비판하는 것’에 의해 변형되거나 변화된다. 그람시는 예를 들면 그가 낡은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 사고양식에 의해 점차적으로 대체되고 내적으로 개정되며 변형되는지를 기술할 때, 다양한 강조점을 지니며 상호담론적인 이데올로기 영역의 특성을 명확하게 인정한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복합체에 대한 비판이다.....이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요소들이 지니고 있던 상대적 중요성을 차별화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이전에 이차적이고 종속적이었던 것이....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이론적 복합체의 중핵이 된다. 종속적인 요소들이 사회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후부터, 낡은 집합의지는 모순적 요소들로 분해될 것이다.35)


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실제적인 과정을 완전히 독창적이고 생산적으로 인지하는 방식이다. 이는 또한 문화를, 모든 ‘새로운’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조류들이 작업하며 스스로를 그 위에 조건지워야 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형으로 이해한다. 그는 그 지형의 주어진 그리고 결정적인 특성과, 상이한 담론들의 요소들 간의 그리고 사회적 세력과 사상 간의 낡은 제휴의 해체와 새로운 제휴의 형성에 의한 파괴와 건설 과정의 복합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대체나 부과의 측면에서 보다는 사상의 접합과 탈구(dis-articulation)의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제 이러한 그람시의 전망이 인종주의 및 그와 관련되는 사회 현상들에 대한 분석에서 기존의 이론들 및 패러다임들 중 일부를 변형하고 개정하는 데 잠재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식의 일단을 간략히 서술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특정한 사고를 직접적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오히려 이는 독특한 이론적 조망을, 그 영역을 규정하고 있는 미발달된 이론적?분석적 문제들에 집중하는 문제이다.

먼저 나는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강조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분명히 인종주의에는 어떠한 일반적 특성들이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활성화되는 상황과 환경의 역사적 특수성에 의해 그러한 일반적 특성들이 수정되고 변형되는 방식이다. 인종주의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화된 추상수준(즉 인종주의 일반이 아니라 인종주의들)에서 [분석 수준을] 작동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제한적인 경우(즉 영국)에서조차 나는 제국주의가 ‘성가를 높이던’ 시대의 영국의 인종주의와, 식민지라는 배경 하에서가 아니라 국내 경제 내에서 토착노동력과 축적체제의 일부로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 상대적으로 경제가 쇠퇴한 시기인 오늘날의 영국 사회구성체를 특징짓는 인종주의 간의 차이점들이 유사성보다 더 크며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종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철저히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실천이기 때문에 그 형태나 다른 구조 및 과정과의 관계에서, 혹은 그 효과에서 어느 곳에서라도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종종 우리를 잘못된 전망으로 이끄는 의례적인(gestural) 태도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균질화를 결정적으로 막는 데 그람시가 진정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두 번째로, 나는 이탈리아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그람시로 하여금 중요한 결정수준으로서 민족적(national) 특성들과 지역적 불균등성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게 만든 강조점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한 사회구성체의 모든 측면에 걸쳐 균등하게 영향을 주는 동질적인 ‘발전법칙’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 발전의 불균등한 속도와 방향에 의해 발생되는 긴장과 모순을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종주의와 인종주의적 실천 및 그 구조가 일부에서 자주 발생하지만 그 사회구성체의 모든 부문에서 그런 것은 아니며, 그 영향력은 [사회구성체에] 스며들지만 균등하게 진행되지는 않으며, 영향력의 바로 그 불균등성이 이러한 모순적이고 부문적인 적대를 심화시키고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세 번째로 나는 계급과 인종 간의 상호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비환원적인 접근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가장 복합적이고 언급하기 어려운 이론적 문제들 중 하나임이 입증되어왔으며, 극단적 입장의 하나 혹은 다른 하나를 채택하는 쪽으로 자주 귀결되어왔다. 하나는 근저에 놓여 있는 계급 관계를 ‘특권화하는데’, 이는 종족적으로(ethnically) 그리고 인종적으로 구별되는 모든 노동력이 자본 내의 동일한 착취 관계에 종속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의 근본적인 계급 구조를 희생시키고 민족적?인종적 범주의 중심성과 분할을 강조한다. 이 두 극단은 서로에 대한 정반대의 입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특권화된 징표로서 용인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둘 모두 접합의 단일하고 배타적인 결정 원리 -- 계급 혹은 인종 -- 를 산출할 필요를 느낀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이 둘은 서로에 대한 전도된 거울 이미지이다. 나는 그람시가 계급 문제에 대한 비환원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특수한 사회구성체로 철저히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에 대한 그의 이해와 함께, 인종-계급 문제에 대한 비환원주의적인 접근법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어떤 사회에서 우리가 계급 조직의 문화적으로 특수한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그람시의 관심에 의해 풍부해진다. 그는 일반적인 가치법칙이 자본주의 시대를 가로질러 노동력을 균질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구체적인 사회에서든 이러한 균질화가 존재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믿는 오류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그람시의 전체적인 접근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전통적인 형태의 일반법칙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전통적인 형태의 일반법칙이 우리로 하여금, 단지 일국적인 범주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지구적인 범주에서 작동하는 가치법칙이 --고전적 이론이 우리에게 믿게 한 것처럼-- 세계적이고 신기원적인 역사적 경향의 불가피한 일부로서 체계적으로 그러한 구분들을 침식하는 것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문화적으로 특수한 성격을 거쳐서 그리고 그로 인해 작동하는 방식을 무시하도록 조장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우리가 ‘유럽중심적인’ 자본주의 발전 모델에서 시작할 때마다(그리고 그 모델 내에서조차) 우리가 실제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본이 이러한 노동력의 특수한 성격을 유지시키고 [축적의] 기본 궤도에 적응시키며, 동력화하고(harness) 착취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체제를 만들어 가는 수많은 방식들이다. [노동력의] 성별화된 구성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민족적?인종적 구조화는 합리주의적으로 상상된, 자본주의 발전의 ‘전지구적’ 경향을 억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양식의 전지구적 팽창에서 이러한 구분들은 유지되어 왔으며, 실제로 계발되고 정제되어 왔다. 이는 파편화된 노동력의 상이한 부문들에 대해 차별화된 형태로 착취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왔다. 그런 맥락에서 그것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효과는 심원했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으로 상이하며 특수한 노동 형태의 문화적, 사회적, 민족적, 종족적 그리고 성별화된 구성이라는 이러한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본의 체제가 유사성과 동일성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차별과 차이를 통해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따라 훨씬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가 자본주의 양식 전반에 대한 이론가는 아니지만, 그는 우리에게 그 방향을 확정적으로 지적해 주고 있다.

더욱이 그의 분석은 상이한 생산양식들이 동일한 사회구성체 내에서 결합될 수 있는 방식 또한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결합은 지역적 특수성과 불균등성 뿐 아니라 자본의 사회 체제 내에서 이른바 ‘후진적인’ 부문들을 통합시키는 상이한 양식들을 만들어낸다(예를 들면 이탈리아 사회구성체 내에서 남부 이탈리아: 산업화된 유럽이라는 매우 선진적인 ‘북부’ 부문 내에서 ‘지중해 연안의’ 남부 유럽: 종속적 자본주의로의 발전도상에 있는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사회들에서 오지의 ‘농민’ 경제: 식민모국의(metropolitan)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내에서 ‘식민지적인’ 고립 지역(enclave):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열강(metropolitan powers)의 초기 자본주의 발전에서 필수적인 측면으로서 노예 사회들: 국내 노동시장 내에서 ‘이주’ 노동력: 이른바 복잡한(sophisticated) 자본주의 경제 내의 ‘반투스탄(Bantustans)’36) 등). 이론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특수하고 차별화된 ‘통합’ 형식들이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적으로 분절되는 사회적 특징들 및 그와 유사한 여타의 특징들의 출현과 시종일관 연관되어 있는 영속적인 방식이다.

네 번째는 ‘계급 주체’의 비동질적 성격이라는 문제이다. 노동계급들 혹은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인종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계급에 특권을 부여하는 접근들은 종종, 자본에 관한 한 착취 양식은 동일하기 때문에 어떠한 자본주의 착취양식에서든 ‘계급주체’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에 틀림없다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 내가 (위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제는 노동력의 상이한 부문들에 대한 착취양식의 작동이 ‘동일’하다는 의미를 제한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쨌든 조건부 과정, 상이한 ‘계기들’, ‘즉자계급’에서 ‘대자계급’으로의 혹은 사회 발전의 ‘경제적-조합주의적’ 계기에서 ‘헤게모니적’ 계기로의 이행의 우연적인 성격을 구별짓는 그람시의 접근은 통일성에 대한 그와 같은 단순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제삼는다. ‘헤게모니적’ 계기조차 이제는 단순한 통일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통일로 나아가는(결코 완전히 달성되지 않은) 과정으로서 개념화되며, 그 과정은 미리 주어진 정체성이 아니라 상이한 부문들간의 전략적 동맹에 기반하여 진행된다. 그 성격은,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실천들 사이에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이나 조응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에 기반하여 부여된다. 이는 ‘생산수단’의 소유 및 몰수와 관련해 대체로 유사한 착취 형태에 종속된 계급 내에서, 민족적?인종적 차이가 어떻게 일련의 경제적,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적대로 구성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보다 다원주의적인 계층화 모델과 규정으로부터 맑스주의적 계급 규정을 구별짓는 신비한 부적 같은 무언가를 제공해왔던 후자는, 계급들 내에 존재하는 상이한 부문들 및 분절화된 부분들 내의 그리고 그들간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역동성을 설명하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그 이론적 유용성보다 지금까지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다섯 번째로, 나는 경제적?정치적 차원과 이데올로기적 차원 사이에 미리 가정된 조응[관계]은 그람시의 모델에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그 점을] 명확히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비조응의 정치적 결과를 추출해 내고자 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인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대신 이상적으로 그리고 추상적으로 계급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도식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강제하는 이론적 효과를 지닌다. 정치 세력으로서 계급 및 여타의 관련 사회 세력들에 대한 분석과 정치 지형 자체에 대한 연구가 다소 자동적이고 도식적이며 잔여적인(residual) 활동이 되어온 것은 주로 구래의 조응 모델로 인해 발생한 결과였다. 물론 다른 결정 요소들에 대한 경제의 ‘우선성’에 더해 ‘조응’이 존재한다면, 전치(轉置)되고 종속적인 방식으로 ‘최종심에서’ 경제의 결정을 단지 반영할 뿐인 정치의 지형을 분석하는 데 왜 시간을 들이는가? 확실히 그람시는 그런 부류의 환원주의를 한 순간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단순하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복잡한 형성물을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치가 그것만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형식, 속도, 궤도를 지니며, 정치만의 독특한 개념으로 현실적이며 소급적인 그 효과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만의 권리로서(in their own right) 연구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람시는 이 분야를 이론적으로 차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핵심 개념들을 활용했는데 그 중에서 헤게모니, 역사적 블록, 넓은 의미에서 ‘정당’, 수동혁명, 변형주의, 전통적?유기적 지식인, 전략적 동맹과 같은 개념들은 매우 독특하고 독창적인 범주의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인종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거나 지배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정치학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이와같이 새롭게 정식화된 개념들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지는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여섯 번째로 국가에 관하여 유사한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다.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계급 투쟁과 관련하여, 국가는 시종일관 오로지 강제적이고, 지배적이며 음모적인 방식으로만 규정되어 왔다. 또다시 그람시는 이 세 가지 모두와 최종적으로 절연한다. 국가의 ‘교육적’ 기능, ‘이데올로기적’ 성격, 헤게모니 전략의 수립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그의 지배/지도 구분은 -- 최초의 정식에서는 조야했다고 할지라도 -- 인종주의적 실천과 관련된 국가에 대한 연구와 ‘포스트 식민 국가’와 관련된 현상에 대한 연구 모두를 변형시킬 수 있었다. -- 자신의 저작 안에서조차 동요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 국가/시민사회 구분에 대한 그람시의 정교한 활용은 매우 유연한 이론적 도구이며, 분석가들로 하여금 인종적으로 구조화된 사회 구성체들의 이른바 ‘시민사회’ 내의 제도와 과정들에 대해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주목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학교교육, 문화 조직들, 가족과 성 생활, 시민단체의 유형과 양식, 교회와 종교, 공동체의 혹은 조직적인 양식들(forms), 종족적으로 특수한 제도들 및 여타의 수많은 그러한 장소들은 상이한 사회들을 인종적으로 구조화된 형태로 만들고, 지탱하며 재생산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람시의 영향을 받은 어떠한 분석에서건, 이것들이 분석에서 피상적인 위치로 전락하는 경우는 사라질 것이다.

일곱 번째로, 동일한 사고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람시의 분석이 언제나 사회발전에서 문화적 요소에 중심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문화라는 말을, 어떤 특수한 역사적 사회의 실천, 재현, 언어 그리고 관습이 기반하고 있는 실질적인 지형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나는 또한 민중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그것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는 ‘상식’의 모순적 형태라는 의미로도 쓰고 있다. 나는 또한 그람시가 ‘국민적-민중적’이라는 명칭으로 총괄했던, 완전히 구분되는 범주의 문제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람시는 이것들이 민중적 헤게모니의 확립을 위한 중요한 장소를 구성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실천의 대상으로서 핵심적인 지주이다. 이는 새로운 집합의지를 발전시키는 데 잠재적인 장애물인 동시에, 변화를 위한 민족적 자원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람시는 이탈리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중적인 카톨릭이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국민적-민중적’ 문화의 발전에 대한 만만치 않은 대안을 구축했는지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국민적-민중적’ 문화의 발전은 [현실에서] 비껴선 채 단순히 소망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달리,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이탈리아의 국민적-민중적 문화의 후진적 성격을 ‘헤게모니화’하여 그것을 진정한 대중적 기초와 지지를 얻은 반동적인 민족적 형식으로 개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인종과 민족이 언제나 강력한 문화적, 국민적-민중적 의미의 함축을 수반해 왔던 [이탈리아에] 필적하는 여타의 상황으로 이전시킬 경우, 그람시의 강조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이 입증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그람시 저작을 인용할 것이다. ‘인종주의’가 단지 이데올로기적 현상일 뿐인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유물론적 이데올로기 이론들의 상대적인 조야함과 환원주의는 이 분야에서 필수적인 분석 작업에 상당한 장애물임이 입증되었다. 특히 동질적이고 비모순적인 의식과 이데올로기 개념에 의해 분석이 위축되어 왔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해 예를 들면 추상수준에서는 반인종주의적인 입장에 헌신해야 할 노동계급 내에서 혹은 노조와 같은 관련 단체들 내에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것을 설명하도록 강제될 때 대부분의 주석자들이 실질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인종주의’ 현상이 설명을 요하는 유일한 사안은 결코 아니지만 그것이 특히 분석을 어렵게 만들었음이 입증되어 왔다.

이데올로기 영역의 형성과 변형, 민중의 의식 및 그 형성 과정이라는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전체적인 접근방식은 이 문제의 근원을 결정적으로 파고들어간다. 그는 종속된 이데올로기들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모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석기 시대의 요소들과 한층 진전된 과학의 원리들, 과거의 모든 역사 단계로부터 전수된 편견들, ..... 그리고 미래의 철학에 대한 직관들..." 그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의 기초를 이루는 이른바 ‘자아’가 어떻게 통일적인 것이 아니라 모순적인 주체이자 사회적인 구성물로 되어가는지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는 ‘인종주의’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면서도 거의 설명되지 않은 특징 중 하나인, 인종주의의 희생자들이 자신을 구속하고 규정하던 바로 그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미혹에 ‘예속’되는 현상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상이하며 종종 모순적인 요소들이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담론들 내에서 어떻게 엮이고 통합될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민중의 사상과 대중의 ‘상식’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특성과 가치 또한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 및 그 내에서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심성에서 가장 심원한 중요성을 지닌다.

이 모든 상이한 방식으로 -- 그리고 내가 여기서 발전시킬 시간을 얻지 못한, 틀림없이 다른 방식으로 -- , 그람시는 인종적으로 구조화된 사회 현상에 대한 현대의 연구에서 새로운 사고와 패러다임 및 전망의 원천으로서 거의 알려지거나 이해되지 못한 이들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보다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명백하게 ‘유럽중심적인’ 그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김덕련 옮김]



# 좀 더 읽기


특히 문화이론과 관련하여 그람시를 따로 다룬 국내문헌은 많지 않다. 김성기 교수가 문화운동판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썼던 ?그람시와 문화운동?(??공동체문화?? 3집, 1986)은 여전히 훌륭한 해설논문이다. 스튜어트홀과 영국 문화연구 내의 흐름은 임영호 편역,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를 보라. 르네이트 홀럽의 ??그람시의 여백 -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이즘을 넘어서??(이후)는 루카치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가로지르는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람시의 원저작으로는 ??옥중수고2 - 철학 역사 문화 편??(거름)과 ??그람시와 함께읽는 문화??(새물결)을 볼 수 있다. 후자는 그람시의 문화관련 저술(Cultural Writings)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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