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문화정치] 2002년 10월 26일, 김성윤
곽차섭, 「서설: 미시사란 무엇인가」, 곽차섭 편,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0
기왕의 역사 연구 경향. 역사적 거대 구조의 탐색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과학적 분석과 계량을 중시하는 방법. 맑스주의 역사학, 독일의 사회구조사, 프랑스 아날학파의 전체사 등이 이데올로기나 이론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이러한 흐름을 대표. 이에 반해, 미시문화사는 사회적?경제적 행위들을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텍스트로 간주하면서, 구체적 개인이란 창을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의 복잡 미효한 관계망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13, 14)
개개인의 이름과 그들간의 관계를 추적하는 ‘실명적?집단전기학적 역사’, 실증 방식보다는 보다 더 넓은 의미의 입증 방식을 포용하는 ‘가능성의 역사’, 구체적인 사건의 전말을 말로 풀어나가는 듯한 ‘이야기로서의 역사’.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데이비스의 『마르땡 게르의 귀향』, 레비의 『무형의 유산』, 레돈디의 『이단자 갈릴레오』. (14, 15)
미시사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 첫째, 미시사는 이름 그대로 역사의 리얼리티를 작은 규모 또는 척도를 통해 보고자 한다. 줌으로 사물을 당겨보는 것. 대상이 ‘잘 경계지워진’ 것. ‘촘촘하게’ 기술함. 둘째, 연구의 초점이 개인에게 있든 공동체 전체에게 있든 간에, 미시사가는 거의 언제나 실제의 이름들을 추적한다. 토지매매 문서를 보더라도 계량적 측면만을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실명을 통해 한 가계와 다른 가계와의 관계나 매매 쌍방의 관계 등을 면밀히 살펴서 그 마을의 인적 관계망을 복원하려 하는 일종의 ‘집단전기학적 접근(prosopography)’. 한 인물이 읽었던 책의 실제 내용과 그의 주장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에 주목하여 이러한 틈새를 통해 리얼리티를 복원. 셋째, 미시사는 대체로 사회를 문화적 텍스트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문화란 종래의 구분처럼 사회나 경제와는 다른 한 부문이라는 뜻이 아니고, 개인 또는 공동체의 행동이나 전략(경제적인 것조차도) 모두를 문화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넷째, 소규모 공동체의 개개인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행적과 관계망을 구체적으로 밝히다 보니, 미시사가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식으로 서술한다. 끝으로, 미시사는 거의 예외 없이 ‘가능성의 역사’를 지향한다. 증거의 단편성이 문제될 때에는 증거와 증거를 잇는 최선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진즈부르그의 이른바 ‘추론적 패러다임’ 혹은 ‘실마리 찾기(paradigma indiziario)’의 방법. 합리적 추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시사가들이 이러한 입장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왕의 실증 방식이 문헌 기록을 남기는 엘리트 문화 연구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주로 구전에 의존해 온 전(前) 산업기 민중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커다란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 때문. ‘이례적 정상(eccezionalmente normale)’ (25~28)
미시사적 접근이 대체로 하층 계급을 그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기존의 역사에 비해 구전사/구술사(oral history)의 경향을 띠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구전자료. 이를 테면 최근 많이 논의되는 위안부 문제가 그것. 일련의 관련 구술 자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하다. 미시사의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큰 또 다른 경우가 범죄 관련 기록들이다. 범죄란 한 문화가 그 스스로의 조정에 실패할 때, 권력과 가치들의 거대 체계에 미소(微小) 체계가 도전할 때 생겨나는 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른바 사회적 ‘정상’과 ‘비정상’ 간의 괴리와 갈들을 극적으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미시사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신문 기록들을 일종의 ‘대화’로 생각하되, 서로간에 이견이나 오해가 노출되는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바로 이때야말로 우리가 틈새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상을 일견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31~33)
까를로 진즈부르그?까를로 뽀니, 「이름과 시합」, 곽차섭 편,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0
앞서 우리는 불평등한 교환과 역사책 시장에 관해 이야기했다. 비록 이탈리아 역사학이 종속 상태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탈리아에는 역사가의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바로 그 문서 사료들이 매우 풍부하게 보존(우리는 여기서 문서보관소와 도서관에 보관 중인 문서들뿐만 아니라 농촌, 도시들이 처한 상황, 민중들의 행동 방식까지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이탈리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서보관소로 생각될 여지가 있으며, 또한 사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단지 그러한 관념론적 저항에만 한정짓는다는 것은 흔히 그렇듯이 일방적인 생각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관념론의 소산일 따름이다. (42, 43)
각별히 우리는 한 마을공동체, 일군의 가계들, 심지어 한 개인까지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분석하려는 경향의 몇 가지 역사 연구 방식이 나타났음을 알고 있다. 리얼리티를 미시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접근 방식이 점점 더 득세하는 이유가 단지 기존의 거시적 방법에 대한 의문이 커져서만은 아니다. 이러한 주제들이 그동안 여성운동에서 강력히 주창해 온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5, 46)
역사학과 인류학의 관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끌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맑스가 한 유명한 이 말은 무엇보다 역사학, 그 다음에는 인류학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두 학문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학자가 현장조사를 통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들의 복잡성은, 역사가에게 일종의 현장 자료 역할을 하는 고문서 자료의 일면성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연구자도 당연히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파편화된 경향은 곧 자료의 파편화를 반영하고 있다. (46, 47)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는 어떤 개인이 특정한 사회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망을 놓쳐버릴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만약 연구 영역이 잘 경계지워진다면, 한 개인에 대한 일련의 문서들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회적 맥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동일한 개인 또는 개인들의 집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특정한 개인을 우리가 아는 모든 사회의 다른 개인들과 구별하게 해 주는 ‘이름’이란 실마리. (47, 48)
실명 인구통계학 + 계열사적 연구. 그러나 여기서 제시된 종류의 미시 실명적 연구가 지닌 무게 중심은 다른 데 있다. 이름을 가운데에 두고 수렴?분산되는 계열들은 일종의 촘촘한 망을 이루고 관찰자에게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간의 연관성을 생생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양조업자이자 직업광대인 꼬스딴띠노 사까르디노의 예…. (48~50)
앞에서 대략적으로 제시한 두 연구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둘 다 사회의 하위 계층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과 실마리로서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로부터의 집단전기학. 결국 문제는 이용 가능한 자료의 덩어리로부터 적절하고도 의미 있는 사례들을 어떻게 골라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에도아르도 그렌디 ‘이례적 정상(eccezionalmente normale)’. 만약 사료들이 하층 계급의 사회적 실재에 대해 침묵하거나 그것을 조직적으로 왜곡한다면, 진정으로 이례적인(따라서 빈도상으로는 희박한) 사료 하나가 천 개의 천편일률적인 사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밝혀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층적이고 비가시적인 층위의 역사, 역사학이라는 게임의 규칙까지도 포함하는 역사, 그리고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역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50~52)
미시사적 분석은 두 가지의 이점. 먼저 다른 종류의 역사서술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제의 삶’을 재구성하도록 해준다. 다음으로, 그처럼 생생한 경험들을 담고 있는 비가시적인 구조들을 탐색하도록 이끌어준다. 따라서 미시사와 일반적 의미의 역사를 ‘실제의 삶에 대한 과학(scienza del vissuto)’으로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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