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영역과 경험

오스카 네히트/알렉산더 클루거

선거,올림픽,연극 초연- 공적 사건들
자녀 양육,공장 노동,방에서 텔레비젼 시청하기- 사적인 것들
인간의 진정한 사회적 경험들은 일상적 삶과 일 속에서 생산되며 그러한 경계들을 가로지른다.

클루거와 네히트의 원래 의도- 공공 영역과 매스 미디아에 대한 책 집필

이떄 공공 영역이란-
1. 공간적 개념으로 의미들의 제조되고 분베되며 교환되는 사회적 공간 혹은 층위들
2. 이러한 공간들 안에서 진행되고 생산되는 관념적 물질
3. “사회적 경험의 일반적 지평”

기존의 공공 영역 개념은 2.나 3.과 같은 것을 파악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2.3.의 공공 영역은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과 판단 기준을 가르키기 떄문이다. 영문 역자 (Peter Labanyi)는 “공공성 (publicity)"이라는 용어를 복원시킬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자본의 이해에 의해 독점된 영역을 재장악하려는 시도이며 그것은 바로 네히트와 클루거가 분삭과 비평만이 아니라 “반-공공성 (Counter-Publicity)" 을 생산하려는 기획 의도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공공 영역과 공공성 간의 어원론적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공공성이라는 개념의 해방적인 약속과 기본적으로 사적 이해의 도구로서의 그 현실간의 간극을 강조하고자 한다.

위의 기획은 매스 미디아와 공공 영역, 두 영역 안에서의 가장 진보된 구조적 변화를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미디아 카르텔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했다.각종 좌파 섹터 안에서의 공공성의 상실은 노동자들의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채널 기구에 대한 제한된 접근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브르죠아 공공영역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반 공공성의 형식들이 있는 가를 질문하게 만든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적 공공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된 이유이며 그것은 매우 두드러진 경험적 관심을 포함한다.브르죠아와 프롤레타 리아의 공공성의 변증법이 바로 이책의 주제다.

역사의 균열들- 위기들,전쟁,투항,혁명,반혁명-은 사회적 힘들의 구체적 성운을 가르키는데 그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공공성 (PP 라고 표시)은 전개된다.PP는 지배적 공공영역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그러한 균열들,주변적 경우들,고립된 발언권들 속에서 재구성되어야한다.
PP에 대한 실질적인 시도들을 연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반 공공성의 가능성이 부상하는 모순들을 조사하고자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적 경험”이나 “PP"와 같은 개념들이 관념주의적 진부함으로 환원될 수 있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다.이와 관계해서 하버마스는 보다 조심스럽게 ”다양한 plebian 공공영역은 역사적 과정에서 억압되었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 [1969,Strukturwandel der Offentlichkeit)

하버마스가 “Plebian" 공공성의 개념을 선호하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가 결코 브르죠아나 룸펜 프롤레타리아적 요소가 없는 결코 자신만의 공공 영역을 구성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이질적인 도시 하층 계급들을 ”plebian"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프랑스 혁명이나 19세기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에서 그들에게 적합한 공공영역을 만들려고 시도헀다.이 개념의 부정확함은 프롤레타리아라고 하지 않고 plebian이라고 한데서 나타난다.클루거와 네히트가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은 브르죠아 공공 영역의 변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선 존재하지만 plebian이라는 용어에선 파악되지 않는 전 사회적 맥락 안에서의 완전히 차별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파업이 일어나는 혹은 점거된 공장은 plebian 공공영역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 뿌리를 둔 공공성 개념의 핵이다.

여기서 시도된 분석 방법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사이의 변증법의 중요성이다.체계적인 접근은 정확한 개념들과 용어들을 찾는데 그것은 분석적으로 명료하고 현상을 구분할 수 있다.만약 역사적 접근이 역사의 진정한 운동을 포획하려면 체계적 개념들의 정확성을 문제삼아야하며 특히 그 배제하려는 경향을 문제시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 PP의 개념의 적용은 이러한 변증법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한다.그것은 Plebian 공공영역보다 더 정확하다고는 주장하지 않지만 이렇게 단어를 달리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분석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킨다.

우리는 브르죠아라는 단어를 독자들이 공공영역이라는 지배적 개념의 사회적 기원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이러한 방식으로 공공영역의 페티쉬적 성격이 파악될 것이며 유물론적 개념이 발전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 역시 브르죠아 만큼 모호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계급의 해방사 안에 실질적으로 뿌리박혀있는 전략적인 위치를 가르킨다. 또 이 개념을 고수하는 이유는 현제 그것이 지배적인 담론으로 흡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판적 ” 공공성의 개념을 너무나도 기꺼히 수용하는 브르죠아 공공영역의 상징적 스펙트럼의 부분으로서의 범주화를 거부한다.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50년간의 반혁명과 복구는 노동운동의 언어적 자원들을 고갈시켰다.연방 공화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는 희석되고 시대착오적인 의미를 가진다.하지만 그것이 가르키는 실제 상황은 현재에 속하며 그것을 위한 다른 용어는 없다.단어들이 가르키는 대상들에 변화가 있기 전에 용어들이 무용해지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다.

브르죠아 공공영역이 브르죠아 이해관계만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지만 프롤레타리아적 경험과 그 구성체가 동일하게 결정 요소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정되지 않는다.프롤레타리아적 삶은 응집력있는 전체를 구성하지는 않지만 어떤 진정한 통일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이러한 방해를 강화시키는 것이 바로 브르죠아 공공 영역이다.

최근 만연된 공공 영역 개념의 지배적인 해석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다양한 현상을 함께 모으려고 시도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삶의 두 가지 영역들을 배제한다는 점이다--그것은 비즈니스와 가족 사회화의 전 산업적 장치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공공영역은 즉각적인 영역으로부터 그 실체를 획득하는데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회적 -삶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비록 공공 영역이 소위 사회의 전체성을 표상한다고 해도 말이다.

실제적으로 부르주아 공공영역의 모든 형식들이 지닌 특징적 취약함은 이 모순--즉 브르죠아 공공 영역은 실제적인 삶-관심들을 배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사회를 대변하노라고 주장하고 있는--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보다 실체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해관계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브르죠아 공공 영역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적인 삶은 “ 그 자체”의 것으로 남게된다.전자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이해되지 못하고 말이다.

오늘날 의식 산업,광고,비지니스 공공 캠페인들,그리고 행정 기구들은- 그 자체가 유사-공공 영역인 고도의 생산 과정들과 더불어- 새로운 생산 영역으로서 고전적 브르죠아 공공 영역에 겹쳐있다. 그것들의 뿌리는 공적인 것이 아니다:그들은 일상의 생소재를 작동시키며 그것은 전통적인 공공성의 형태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침투적인 힘을 직접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부터 끌어낸다.전통적인 공공 영역의 매개적 장을 방해하면서( 선거라는 공공 영역,여론등_ 그들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려한다.프롤레타리아의 반공공성이 자본의 이익이 침윤된 이러한 공공 영역들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단순히 그 자신을 고전적 브르죠아 공공 영역의 반테제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실질적인 정치적 경험은 결정적이다. 노동계급은 브르죠아 공공 영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대중이 공공 영역의 힘에 의해 재강화된 지배 계급과 싸우려고 시도한다면 그들의 싸움은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동시에 자신을 향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인데 왜냐하면 공공 영역이 구성된 것은 바로 그들에 의해서기 때문이다.

이것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브르죠아 공공 영역이라는 개념은- “ 정치적으로 중요한 모든 결정 과정을 법이 보장하는 권리로 묶으려는 대담한 픽션이며 그들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려는 시민들을 함께 묶으려는 대담한 픽션”으 로써- 그 시작부터 모호한 것이었다. 혁명적인 브르죠아지는 여론의 개념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전체 사회를 통합시키려고 했다.이것은 단지 목표로만 남아있을 뿐 ,현실적으로 이것이 정치적 용어로 표현된 바는 없지만,그것은 상품 교환과 사회를 통합하는 사적 소유에 기반한 가치다.이러한 방식으로 브르죠아 공공 영역은 그것에 의해 구성된 대중 안에 가능한 개혁과 대안들에 대한 인식을 창조했다.이러한 허상은 정치적인 현상 파악과 대중을 가동시키려는 모든 시도 속에서 반복되며 그것은 브르죠아 공공 영역의 범주 안에서 일어난다.

17,18세기에 브르죠아 사회는 공공 영역을 그 경험들과 이데올로기들을 구체화하는 공공 영역을 구성했다.“브르죠아의 독재‘는 분할화 그리고 공공 영역의 형태 속에서 자신을 표명한다.브르죠아 혁명은 처음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그 형식들- 예를 들자면 권력의 분리,공적 사적 분할,정치와 생산,일상 언어와 진정한 사회적 표현,한편으로는 교육,과학과 예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이익과 경험들의 분리-은 심지어 사회 비판,반-공공성 그리고 대중 다수의 해방과 같은 것을 언급하는 것도 방지했다.가장 넓은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경험들과 관심들이 경험과 사회적 실천의 상호연관된 질적 요소들의 이러한 분리 속에서 그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는 기회란 없다.

프롤레타리아적인 경험의 내용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못하지만,이 책에서 우리의 정치적 동기는 공공 영역과 매스미디아에 대한 탐구를 그 자연스럽게 된 컨텍스트로부터 분리하고자하는 것이며 거기서 생산되는 거대한 출판물들은 브르죠아 공공 영역의 분할의 변종을 집행할 뿐이다.우리가 “자연스럽게 되었다”리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공공 영역이라는 핵심 귀절과 연결된 가장 중요한 개념의 양가성으로 증명된다: 여론(public opinion),공권(public authority), 정보의 자유,공공성의 생산.매스 미디아등.이 모든 개념들은 특정한 역사적 기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한 이해들을 표현한다.사회의 상호모순적인 발전은 이러한 개념의 모순적인 성격 속에 침전되어있다.그것들이 어디서 파생되었으며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에 대한 지식은 흔고학이나 사상사에 대한 탐구보다 그 내용에 대한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브르죠아 공공 영역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형식적 특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그안에서 구체화된 생각들에 촛점을 마추는 한 지속적 역사적 진행으로 기술될 수 있다.하지만 출발점을 그 진정한 실체로 놓을 경우,그것은 통합된 것으로 전혀 볼 수 없으며 차라리 다만 추상적으로 연관된 개별적 영역들의 집합일 뿐이다.텔레비젼,언론,이익 집단,정당,국회,군대,공공 교육,법적 제도,교회 산업은 공공 영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표면적으로 융합되어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러한 일반적 공공 영역은 이러한 영역과 다만 하나의 관념으로서만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이다.그리고 각 영역안에 포함된 이해에 의해 전유된다.특히 생산 섹터의 조직화된 이해에 의해.여기서 무효화되는 것은 생산적 섹터에서 파생하는 그러한 영역들이며 그것은 비공적인 것,또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능력에 대한 집단적 의혹-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부산물이다-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 이러한 두가지 경향들은 함께 국가와 의회 속에서 통합되어 고전적 공공 영역의 표명과 결합된다. 이러한 이유로 쇠퇴하는 고전적 공공영역은 그 뒤에서 사람들이 자본주의자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단순한 허깨비가 아니다.이와 같은 개념은 바로 이렇게 집합적인 공공 영역 안에서 정치가들이 자본의 이해와 상반되는 결정을 취할 수 있다는 반대의 추정만큼이나 허위적인 것이다.

설명을 단순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들을 두가지의 상대적으로 최근의 매스 미디아에 국한시키겠다.그것은 미디아 카르텔과 텔레비젼이다.

이 책에서 우리의 정치적 동기는 정치경제학의 직접적이고 분석적인 개념들이 인간들의 진정한 경험을 가르키도록할 논쟁의 틀을 제공하자는 것이다.그러한 논쟁은 브르죠아나 전통적인 아카데미의 공공 영역이 제공하는 형식 속에서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


공공 영역과 집단적 경험의 구성

공공 영역의 사용가치: 노동계급은 어느 정도나 공공 영역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 지배 계급들은 공공영역을 통해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가?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유연한 개념이기 때문에 공공 영역의 사용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pubic과 공공 영역은 다양한 경쟁적 의미들을 노출하는데 그것은 다양한 역사적 단계에서 파생하며 고도로 산업화된 복지 국가의 시기의 브르죠아 사회에 동시적으로 적용했을 떄는 그것을 불투명한 조합에 이른다.”(하버마스- strukturwandel)

먼저 제한이 있다. 하버마스는 “공공 영역”이라는 개념을 브르죠아 공공 영역의 “시대적으로 규정적 범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공공 영역의 “유통적 컨텍스트”에서 파생했다. 그러므로 공공영역은 상수로 나타난다. 그것의 현상적 형식들은 생산 구조를 은폐하며 무엇보다도 개별적 제도들의 발생을 은폐한다.

이러한 제한 속에 지칭의 범주적 틀은 혼란스럽게 동요한다. 공공 영역은 특정한 제도들과 관행들을 가르킨다 (공권,언론,여론,대중,홍보 작업,거리들,공공 장소들): 그것은 그러나 또한 사회적 경험의 일반적 지평이며 현실에서나 혹은 사회 전체 구성원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것들의 합계다. 이러한 의미로 공공성은 한편으로는 소수의 전문가들(정치가들,편집자들,관리들)의 문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되면서 사람들의 지력 속에서 그들의 의식의 차원 속에서 구체화된다. 사회적 관행에서 개념의 이런 두가지 쓰임새들은 거듭 혼란을 겪는다. 순수하게 사적인 것은 다만 그것이 공적 제도의 경계안에 속하기 때문에 공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공권의 도장이 찍혔기 때문에 공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과 같은 것은 사적이라고 간주되지만 사실상은 가장 큰 공적 관심이다).

우리의 “포스트브르죠아”의 물질적 이해의 성운과 융합되어,공공 영역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정당화의 측면과 사회와 관계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을 조정하는 메카니즘 사이에서 동요한다.양쪽다 브르죠아 공공 영역은 허상임을 드러내지만 하지만 그것은 이 허상과 동일화될 수 없다.증가하는 인간의 사회화와 희석된 그들의 사적 삶의 형식들 사이의 모순들이 존재하는 한 ,공공 영역은 동시에 기본적인 사회적 요구에 대한 진정한 발화다.다만 표현의 형식이 사회 구성원을 연결한다. 그들은 단순히 생산 과정을 통해,그들의 표명된 사회적 특성들을 서로서로와 결합함으로써 다만 “ 사적으로‘ 집합될 뿐이다.

(“유태인 문제”에서 맑스는 19세기 국가를 분석한다. 맑스에 따르면 “사유 재산의 폐지는 사유재산 폐지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심지어 미리 가정하기 까지한다. 국가가 탄생,계급 그리고 교육의 구분이 비정치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는 사실은 그것을 그렇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들로써 그들을 확인해준다. 문제는 그것이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띄게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인식의 방식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천상과 지상의 삶: 정치적 커뮤니티의 삶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집단적 존재로 간주하게 되고 시민 사회에서 인간은 사적 개인으로 행동한다.“는 일종의 사회의 이중화가 발생한다.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와의 관계는 하늘과 땅의 관계 만큼이나 정신적인 것이다. 19세기 국가에 있어 공공 영역은 바로 이러한 관념의 영역에 해당한다. 공공 영역의 이러한 개념은 양가적인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러한 평행 관계에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당성을 국가 권위로부터 유추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을 일종의 ”조정과 의식 메카니즘“으로서의 국가로부터 자신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수용성에서 보자면 ,그것은 통합적인 차원에서 사적 영역과 소외된 노동과정 안에서 인간의 사회화된 특성들을 조합할 수 있다. 공공성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적인 생존 그리고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화된 노동과정과 구분된다.그 개념의 모호함은 실제로 무엇이 공공 이익인지를 객관적으로 정의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재료가 아니라 구성된 층위다.)

브르죠아 공공 영역의 쇠퇴해가는 형식들은 초기의 브르죠아지가 결정한 공공 영역이라는 강조적 개념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구원되지도 해석되지도 않는다. 대중들이 그 자신들을 경험이라는 공적 지평안에서 조정할 필요성은 이러한 필요성이 브르죠아 공공 영역 안에서 진정으로 발화되지 않을 때마다 공공 영역이 단순한 규범들의 씨스템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무화시키지 않는다. 공공 영역에 대한 이상적이고 비판적인 견해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은 변증법적인 결과가 아니라 양가적인 결과다. 어떤 순간에 공공 영역은 활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드러나고 다음 순간 그럴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필요한 것은 공공 영역의 관념사를 그 쇠퇴사와 더불어 조사하는 것이며 동일한 메카니즘을 도출하는 것이다.

경험과 공공 영역

사회적 경험이 그 내부에서 구성될 때 공공 영역은 사용 가치를 갖는다. 브르죠아적 삶과 생산의 관행에서 경험과 조직은 사회의 총체성과 어떤 구체적 관계도 맺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들은 일차적으로 기술적으로 사용된다.경험의 조직과 구성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브르죠아 생산 양식의 제도화를 예견한다.

사적인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공적 영역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언어,사회적 교류의 양식들 그리고 공적인 컨텍스트 그자체가 존재하게 되는 방식에도 적용된다.경험의 지평과 구성에 대한 결정이 미리 정해진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순전히 기술적인 태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여기에 덧붙여,브르죠아의 그 자신의 경험과 그 구성에 관한 한 ,보편적인 상품 생산의 기존 관행과의 거의 지속적인 유추가 있다.

가치의 추상화는 브르죠아 공공 영역을 강조하며 세계를 장악하며- 다른 말로 하자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노동의 분리는- 모델을 제시하고 그것은 국가와 공공 영역의 행위들의 일반화 속에서 인지된다: 법 안에서. 상품 생산의 부정부적 상황이 사적 이해 관계에 의해 동기화되더라도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의 집단 의지와 반대로,그것은 일반적 상관성의 모델들을 발전시킨다.이러한 모델들은 집단적 의지의 생산물로 오인되고 해석된다.마치 실제적인 기존 체제가,그것은 회고적으로 인지되는데,브르죠아 공공 영역에 의존하고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브르죠아 전통의 구조는 현재의 삶의 방식과 생산 관행들을 결정하고 거기서 계급들과 개인들 자체는 전통적으로 함축되는 의미에서의 시민들이 더 이상 아니다.오늘날의 중간계급들.브르죠아적인 삶의 방식에 영향받은 노동계급 섹터들,학생들,기술적인 인텔리겐차들은 19세기의 협소한 재산권을 소유하고 교육받은 브르죠아 계층의 계승자들이며 후기 자본주의적 상황 속에서 경험과 구성의 페턴들의 개별적인 구성요소들을 반복한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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