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의 신화 - 다층적 식민지 한국 남성의 불행한 판타지



김성윤



1. ‘백마’ 탄 훈이


여기 동영상 파일이 하나 있다. 당나귀라는 p2p 프로그램을 통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이 동영상 파일의 제목은 흥미롭게도 ‘백마 따먹기’(인터넷 포르노, 2003)이다. 얼마나 흥분되는 순간일까. 남자들에게 백마는 하나의 신화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청년기의 숱한 결정적 순간들에 아무리 많은 ‘콩을 까’봤더라도, 그들에게 여전한 ‘미개척지’는 바로 ‘백마’다. 이들에게 ‘싸나이’로서 마지막 남은 봉우리는 백인 여성이다.

이 동영상에는 그러한 흥분과 긴장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별다른 설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장소는 미국의 교외 어느 한적한 주택 뒤뜰에 있는 수영장이 확실하다. 여기서 잘빠진 몸매의 어느 젊은 동양 남성이 한가로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남자 하나가 더 있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이 남자는 동영상 내내 비춰지지 않지만, ‘백마 따먹기’의 순간을 관음하는 ‘나’의 잠재적 시선을 부여잡는다. 그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미 일치되어 있는 나의 시선은 그의 연출 행위를 통해 이제부터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사태들에 동참하게 된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남자가 “재밌냐? … 훈이야, 재밌냐? … 훈이야, 재밌냐”라고 보채듯 묻는다. 이 두 남성이 나와 같은 한국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잠시 후 있을 ‘뿅뿅’스러운 시간들을 기다리는 나에게 이 질문은 나로부터 나와서 나에게로 향하는 목소리이다. 나에 대한 이 호명은 나를 이름 모를 관음적 카메라맨이 아니라 ‘훈이’로 만들어준다. 시선과 음성에 대한 초-동일시는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나는 이미 동영상을 보기 전부터 파일제목을 통해 준-발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기다리던 ‘백마’만 나타나면 그동안 판타지로만 간직해오던 백마의 신화는 현실이 된다. 잠깐의 페이드 아웃-인이 교차되고 이윽고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그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수영장과 바로 붙어 있는 작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적신다. 다음 상황을 기다리는 그녀는 물놀이를 하고 있고, 촬영자이자 연출자인 카메라맨은 훈이에게 “수영 한번” 해보라고 요구한 후 “훈이가 타나 옆에서 스기 위해서… 멋진 다이빙을… 해요”라며 상황을 설명한다. 훈이는 짝짓기를 위한 구애를 하듯이 그녀-타나에게 “헤이, 따이빙!”이라 외치고는 강렬한 기세로 입수한다.

입수 후 타나에게 다가간 훈은 다짜고짜 “My name is 훈”이라고 통성명을 한다. 상황은 “Nice to meet you”라는 의례적 영어회화로 이어지고, 두 사람 간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 잠깐의 불편한 시간은 신화의 현실화를 기대하며 가파르게 호흡을 일치하고 있는 ‘나’의 흐름마저 정지시켜버린다. 카메라맨의 “훈이야, 타나한테 좀 잘해봐. 작업 들어가야지”라는 독려는, 정말이지, 내가 나에게 혹은 우리가 우리에게 거는 주문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욕조 안에서 훈이는 타나를 ‘다루지 못한다.’ 첫 대화에서부터 타나를 다루지 못했던 훈이는 다른 인터넷 성인 동영상에서 보여줬던 여유로움과 장악력을 상실한 듯하다.

“훈이야, 니가 지는 거 같애.” 카메라맨의 한마디는 이 모든 상황의 실체를 폭로해버린다. 그렇다. 이건 게임이었다. 그 한마디에 훈이는 긴장을 풀기 위해서 물안경을 쓰고 잠수 오랄을 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징크스 ‘가면 착용’을 통해 힘을 내보려고 안간힘을 써본다. 그러나 이 소통불능(dis-communication) 상황에서 훈이는 끝내 못 견뎌 한다. 지지 않기 위해 ‘yes’와 ‘ok’를 연발하고 ‘따이빙’을 하면서 근성을 과시했지만, 여기서의 규칙은 언어적으로는 백인 중산층 영어이고 장소적으로는 아메리카의 옥외 수영장이며 인물적으로는 ‘백인’ 여성이다.

어쨌든 훈이는 장소를 수영장에서 텐트로 옮기고서야 타나를 ‘따먹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20~30분이 되는 이 과정을 보면서 애초 ‘나’라는 존재가 가졌던 신화는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훈이가 보였던 잠깐의 분열증적 머뭇거림을 통해서 현실 속의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맥락이 그렇게 전개된 이상, ‘백인 따먹기’라는 이름의 동영상은 그 언표가 지니고 있던 상징성을 상실하고 평범한 포르노 동영상 텍스트에 불과하게 된다.

섹스가 끝난 후 엄지 손가락을 살짝 추켜올리고 “good job … powerful girl … sexy girl”이라고 말하는 훈이는 휴지로 타나의 몸에 묻은 정액을 닦아준다. 그리고선 타나를 부축하려고 하는데, 우습게도 타나는 훈이의 손을 외면한 채 그냥 일어서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간다. 멋쩍어진 훈이는 카메라를 향해 V자를 그린 채 웃으며 “어때?”라고 묻고, 그렇게 동영상은 끝이 난다. 이 균열적인 동영상 텍스트를 맥락적으로 파악한 사람이라면, 머리 속으로 이렇게 답했을 게 분명하다. ‘니가 따먹힌 거야.’



2. 그들이 ‘백마’를 타기까지


(1) 식민주의와 성차별적 은유

‘백마’의 신화에 관한 이 글의 관심은 신-식민지적 상황에서 한국 남성들이 보이는 문화적이고 성애적인 히스테리를 다루는 데 있다. 신식민지라 함은 한국의 새로운 식민지적 상황을 의미하며, 그 종주국은 당연히 미국을 일컫는다. 백마 신화를 본격적으로 해부하기에 앞서, 잠시 우회의 설법을 펴야겠다. 신식민지적 문화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에는 그 지층이 생각 외로 두텁기 때문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은 여전히 일본에 대해 식민-후기적 속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동시에 이주노동력의 유입과 문화자본의 동아시아 진출을 통해 식민주의적 속성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분단현실이라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정세와 중첩되면서 더욱 복마전 양상을 띠게 된다. 백마에 관한 신화는 켜켜이 쌓여진 이 지층들 위에서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공통된 현상들을 포착할 수 있다. 우선은 모더니티 혹은 근대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교환가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외부를 포섭하고 식민화하던 제국주의는 사라졌지만, 현재와 같은 세계체제 속에서도 이 근대성을 누가 누구에게 수유하느냐에 따라서 식민주의와 식민지의 지형은 위계적으로 편성된다. 그리고 국민국가 단위, 즉 식민지 내부에서는 식민모국에서 만들어진 이 모더니티를 누가 소유하고 번역하고 유통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위계가 성립한다. 한국의 현실은 일본, 미국, 동아시아,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이 위계에 대한 이해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와 같은 초국가적인(trans-national) 지형과 더불어, 국민국가 단위로서 한국 내부의 현실을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이는 방대한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근대성의 이러한 교환체계가 상징체계의 기반에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근대성은 현재의 문물을 일컫는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철도, 항만, 도로 등으로 오면 물질적인 것이 되고, 교육, 법, 정책 등으로 오면 제도가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패션, 언어, 예술과 같이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형식에서조차 근대성은 광범위한 체제로 자리 잡는다.

그동안 이러한 문제에 대해 숱한 담론들이 있어왔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억눌린 자에 관한 문제다. 근대성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소유와 유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달리 말해 분배의 문제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가령 근대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근대성의 경험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목격할 수 있듯이 근대화의 과정은 ― 그것이 식민지 근대화든 서구적 근대화든 상관없이 ― 암묵적으로 노동자, 여성, 빈민, 장애인, 노인, 지역민들을 배제하며 차별적으로 진행돼왔다.

그런데 식민지적 현실에서는 근대성을 소유하고 번역하는 사람에게도 모순이 경험된다. 파농을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은 ‘노란 피부에 흰 가면’을 뒤집어 쓴 현실이다(이성욱, 1999). 이 글을 구성하는 첫 번째 관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식민모국의 근대성을 번역하여 식민지에 유통하는 경험은 불안과 긴장에 기반한 히스테리적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근대성은 식민성과 야합한다. 예를 들자면, “중소도시를 식민지화 한 서울은 중소도시의 거주인들에게는 메트로폴리탄이고, 다시 서울사람들은 외국을 상상적 메트로폴리탄으로 동경(노명우, 2002)”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순이 젠더체계를 기반으로 상징화하여 작동한다는 점이다. 식민모국-식민지의 관계는 노골적인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주인-노예의 관계로 은유되지만, 최근과 같이 식민후기적이고 신식민지적인 현실에서는 남성-여성의 관계가 지배적인 은유로 자리 잡는다. 오리엔탈리즘의 구도에서 식민지는 여성이 되며, 육지로서의 식민지는 ‘처녀지(조지아, 버지니아, 아메리카)’가 되는 것이 상식이다.1) 그런데 문제는 식민 현실이 제도적으로 청산되고 난 이후부터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식민관계에 대한 이러한 성차별적 은유는 식민의 청산과 함께 초월과 극복의 대상이 된다. 식민지인은 자신이 끊임없이 여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김성례, 2001; 최정무, 1997; 최정무 외, 2001). 게다가 현재 남한사회와 같이 떠나간 ‘남성’의 자리에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자리하게 되면, 그 심리 지리는 거의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로 구조화돼버린다.

이 글의 관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모순적인 전유와 그 와중에 상징적으로 매개되고 있는 성차별적 은유의 모습들을 비판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마’는 매우 훌륭한 텍스트이다. 식민후기 혹은 신식민지적인 현실에서 모순적인 위치에 있는 남성들이 이 성차별적 은유를 어떻게 조직하고 구성하고 적응하는지를 해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2) 모순적 위치의 한국 남성

젠더와 사회의 다른 모순들 간의 착종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다. 서양의 경우 인종문제가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면 제3세계, 특히 식민지적 기억과 식민주의적 무의식(고모리, 2002)이 얽혀 있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국가들에서는 그 양상이 더욱 복잡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대할 때는 성찰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최근의 논의들은 젠더와 민족주의 혹은 식민지 근대성의 문제로 천착하는 것 같다.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의 성별 분업으로 인한 여성 노동의 착취 문제(김현미, 2001), 가부장제를 내화한 민족주의 담론에 의해 여성-존재가 비가시화된 문제, 민족 억압 현실 속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했던 사실(위안부, 기지촌 여성) 등, 대개 이러한 논의들은 억압 가설에 기대어 식민지적 상황의 피해자로서의 여성문제를 이슈화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반면 다른 흐름도 있다. 최근 여성주의에서 주요한 작업으로 젠더사(history of gender)가 부상하면서 나타난 흐름인데, 피해자가 아니라 식민지적 상황을 전유하는 주체로서 의미화하는 경향이다. 식민지 근대성과 결부하여 기생이나 신여성을 새롭게 조명한다거나(김일란, 2002; 문옥표, 2003 등), 미군정을 거친 신식민지적 양상 속에서 양공주 담론이나 기지촌 일상을 재해석하면서(원미혜, 2002 등) 국민으로서의 식민지 경험과 여성으로서의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개인적인 욕망을 조직화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듯 식민지 근대성 문제와 여성을 다룬 논의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반면, 남성들의 욕망과 담론들을 분석하는 의미화하려는 경향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문화론과 상징체계의 차원에서 식민지적 상황의 남성 욕망은 젠더나 섹슈얼리티 등 성과 관련된 모든 측면에서 거의 언급이 없어왔다. 물론 대개의 경우 식민지 남성의 욕망은 조선인 일반의 욕망으로 언어화된다.2)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여성들에게 공통적으로 체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몰젠더적(gender-blind) 담론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남성문화’(Simmel, 1911)의 성차별적인 권력 기제에 대한 논의를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예기치 않은 효과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식민지 상황에서 인간의 욕망은 다분히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논의에서 탈식민적인(de-colonial) 전략으로 종종 언급되곤 하는 양가성, 혼성성, 모방 등과 같은 개념들 역시 인간 행위의 다면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식민모국의 문화에 대한 동경과 그로 인한 ‘흉내내기’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식민지적 사회구조에 탈구를 일으킨다는 언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들의 경우 식민지 현실에서 억압과 수탈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병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화된다. 번역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피식민지 남성에게 의존하거나(신여성, 기생) 아예 식민본국으로 투항(양공주, 기지촌 성매매)하는 경우다. 그와는 다소 다른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것은 모순적 위치에 처해 있는 피식민지의 남성들이다. 그들은 피식민지인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여성들과 동일한 민족적?인종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나뉘어 있는 사회적 젠더체계 속에서는 여성들보다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적어도 계급적 문제를 논외로 치는 한에서, 여성들이 식민모국과 남성들의 이중적인 식민지적 상황에 처한 것에 비해, 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인이자 식민인인 모순적 상황에 부대끼고 있는 셈이다. 여성이 모순의 응집이라면 남성은 모순 속의 모순이다.


(3) 식민후기, 식민모국, 신식민지 그리고 한국

젠더와 민족-국가 그리고 식민주의가 서로 얽혀 있는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한반도의 다층적인 식민지적 상황이다. 우선 한국이 처한 식민후기적 양상을 들 수 있다. 형식상 그리고 제도상 한국은 주권을 회복한 독립적인 국민국가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친일 과거사 등 청산하지 못한 식민 유산은 대한민국이 식민후기적 징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비록 식민지 수탈은 종식되었지만 한국사회 지식-권력의 담론체계에서 개별 국민들에게 식민지 근대성이 주요한 황홀경으로 작용했고, 그러한 기득권의 배타적 소유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된다는 현실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군위안부로 시작하여 매춘관광에 이르기까지, 식민후기적 거래물로서 언제나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도 곱씹어 볼 만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식민의 극복이라는 기획과 맞물리게 되면 상황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가령 풍수지리적인 맥락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여성의 성기 위치에 강간의 상징으로 틀어박혀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해체한다든지(최정무, 1997), 국토의 혈맥마다 꽂혀 있는 쇠말뚝을 제거하는(김성례, 2001) 등의 행위는 단순히 국토를 정상화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이러한 주술적 행위들은 식민의 극복이며, 성차별적 은유체계에 근거한다면 여성지위에 대한 극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한사회의 남성화이다. 일례로 최근 한일 양국 간에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두텁게 자리 잡았던 성차별적 도식이 해체를 넘어 전도역전하고 있는 형국을 지적할 수도 있다. 특히 이러한 양상은 양국합작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대개 남자 주인공은 한국인이 맡고 여자 주인공은 일본인이 맡는 경우가 지배적이다.3) 실로 젠더와 민족-국가를 둘러싸고 가부장제와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축이 식민후기라는 국면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로는 분단체제에 놓여 있는 한반도 정세를 들 수 있다. 한반도 내에서 전통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남쪽 사람에게는 농경/부드러움/섬세함/평이한 억양 등의 여성적인 이미지가 부과되어 있었고, 반면 북쪽 사람은 수렵/공격적임/투박함/거친 억양 등 남성적인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이 관례라면 관례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이미지는 한반도 역사에서 고구려라는 공격적인 타입의 팽창적이고 외부지향적인 강한 민족주의를 환기하는 데 주로 동원됐으며, 한국전쟁의 남침론을 정당화하고 북한에 대한 안보와 경계의식을 살포하는 데에 유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한국이 북한과의 경제적 경쟁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하는데 소위 ‘남남북녀’라는 언설에서 그 극을 달린다. 사전적인 의미로 이 말은 남쪽에 미남이 많고 북쪽에 미녀가 많다는 속설에 불과하지만,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 북측 미녀응원단을 둘러싼 미디어의 재현양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국민일보, 2002) 남한을 남성화하고 북한을 여성화하는 국가-성별 이미지 전략에 유용하게 동원되기도 한다.

식민후기 한국의 남성적 국가이미지화 야심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주노동자의 유입은 한국사회의 문화적 지형도를 점차적으로 바꿔가고 있다. 특히 노동력 송출국에서 노동력 유입국으로 그 면모를 탈바꿈하고 난 이후부터는(설동훈, 2000), 국가-성별의 전략에 인종주의적 양상이 덧붙기까지 한다(박노자, 2001). 이러한 현상은 국내에서도 이산과 혼종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하는 등 사회적 상상력의 저변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우리의 의식 깊이 각인되어 있는 편견과 배타성을 폭로하는 촉발점으로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에서도 인종-성별 이미지 체계가 작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이주노동자와 한국여성이 결혼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데, 물론 이를 계기로 부계혈통을 기반으로 하는 호적법이 수정되는 긍정적인 현상도 있었지만, 피부색 차별의 척박한 현실 위에 새로운 혼혈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이러한 국제결혼 양상을 두고 일부 한국남성의 인종차별적 반발감이 형성되고 있다. 여전히 현실적으로는 후기식민지적이고 신식민지적 의식이 지배적인 가운데, 이주노동자의 유입으로 서서히 ‘식민주의적 무의식’이 작동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급증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대중문화교류도 한국의 국가-성별 이미지를 자극하는 또 다른 요소가 된다. 한류열풍에 대한 자성으로 소개된 바 있는 이와부치 고이치(2004)의 저서는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일본의 대중문화 유통에 문화제국주의적인 욕망이 어떻게 개입해 들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이 한국과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일면 성찰적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우리 사회가 결코 자유롭지만은 못할 이러한 식민주의적 욕망에 덧붙여, 그 매개 역할을 하는 한류스타에 대한 초점의 대다수가 남성 연예인에게 몰려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욘사마를 비롯한 4대천황이 일본열도의 여성들을 황홀하게 만들고, 강타와 문희준이 중국의 10대들에게 괴성을 지르게끔 하는 장면들은 기호학적인 체계와 결부시켜 본다면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국가-젠더적 위치를 실감케 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한국의 국가-성별 이미지가 점점 남성화되어가는 징후들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한국이 처한 현실은 식민후기이자 신식민지이다. 한국의 현실은 여성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미국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미국의 남성 이미지화와 한국의 여성 이미지화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다. 동양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판타지(우미성, 2001)가 있는가 하면, 미군정기부터 이어져 온 기지촌을 둘러싼 현실적인 역사도 개입해 있다. 게다가 상징체계적인 차원에서 그동안 우리는 식민후기 극복을 위해 일본에 대해서는 남성화 전략을 택해 왔지만, 아버지 국가에 해당하는 미국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여성화 전략으로 일관해왔다는 점도 빼먹을 수 없다(물론 이 문제는 세대간에 따라 전혀 상반된 담론 구성체를 조직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 미국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식민지적 기억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성차별적 은유를 역이용하여 말하자면, 일본에 대한 강간의 흔적을 미국이라는 자상한 남성을 통해 잊어보고자 함이다. 어쩌면 이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가져왔던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다니는 모던보이와 모던걸(김진송, 1999)은 물론이거니와 「날개」의 저자 소설가 이상이 서울역 테라스에 앉아 ‘날자 날자 날자’고 하던 절규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가 서구적 근대화의 불완전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미국을 통한 서구적 근대성의 완성은 식민지 근대성의 초월이자 극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의 소지는 있다. 외려 이것은 신식민지적 근대성에 불과할 수도 있을뿐더러, 신식민지적인 억압과 거기서 비롯되는 새로운 불만을 생산하는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백마’와 화이트 콤플렉스


(1) 백마와 태극기, 그리고 영화 <깃발을 꽂으며>

이렇게 식민후기의 극복과 신식민지의 추상화된 억압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백마’가 등장한다. 백마란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적인 담화행위 속에서 백마는 남성과 여성들에게 차별적으로 각인되어 왔다. 여성에게 백마는 왕자가 타고 오는 말이다. 억압적 문화 경험을 남녀의 모순된 위계 속에서 해소할 수 있도록 탈출구를 열어주는 제한적인 매개인 셈이다. 남성에게 백마는 사전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그 내포가 전혀 다르다. ‘훈이’로 표상되는 한국 남성들은 왜 그토록 백인 여성들을 자신의 작업 리스트에 올리려고 혈안이 된 걸까. 남성에게 백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말이기도 하지만, 전장에서 이긴 후 승리를 기념해 뺏어오는 보상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왜 ‘백’마여야 하는가. 하얀 빛을 내는 말이 아름답다는 이 진부한 도식의 기원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백색의 상징성은 그 무엇보다 깨끗하다는 데에 있다. 불순물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위생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백색이 위생과 연결되어 있는 이러한 의미체계는 물론 병리학의 도입이나 근대적 신체의 탄생과도 강하게 결부되어 있지만(고미숙, 2001), 무엇보다 빛을 나타내기도 하는 흰 색의 의미처럼 과시성을 간과할 수가 없다. 청결함은 단순히 개인 신체의 위생적 관리라는 것을 넘어서 타인에 대한 문화적?심미적 과시를 표출하기도 한다.

굳이 베블렌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과시는 자신이 유한계급임을 드러낼 때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이다. 깨끗한 상태 혹은 씻은 상태라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신체를 관리할 시간이 있다는 바를 뜻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청결과 불결 혹은 문명과 야만의 근대적 이분법의 체계로까지 나아간다. 즉 백색은 문명과 근대성을 상징하는 정점에 있는 셈이다. 단적으로 우리가 중국인을 차별하는 ‘떼놈’담론을 비판적으로 상기해보라.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위생과 화장을 넘어, 화학적 합성이나 수술을 통해 아직도 백색 피부를 추종하고 있다(경향신문, 2004).

근대성이 교환가치화된 형태로서 언급한 바 있던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짙은 분칠(김진송, 1999; 신명직, 2003)도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화이트 콤플렉스의 심미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을 추적하게 해준다. 문제는 백색의 근대적 상징성에 덧붙여 우리 고유의 식민지 경험이 드러날 때이다. 이 때 흰 색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억압적 현실에 대한 전복의 상징물이 된다.

2002년말 미선이?효순이 두 중학생을 추모하던 촛불집회 당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던 키치적 에로 영화 <깃발을 꽂으며>를 잠시 떠올려보자. 비슷한 시기 기지촌 여성의 일상을 다뤘던 다큐멘터리 <나와 부엉이>와는 전혀 다르게, 이 영화는 미국에 의한 한국의 신식민지적 현실을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해소해버린다. 이 영화가 심의를 받기 전 원래 제목은 <태극기를 꽂으며>였다. 심의 당국은 “미국과 관련한 장면들을 재차 언급하며 보류 내용에 대해 국제적 외교관계 훼손 위험, 반미의식 고취위험이 있음”이라고 사유를 밝혔다(딴지일보, 2003). 실제로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태극기’가 주한미군사령관 부인 ‘성조기’와 관계를 맺으며 “양키 고 홈”, “퍼킹 아메리카”, “대∼한민국”이라는 대사를 연발하는데, 이는 다분히 문제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4)

영화 <깃발을 꽂으며>는 다분히 노골적인데, 그건 절대 이 영화가 에로틱해서가 아니다. 민족주의 혹은 반식민주의적 감정이 섹슈얼리티를 통해 의도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백마’와 ‘태극기’의 상징성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평상시 백마는 근대와 문명에 대한 심미적 동경물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에 전투적 상황을 개입시킨다. ‘백마’ 신화에 식민주의의 정치학이 강하게 내포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의 병기는 바로 ‘태극기’이다. 이 태극기를 꽂는다는 행위는 바로 ‘백마’를 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백마 신화에 얽혀 있는 식민지인의 민족주의적 지형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여성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언제나 거래물이었던 것처럼, 미국과의 신식민지적 상황에서도 거래물 내지는 보상물로서 재현된다. 즉 한국남성은 식민지인에 불과하지만 ― 주한미군에게 기지촌 여성이 성매매의 거래물로 재현된 것처럼 ― 백마로서의 미국여성은 말[馬]이 의미하는 대로 비인간의 존재이자 대상물이 된다.

그러나 한미관계에서 백마신화의 지형은 식민후기의 일본이 한국에게 여성화된 양식으로 재현되는 것과는 다소 다른 맥락에서 구성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일본의 국가-성별 이미지가 여성화되는 맥락은 양국간의 심리적 보상체계에서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지는 반면에, 백마의 신화는 미국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방향적이다. 단적으로 미국의 문화적 심리지리는 지정학적 권력 메커니즘에 따라 중국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여성화되기도 하지만5), 군사적으로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위계화된 남성적 위치를 고수한다. 결국 한국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백마의 신화는, 신식민지적 현실에서 고착화되어 있는 국가-성별 이미지에 대해, 스스로가 구축한 해결되지 않을 마술이자 주술이며 판타지에 불과한 셈이다.6)


(2) 인종차별과 성차별 ― 단순한 ‘백인 여성과의 만남’?

백마 신화가 구축하고 있는 문화적 맥락은 단순히 한국과 미국(혹은 서구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백마 신화는 그 담론 자체가 거론하고 있는 피부색이 지시하듯이, 한국 내의 인종주의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했던 성차별적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한국 여성에 대해 가시적으로 차별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한편, 노동력의 유입으로 이주해 온 유색인종에 대해서도 차별의 효과를 양산해낸다. 이 이중 삼중의 복잡한 지도를 담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예를 들어 보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백마’라는 키워드를 넣고 검색을 시도하면 관련 웹페이지 리스트와 함께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타난다. “‘백마’를 찾는 분들이 아래의 키워드도 검색하셨네요. 러시아 러시아걸 백인 서양녀 러시아여자 흑인 백마응원단.”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걸’이나 ‘흑인’과 같은 검색어가 ‘백마’를 검색했던 동일인에 의해 입력이 된 바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백마의 신화가 미국과의 신식민지적 관계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엎어버리는 얘기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미국과 러시아 혹은 백인과 흑인은 서로 대척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 간의 차이는 한국남성의 머릿속에 있는 스펙트럼 상의 위치에 기인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 스펙트럼은 위계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남성들은 여성들을 다루려고 한다는 사실이고, 거기에 덧붙여 라캉에 의지한다면, 인간은 자신이 욕망하고자 하는 대상에 도달하지 못할 때 이를 대체할 다르지만 유사한 기표들을 찾아다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훈이’처럼 백인 미국 여성을 다루지 못하는 한국남성들이 그에 대한 대체물로 러시아 여성이나 흑인을 찾았다는 해석은 타당할 수밖에 없다.7)

어쨌든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만한 커뮤니티가 있는데, 바로 ‘국제결혼-한인남성&백인여성’과 ‘백인 여성과의 만남’이라는 카페들이다. 회원수 3천여명에 달하는 카페 ‘국제결혼…’의 운영자는 아이디가 ‘Korean Power’인데, 그는 이곳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카페는 특수한 목적.취향(백인 여성 선호 또는 서양문화권의 여성) 을 가지신 분들을 위한 카페입니다. … 특수한 수요를 위한 카페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백인여성에 대한 태도를 ‘취향’ 심지어는 ‘수요’라고 거론하는 부분도 눈에 거슬리지만, 정작 문제는 이들에게 뿌리 깊이 자리 잡은 한국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맥락에서 운영자가 퍼온 글에는 한국여성들이


외국남자랑 사귀거나 결혼한 한국여성들을 보면 이런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1. 한국남자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 2. 외모에 대한 열등감 3. 음란한 직업으로 인해 혼사길이 막힘 4. 교만한 마음에서 출발한 과도한 엘리트의식 5.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 물론 5번의 ‘순수한 사랑’으로 결혼한 사람은 매우 극소수이며, 적어도 내가 듣거나 본 적은 없다 … 물론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자라나서 한국인과 융화를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세계적일지는 의문이다. (‘게시판’, 709번 게시물, “국제결혼을 하는 여성들은 위의 5가지 부류에 속한다”)


라고 한다. 이 외에도 한국 여성에 대해서는 백인 남성을 동경하는 태도를 어리석다며 문제 삼는 경우가 거의 지배적인데, 정작 자신들의 태도는 ‘건전한’ 취향이나 수요라며 가치중립화하는 부분은 비판이 따를 만한 소지가 다분하다. 만약 운영자의 아이디 ‘Korean Power’가 함축하는 것처럼, 한국 남성이 백인 여성과 교제하는 것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 ― 한국 여성의 경우는 정반대이고 ― 한다는 민족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 발상에 기인한 것이라면, 상황은 생각 외로 심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회원수가 6천여명을 상회하는 카페 ‘백인 여성과의 만남’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편견이 발견된다.


우리모두 인도. 파키스탄.나이지리아이들을 알고 삽시다 … 대부분의 그나란인종은 조잡하다못해 빈민가의 생활을 하다 어찌어찌해서 금수강산에 운좋게 발을드민 인간이 대부분이다 나이지리아 인간들은 자기네나라에서는 먹고살기가 넘 어려워서 풀칠을 할려고 온인간이거늘 금수강산의 여인들이 꾐에빠져 몸버리고 돈뺏기고 사는것을 보느라면 울화통이터진다 정신차려 이여자들아. (‘스페셜리포트’, 23번 게시물, “한국녀에게 고함”)

한국에 있는 흑인들은 미국애들 빼고 다 나이지리아 출신인가요? 흑인에 대해 특별히 편견갖고 싶진 않지만, 문제가 많네요. 특히 여자 이용해 해외 마약운반시키는건 정말 X네요. 모든 불체자는 법대로 처리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경찰은 너무 약해요. 몸도 법집행도.강해지길. (‘자유게시판’, 1224번 게시물, “나이지리아인 글보고..”)


이는 앞서 지적했던 국가-성별 이미지가 여성화되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앞의 카페 ‘국제결혼…’과 유사하게 이 카페 역시 한국 여성을 외국인에게 뺏긴다는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카페 ‘국제결혼…’이 2001년에 개설되어 현재에는 회원들의 활동이 거의 끊겼고, 2003년에 개설된 카페 ‘백인 여성과의 만남’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통해 백마 신화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 사이에 한국 여성들에 대한 경고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1년만 해도 한국 남성들이 백인 남성에게 박탈감을 느꼈다면, 이제는 그 대상이 유색인종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전에 보기 힘들었던 인종차별적 태도가 노골화되고 있다.

2001년에 보였던 백인 남성에 대한 경계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신식민지적 수탈에 대한 거부였다. 따라서 이들의 태도는 분노 외에 다른 감정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한국 여성에 대한 실망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거부감을 넘어 강한 공격성으로 전회하고 있다. 물론 여전한 것은 한국 여성에 대한 거부감이다. 실제로 최근의 통계를 보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약 40%가 재혼인데(한국염, 2004), 이러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모순적인 것은 한국 여성의 국제결혼 내지는 교제에 대해 거의 무차별적으로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4. 결론


이로써 한국 남성들의 백인 여성들에 대한 집착, 즉 백마 신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보이는 듯하다. 백마라는 기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근대성 성취를 의미하는 은유일까. 심미적이고 역사적인 콤플렉스일까. 혹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식민지인의 필연적인 모방 과정일까. 아니면 신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전복을 지향하는 것일까.

그 해답이 어떻든 백마의 신화는 기본적으로 현재 한국의 근대성 문제이라는 대명제 위에 놓여 있다. 거기에는 인종적 콤플렉스라는 심미적 특성과 더불어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심리적 특성도 맞물려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험 혹은 식민후기적 무의식 역시 백색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기는 데 크게 한몫했다. 식민지 근대성의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서구의 근대성은 매력적인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민지 근대성 초극의 문제는 예기치 않은 문제를 동반한다. 바로 식민주의적 무의식의 발동하면서 한국을 남성성으로 성별 이미지화하려는 심리적 계기들이 돌출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백마의 신화는 오늘날 한국 남성의 대표적인 판타지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면에서 백마는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상실한 전체에 대한 심리적 보상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문제는 여기에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의 불순한 욕망이 꿈틀댄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징후들을 보노라면, 식민체제의 극복이 거래물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까지는 극복하지 못하는 듯하다. 오히려 식민체제 극복의 주요한 보상물로서 여성을 거래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최근의 이주노동력 유입국으로서의 지위가 가져오는 식민주의적 무의식과 일부의 인종주의적 의식은 이산의 문제와 맞물려 혼종화 되어가는 한국의 문화적 현실에 부정적인 제약을 가져 올 우려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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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카페 ‘백인 여성과의 만남’, http://cafe.daum.net/meetwhite

- 다음 카페 ‘국제결혼-한인남성&백인여성’, http://cafe.daum.net/kmalewfem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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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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