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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부터 마련하는 '심층분석 문화월평'은 서울문화이론연구소의 한국문
화연구팀과 공동기획으로 연재합니다. l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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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연쇄폭동의 노동, 공공성 상실의 문화
김성윤 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cydemo@hotmail.com
버스 앞문이 열리자 한 청년이 차 안으로 뛰어든다. 버스기사의 안경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은 뒤 내리려던 청년이 다시 올라와 기사를 밀어 넘어뜨린다. 잠시 뒤 다른 청년까지 가세해 버스 유리창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린다. 정류장에 기다리던 자신들을 태우지도 않고 지나쳤다는 게 이유이다. 10여 분만에 청년들이 내린 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버스기사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버스를 출발시킨다.
그러나 채 1백미터도 못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옆으로 쓰러진다. 버스기사 66살 배 모씨는 병원에 옮겨졌지만 8시간만에 숨졌다. (5월 3일 YTN)
세가지 사건
20대 취객에게 폭행당한 버스 운전기사가 목숨을 잃은 데 이어 술 취한 승객이 버스기사와 시비 끝에 버스 창문을 깨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승객은 3일 오후 11시50분께 서울역에서 버스에 올라탄 뒤, 술에 취해 자리를 옮겨 다니다 운전기사인 박모(45)씨가 “위험하니 한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제지하자 이에 격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5월 4일 한국일보)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11일 버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버스 승차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택시를 타고 쫓아가 버스기사를 폭행한 이모(47)씨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10일 오후 10시께 술에 취한 채 시내버스에 타려다 승차를 거부당하자 택시를 타고 다음 정류장까지 약 1㎞를 쫓아가 버스를 가로막고 세운 뒤 버스기사 이모(50)씨를 폭행한 혐의다. (5월 11일 한국일보)
현대의 대도시 서울에서 버스는 매우 불안한 공간이다. 버스에서 우리는 사람과 사귄다. 임산부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도 하고 짝사랑해오던 이성과 마주치기도 한다. 반면 버스에서 우리는 사람과 단절한다. 시선은 타인의 눈을 피해 창밖 풍경을 향하고 청각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라디오를 향한다. 너로 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다리로서 버스는 너와 나를 분리하기도 한다. 버스는 종종 그렇게 본래 의도를 상실한 채 사회 전체에 압박을 가하는 역설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런 복잡함을 채 풀어내기도 전에 버스는 달리고 멈춰 서기를 반복하며 사람들을 토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민의 발이 시민에 의해 발길질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60대의 버스노동자가 승객에게 폭행을 당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렀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공공성이 실현되지 않는 위험사회에서 노동과 노동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시민의 발, 시민에게 발길질 당하다
사건들은 하나같이 어떤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승하차를 거부한 채 정류장을 지나치고 승객들에게 언짢은 말투를 내뱉는 버스기사, 그에 격분한 (술 취한) 승객, 그리고 이어지는 실랑이, 폭행…, 심하면 치사까지. 이 사건들에는 하나 같이 이성이 부재하고 분노만이 넘쳐난다. 작업 라인과 스케줄에 맞춰 버스기사는 도시의 랜드마크마다 차를 세우고 친절하게 승객을 모셔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승객 역시 노동시민의 본분에 따라 편하게 쉬는 사회적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노동의 공간, 버스에서 신성한 노동을 방기한다. 승객들을 보고도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거나 멋대로 노선을 바꾸어 운행하고, 버스기사를 폭행하면서 사회의 안전수칙을 무시해버린다. 도대체 왜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몰상식한 일들이 반복된단 말인가.
소외된 노동들의 충돌
이런 역설이 일어나는 것은 위험사회의 우리 대도시가 이들의 노동을 강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기사는 적어도 이중삼중의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기사는 일단 정류장마다 들러서 승객을 태우고 내려야 하는데, 예정된 도착시간까지 차고에 당도하려면 승객을 여유만만하게 기다릴 수만은 없는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게다가 사용자가 설치한 버스 위성장치는 앞차와의 배차간격이 조금이라도 떨어질까 버스기사를 계속해서 재촉해댄다.
따라서 버스노동자는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기왕이면 임금을 주는 사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동의 작업라인을 준수하는 쪽으로 선택을 내리게 된다. 게다가 서비스업이라는 명목 때문에 이러한 역설을 자기 내면에 감추고 승객들을 웃는 얼굴과 친절한 표정으로 대해야 하는 비범한 인격을 요구받고 있으니, 사정을 조금이라도 짐작하는 이라면 기가 찰 노릇이다.
버스에 설치된 CCTV나 위성장치 같은 것들은 원래 노동을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통제장치 탓에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임노동자로서 버스기사는 어쩔 수 없이 작업라인에 자기 신체를 내맡기게 되고, 버스노동의 본래 목적인 공공서비스는 상실되는 것이다. 즉 버스노동의 현실이 그 원래 목적을 상실한 채 노동 그 자체로 물신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버스기사 연쇄폭행사건에서 보이는 노동과 노동의 충돌은 얼핏 기사와 승객의 갈등으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수성 간의 충돌에서부터 예견된 셈이다.
이것이 어찌 버스노동자들만의 현실일까. 노동에 의해 소외된 채 살아가는 것은 현대의 도시인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승객들 역시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버스에 오르게 된다. 그것이 사회적 총노동량에 포함되지 않는 가사노동이든 학습노동이든 승객들 역시 노동에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승객들은 버스에 오르는 순간 고용자로 자기를 탈바꿈한다. 버스기사는 운수업체의 사장에게 사적으로 고용된 임노동자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에게는 공공요금으로 고용된 또다른 형태의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버스기사에 대한 승객들의 서비스 요구는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발길질’, 확대재생산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버스에서 승객들은 별다른 서비스를 향유하지 못한다. 오히려 버스노동으로부터 소외된 기사에게서 묘하게 앙갚음을 당하게 된다. 버스노동이 시작했던 사회적 폭력이 버스기사를 거쳐 승객에게로, 그리고 그것이 다시 승객의 ‘발길질’을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의 발단이나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구도 속에서 헤매이고 분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이렇게 패닉에 빠져든 사이에 버스노동자를 괴롭혔던 ‘몸통’은 증발해버리지 않았는가.
적어도 버스노동에 공공성의 요소가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이런 식의 역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우리 사회의 암울한 풍경 그 자체이다. 일상 전체가 노동 중심으로 구축된 디스토피아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번에 부각된 일련의 버스기사 폭행사건들을 두고 ‘버스기사를 보호해야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식의 고답적인 말들만 되풀이하고 있다. 어떤 얘기를 들어도 노동 현실의 모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것은 당사자인 버스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관련 단체들은 ‘운수근로자 근로기준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거나 자동차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을 고쳐 미국이나 일본처럼 운전석에 격벽을 설치하도록 입법청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은 모두들 노동을 제어하는 CCTV나 위성장치와 다를 게 없다. 그렇게들 한다고 해서 버스기사가 정류장을 통과하거나 승객에게 불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부조리가 극복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생각들은 사용자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를 신체적인 차원에서만 보호해주는 최소한의 대책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버스노동자가 운전대를 잡는 순간 어떤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왜 승객을 외면하고 자기의 노선에만 매달리는지 말이다. 지난 5월 버스에서 일어났던 연쇄 ‘발길질’의 주범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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