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을 즐거운 축제로, 혁명으로!

김성윤, 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cydem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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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려고 하는데, 방금 우리나라가 핀란드에게 2:0으로 이겼다. 올해 들어 필드골로는 한번도 이긴 경기를 해본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기에 더욱 값진 승리다. 특히 오늘 경기는 최근의 경기와는 다르게 매우 매끄러운 경기였다. 이대로라면 16강도 꿈은 아닐 것 같다.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게 되면 무지하게 기쁠 것이다. 기분 같아선 홀딱 옷을 벗고 길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기쁠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꼭 나 같은 사람을 이용해먹으려는 무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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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4년전, 88올림픽 때이다. 요사이 신세대 사이에 반미감정이 극에 달해 있다고 하는데, 올림픽 개막식날에도 비슷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온 국민이 올림픽을 위해 차량 홀짝제를 하는 등 꽤나 열성이었던 것을 다들 기억할 게다. 그런데 이 만반의 준비에 찬물을 끼얹은 놈들이 있었다. 바로 미국선수단이었다. 다른 나라 선수단들은 서울올림픽준비위원회의 요청을 잘 받들어 5열횡대의 '경직된' 자세로 무사히 입장했는데, 거의 마지막 순이었던 미국(United States) 애들이 종횡무진으로 경기장에 들어선 것이었다. 대개는 어깨를 움찔움찔하면서 걸어 들어왔고, 몇 명의 산만한 녀석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다. TV 중계를 하던 사회자와 해설자들은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건 방송을 보던 국민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신성한 올림픽에 먹칠을 하는 놈들이 있다니! 얌전치 못한 양키 놈들!
하지만 이 충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올림픽 때문에 긴장한 건 우리들 자신이었는데, 우리의 그런 자세를 축제에 찾아온 손님들에게마저 강요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다행히 대회가 막바지에 다할 무렵, 국민들의 긴장감도 잦아들었고 마침내 폐막식날에는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는 한바탕 축제다운 축제가 펼쳐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사람들은 저렇게 놀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공자님이 그랬던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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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의 경험을 다시 반복하려는 듯, 사람들이 다시 긴장하고 있다. 연일 TV와 신문은 월드컵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교시하고 있다. 친절하라, 웃어라, 질서를 지켜라, 청결하라. 유치원에서나 배웠을 것에 대해 요즘 다시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런데 TV나 신문이 가르치는 목적은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목적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유치원에선 인간이 되라고 했던 것 같은데, TV나 신문은 '교시'대로 해야 관광객들이 계속 찾아들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 돈이 될 것이라 한다. IMF때는 국민들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며 금을 걷더니, 이제는 국민들 모두가 날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 동네 부녀회에서는 대로변으로 피켓을 들고 나와 '공공질서를 지킵시다'라며 외치고 있다. 압권은 그 옆에 있는 피켓이다. 그 피켓에는 이렇게 써 있다. '월드컵 D-73일'.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옛말이야 어쨌든, 이제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들은 월드컵으로 통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월드컵이라는 기호가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국가와 자본은 이러한 국면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호출해내기 마련이다. 이때 이들의 전략이란 국가(혹은 민족)와 월드컵을, 경제와 월드컵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포츠 특히 축구에 민족주의가 동원되는 것과, 늘 경제적 수치가 따라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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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터넷의 축구동호회 사이트에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주된 내용은 국대(국가대표)간의 경기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르게 국가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각국 축구협회간의 대항전이라는 사실이었다. 논란의 시작은 우리나라 국대 유니폼에서 태극마크를 팔뚝 쪽으로 옮기고 가슴에는 축구협회 문양을 넣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김동성이 금메달을 놓친 뒤 태극기를 뿌리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듯이, 이 문제에 관해서도 유난히 태극마크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세례 받은 사람들이었겠지만, 이 논란은 오래지 않아 종식되었다. 실제 국대간 경기에서 자국의 국기를 유니폼에 달고 뛰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몇 나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무엇보다 국대간의 경기라는 것은 나라간의 경쟁이 아니라 축구협회간의 경쟁이라는 사실이 동호회 회원들 사이에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다. 프로리그의 경기가 클럽간의 대항전이듯이, 국제경기는 축구협회간의 대항전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국제축구경기를 마치 국운을 건 시합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활을 건다. 그것은 스포츠가 하나의 상징영역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시대 때 축구를 통해 일본을 이기게 되면, 일본은 순간 왜국으로 전락하고 식민지 조선은 어엿한 독립국가 조선이 된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러한 민족적 우월감을 축구와 스포츠는 그렇게 상상적으로 풀어주었던 것이다. 냉전시대 소련과 동독이 스포츠를 통해 엘리트 스포츠를 육성하면서 미국과 서독에 대응했듯이,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북한과 일본을 이기기 위해 엘리트 체육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가. 왜냐하면 스포츠에서 이기면 자국내의 국민들로 하여금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모든 체제에서 상대국가를 압도한다는 상상을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족'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은 단지 상상적 공동체일 뿐이다. 지배체제로서의 국가는 존재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가 없는 민족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개념이다. 한민족이란 단일민족도 아닐 뿐더러, 민족성이라는 말도 애시당초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민족 내부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들을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노동자가, 여성이, 장애우가, 동성애자가 민족이라는 틀에서 언제나 동등한 예우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절대로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상상하는 이유는 바로 국가 때문이다. 국가는 국민을 호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을 상상시킨다.
축구가 바로 이 자리에 있다. 월드컵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 월드컵은 축구의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국가적 이익과 결부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작동한다. 16강 이데올로기만 보더라도 그것은 '즐기는 축구'의 욕망을 지배하는 '이기는 축구'의 이데올로기이다. 16강에 오르면 민족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허위의식일 뿐이다. 또한 월드컵을 맞이하는 자세를 위해 범국민적으로 공공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등의 담론들 역시 사실은 지배질서를 지키자는 의도에 불과하다. 공공의 이익이란 사실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인 것이다. 민족이 추상적인 개념이듯, 공공 역시 추상이다. 오히려 이런 말이 성립된다. 민족의 위상이란 지배질서의 위상이며, 공공의 이익이란 지배질서의 이익일 뿐이다. '공공'이라는 말이 대중들의 자발적 욕망에 의해 발현된 것이 아니라, 캠페인이나 공익광고 등을 통해 유포된 담론이라면 더욱더 의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공익과 사익의 경계는 그렇게 애매하다.

4.
민족주의를 영어로 nationalism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동시에 국가주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월드컵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국가주의를 그리고 국가경제주의를 동반하기도 한다. 그래서 월드컵이라는 말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관광수입이니, 입장수입이니, 방송중계권료 수입이니 하는 것들이다. 올림픽도 마찬가지이지만, 월드컵 역시 그 규모가 커지면서 상업주의가 틈입해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조금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먹어치우는 괴물이라는 이 초국적 자본은 상업주의로부터 탈영토화하려는 축구광들을 다시 포섭해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항하는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우리들의 몫이다).
월드컵을 통해 국가 이미지가 제고되면 이후에 세계무역 경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커질 것이라고들 기대한다. 이런 식으로 월드컵의 맥락 전후에는 거대한 경제논리가 이미 자리를 잡아버렸다. 국가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사실은 지배의 이익이다!)을 노리는 논리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월드컵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통한 이득이 국민국가와 전체국민 모두의 이득인 것처럼 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담론이 주류로 자리하는 순간, 국민 모두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주류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당연히 지배의 이익을 위해 봉사를 하고 착취를 당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필요한 만큼의 사회적 노동이 투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5.
현대 사회를 사회적 공장 혹은 공장-사회라고도 한다.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제 수공업으로, 대공업으로, 그리고 사회적 공장으로 생산방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말은 생산의 컨베어벨트가 더 이상 공장안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는 설명이다. 생산라인이 공장의 바깥세상에까지 침투해나가 사람들의 노동은 24시간 계속된다. 일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쉰다는 행위도 내일 일어나 일터로 나가기 위한 휴식에 불과하다. 휴일에 쉬는 것 역시 평일에 일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다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위가 노동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다. 현대사회에서의 인간행위 모든 것은 결국 공장-사회의 유지를 위한 '죽은-노동'에 다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월드컵도 노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즐거운 산-노동인지 아니면 고된 죽은-노동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월드컵 체제를 통해서 모든 국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공장에 복무하는 노동자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만들어지는 이윤은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가. 재고할 가치조차 없다. 월드컵을 치루면 국가와 민족이 더욱더 뛰어난 집단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월드컵을 치루면 '대한민국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상기하자. 골드-러시에서 돈을 번 사람은 금을 캐러 서부로 갔던 사람이 아니라 이들에게 청바지를 팔고 곡괭이를 팔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인터넷에서 돈을 번 사람도 홈페이지를 만들고 멀티미디어를 제작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터넷 전용선을 깔아주고 컴퓨터를 팔았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6.
월드컵 조추첨 때에 왜 추첨자로 송혜교가 나와야 하는가. 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와 터키에게 각각 9골과 7골을 허용하며 한국 축구사의 한 획을 그었던 골키퍼 할아버지가 아니라, 소속팀을 두 번이나 UEFA컵 우승으로 이끌었던 분데스리가 최고의 외국인 용병 차범근이 아니라, 왜 송혜교가 축구잔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냐는 말이다. 이러한 것은 지배세력이 월드컵을 축구의 축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사업 혹은 이문이 크게 남는 장사로 보기 때문에 나오는 천민자본주의적 발상 탓이다. 경제정책이나 시스템의 조정을 통해 경제적 정의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이벤트를 통해 수지를 짜맞추려는 얄팍한 술책들뿐이다. 월드컵축구-국가-자본의 삼각구도에서 우리의 축구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의 문제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국가와 자본만이 남아버렸다. 월드컵을 통해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거기에서 경제적/정치적 이득을 가져간다. 또한 동시에 민족주의를 고양시킴으로써 다음번 이벤트에서도 이득을 챙기겠다는 심보, 결국은 이러한 생산양식을 재생산하겠다는 전략이 월드컵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 전선이다.
왜 우리는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외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관광을 다니고 우리 물건을 살 테니까? 전 세계 방방곡곡을 파고드는 방송중계료가 짭짤할 테니까? 이래저래 한국이라는 상품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까? 아니면 이 기회에 청결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질서의식을 함양하는 선진국 수준의 시민의식을 가질 수 있어서? 정답이 그런 데에 있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러한 답은 월드컵을 통해 자본과 국가라는 지배질서를 유지시킬 따름이다. 우리는 답을 고쳐 써야 한다. 월드컵을 일종의 정세라고 한다면, 이 정세를 어떻게 이용하고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7.
우리는 월드컵을 맞이하는 자세를 다시 잡아야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국가적/경제적 이득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너무 부담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즐겁게 축구하고 축구를 보고 그러면 된다. 괜히 긴장해서 피켓 들고 거리로 나갈 필요도 없고, '월드컵 때문에' 공공질서를 지킬 필요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평소에 했어야 하는 일들이다. 뜬금없이 '월드컵 디마이너스 몇 일'이라면서 들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월드컵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덩달아 부산할 필요는 절대 없다. 이 글의 제목 그대로 즐거운 혁명을 해야 한다.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월드컵을 통한 시민의식의 혁명은 쇼에 불과하다. '월드컵 D-00 쇼'.
월드컵 때문에 영어를 익히는 것은 연기에 불과하다. 월드컵 때문에 질서를 지키는 척 하는 것도 연기에 불과하다. 올림픽 폐막식이 되어서야 깨달았던 것처럼, 월드컵이 무슨 국가적 이벤트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중을 국민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호출-동원하는 이 쇼에 놀아나면 안된다. 마치 레이건이 방문하면 가두에 나와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거짓 웃음을 지었던 것처럼, 김대중이 방북했을 때 이북 주민들이 연두에 나와 열광하던 것처럼, 올림픽이 되자 온 몸이 경직된 채로 외국인들을 맞았던 것처럼, 연기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월드컵이 쇼가 아닌 축제가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민족과 국민이라는 호출을 거부해야 한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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