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와 문화, 그 이면
<겨울연가>와 <여친소>, 그리고 다시 이는 한류

김성윤
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요즘 연예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신문지상을 보면 연일 욘사마(배용준) 소식이 빠지지 않는다. 일본열도를 휩쓸고 있는 욘플루엔자를 보고 있노라면 3년전 기승이었던 한류 인플루엔자를 재삼 목격하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명동에 가면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욘사마 티셔츠를 파는 노점상들이 깔려 있다. 욘사마를 포함해 한국의 4대 천황 원빈, 장동건, 이병헌 등의 인기도 한창이라고 한다. 지우히메(최지우)에 이어 대장금의 용히메(이영애)도 곧 상륙할 거라고 하니 당분간은 일본 열도에서의 한류 스타 소식은 그치지 않을 듯하다.

아시아 전역을 달구는 한국 대중문화는 영화 쪽이야말로 뜨겁다. 홍콩발 금융자본의 돈줄로 제작되었다는 <여친소>의 경우는 대만과 홍콩 극장가를 점령한 것으로도 모자라 중국의 짝퉁 DVD 좌판에서조차 제일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다(물론 ‘다행히도’ 객석점유율보다는 스크린점유율만 높다). 일본에서는 <실미도>와 <태극기>에 이어 <스캔들>이 극장가를 사로잡았고, 연이어 개봉 예정인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가 관계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아시아와 문화, 혹은 아시아 문화

자, 이런 시류에 맞춰 잡은 이번 문화월평의 주제는 아시아다. 왜 아시아인가? 중화권과 동남아발 한류열풍이 회자되던 3년전 당시, 어떤 논자는 한류를 통해 우리가 아시아에 눈을 뜨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문화를 사유하고 기록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언급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아시아와 소통하고 교감하고 있다는 정말 소중한 지적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사는 사람 한명 한명이 국경을 넘어 보다 폭넓은 문화적 체험과 정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일이지 않은가.

아, 그런데 잠시. 지금 우리가 정말 아시아에 눈을 뜨고 있기는 한 건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시아를 둘러싸고 우리는 지금 두 가지의 ‘인지가능한’ 문화경험을 살아내고 있다. 하나는 한류 열풍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이다. 차라리 우리 쪽이 열풍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부산을 떨고 있는 한류가 우리를 아시아로 초대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행 쪽은 어떤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하는 기회가 보편화되면서 우리는 아시아를 어떤 식으로든 체험한다(같은 맥락에서 다른 아시아인이 우리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 나라의 경치, 음식, 전통예술, 건축양식 등을 두루 살피면서 우리의 견문은 국경선을 넘는다. 어느 인류학 책제목처럼 우리는 그렇게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난다.’

그런데 이제까지 주목하고 있는 아시아 경험이라는 것에 나는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국경을 넘어 문화경험의 폭을 넓힌다는 사실은 다른 문화와 충돌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충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준비돼야 할까. 사람이든 혹은 그 사람을 둘러싼 무언가가 충돌의 바로 그 지점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 사람의 이동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류열풍조차 대중문화를 다루는 자본이 이동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정은 여행 자체도 마찬가지여서 현금, 여행자수표, 신용카드 따위를 들고 시장에서 구매하는 행위로서 여행은 자본의 순수한 증식과정 중의 일부이다.

한류, 역류하다

불행하게도 우리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접하고 있는 아시아는 그다지 순수하지 못한 편에 있는 것 같다. 관광상품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되어 있는’ 아시아를 관람하고, 미디어에 의해 ‘걸러지고 과장 혹은 축소된’ 아시아 소식을 수신하는 행위는 안그래도 복잡 그 자체인 문화를 더욱 복마전으로 짜놓는다. 일부 개혁적인 문화주의자들이 그러한 경험을 ‘문화적 생산’이라고 말값을 높여놓더라도 구더기 잔뜩 드리워진 장독을 생각하자면 씁쓸함이 가시질 않는다. 고작해야 비백인 외국인 스타의 섹슈얼리티를 전유하는 여성 문화수용자, 가사노동을 거부하고 연하의 남자배우에 열광하는 중년의 여성주부, 지적재산권 판도를 어지럽히는 짜가 상인들, 문화상품 교류에 가교 역할을 하는 화교 보따리상 쁘띠 부르주아 등이 특이점이 되거나 희망의 원리가 된다. 적어도 아시아와 문화, 그리고 아시아 문화에 대해 지금처럼 소비를 기반으로 접근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불안요소와 제약조건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작금의 한류열풍이나 그에 상응하는 문화적 변동이라는 것은 사실 금융자본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의 이동이 야기한 부산물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 답해보자. 한국 드라마나 대중음악이 아시아인들에게 전달된 계기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케이블 채널이 다량 송신되면서 이를 채울 컨텐츠가 필요했을 뿐이다. 문제 많기로 소문난 <여친소>가 중화권 일대의 극장을 섭렵했던 까닭은? 영화 제작에 홍콩의 금융자본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는 좀 더 복잡한 길을 밟아야 할지 모른다. 나는 지금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선 한류를 통해 아시아 문화를 얘기한다면 오히려 이를 계기로 스크린쿼터 문제와 같이 우리네 전반적인 대중문화 현실 자체에 대해서 더욱 더 가치 있게 논의해야 한다. 가령 초국적 자본은 한국 감독에 의해 <여친소>를 제작케 했지만, 거기서 창출된 수익을 회수하는 한편, 더욱 심각하게는 각종 할리우드적 형식 기법을 통해 제3세계의 문화적 예외를 침공한다. 말하자면 경제는 물론이고 감각, 정서 모든 면에서 한류의 역류가 일어날 조짐이 존재하는 셈이다(그렇기에 마이너리티쿼터와 같은 문제는 보다 심도 깊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오래지만 새로운’ 토픽

그러면 지금 시점에서 아시아와 문화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하자는 말인가. 내가 하고 싶은 두번째 말은 문화접변과 충돌이 정말 감수성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지점들을 간파하자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알게 모르게 디아스포라(이산) 현상을 경험한다. 인지가 쉽지 않은 이 영역은 아시아와 문화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한류같은 것과는 언제나 따로국밥이었다. 그러나 이산의 경험으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국민국가 규모를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경험을 겪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3년전부터 우리를 들뜨게 했던 한류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는 조선족,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집단 이산을 통해 직접 살갗을 부대끼며 아시아를 체험해왔다.

물론 이 둘의 경로는 상반된다. 간단히 말해, 성격상 한류는 자본의 이동이고 디아스포라는 노동의 이동이다. 둘 다 문화라고는 하지만, 한류는 미디어를 기반으로 삼는 대중문화(mass culture)이고 디아스포라는 주민들의 삶에 뿌리를 둔 대중문화(popular culture)이다. 그런 면에서 매개(media)를 거치는 한류는 간접경험으로 아시아를 보게 하는 한편, 피부를 파고드는 디아스포라는 직접적으로 아시아를 정서화 한다.

아시아적 감수성

가만히 생각해보자. 명동에 가면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욘사마 티셔츠를 파는 귀여운 쁘띠 부르주아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시아의 문화교류, 즉 문화자본의 시장 확대라는 것은 미디어와 스타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다른 문화를 경험케 하는 사례에 불과하다. 이 판에서 아시아를 직접 경험하는 존재라고는 단지 그 위에서 국경을 왕복하는 연예기획사-방송사-음반사 등의 문화자본만이 있다. 이산의 경험과 같은 주제는 아시아적 문화연대를 상정하는 데 있어 일부분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매스미디어 문화에 대중들의 감수성을 가둬버리는 아시아 담론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이며 건강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행기 일등석에 앉아 아시아의 국경을 오가면서 아시아인들의 문화접변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계산기와 회계장부가 짜놓은 문화판에서 언제나 좋아하며 실실거리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시아는 분명 좋은 기회다.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적 차원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말이다.

문화라는 것이 좀더 긍정적으로는 초국적 질서 속에서 소외된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할 수 있다면, 아시아의 문화를 말해야 하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한류담론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비문화적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생산을 강조하면서도 초국적 질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비경제적(혹은 비인간적) 사유이다. 아시아인의 문화적 감수성은 지금 서로 단절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소외되고 억압받고 있다는 리얼리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김성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