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대학원신문 175호(2001년? 2002년?)
[문화기획] 잡종문화-① 잡종문화와 민족문화의 사이에서
혼종문화가 벌이는 두 판의 싸움
김성윤 / 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얼마전 신촌에서 패싸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는데, 더욱 더 우연치 않았던 것은 싸움의 당사자들이 바로 미군 녀석들과 동남아 출신 이주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일은 홍대 앞을 서서히 점령하고 있는 미군 녀석들과 일요일이면 대학로를 점령하는 필리피노들이, 그 중간 접점인 신촌에서 문화적 충돌을 빚어낸 사건이었다. 또한 우리의 의식적 식민모국 미국 사람과 우리의 무의식적 피식민지 동남아 사람이 싸움을 벌인 상징적인 갈등이기도 했다.
어쨌건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것이 이제는 ‘우리’라고 하는 상상적 공동체와는 무관하게 진행될 정도로 급격한 복마전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군들이 운집한 기지촌, 연변 조선족들이 거쳐가는 가리봉동, 이주노동자들이 산재해 있는 수도권의 영세공단과 농장들, 화교들의 게토로서 오래도록 존재해 온 인천의 차이나타운, 신세대 미군들이 새로운 취향에 따라 재결집하고 있는 홍대 앞, 소수의 혜택 받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거주하는 종로의 프레이저 스위츠(Fraser Suites), 카톨릭 필리피노들이 결집하면서 점거한 대학로 거리…. 우리의 문화적 일상은 이미 혼종화되어 있다.
혼종은 문화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 혼종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한말 서양의 근대문물이 야기한 충격과 공포의 경험은 우리에게 혼종화의 시작으로 여겨질 만하다. 신체를 과도하게 움직이는 감수성이 전혀 없었던 양반들의 육체는 체조와 스포츠로 탈코드화되고, 하얀 화장에 뾰족 구두를 신은 모던-걸과 모던-보이 역시 식민본국을 흉내 내면서 우리의 문화는 혼종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지야 백화점이 세워지고 경성역이 들어서면서, 풍수지리와 유교적 이념으로 배치되었던 한양의 공간도 상품의 물신성과 황홀경(fascination)을 새로운 지배소로 삼으며 재배치되었다.
요즘의 문화의 혼종화 경향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개발독재시기와 90년대 초반을 아우르면서 우리는 식민모국(미국)의 문물을 끊임없이 내면화하고 체화해왔다. 그러다 마침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하면서,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그에 상응하여 노동의 이동 또한 잦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달리 말해 이산(diaspora)의 경험과 타자와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있는 것이다.
혼종문화를 대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첫째는 문화적 혼종성을 거부하고 순수혈통을 고집하는 민족주의와 맞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문화를 지키겠다는 것 만큼 허구적인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왜냐하면 (민족‘문화’도 물론이거니와) 문화라는 것에는 이미 ‘혼종성’이라는 요소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혼종문화’라는 말 자체가 동어반복일지 모를 정도로, 문화에는 여러 의미들이 뒤섞여 있다. 가령 ‘엄정화’라는 코드에는 섹스를 탐닉하는 군바리들의 욕망만이 흐르는 게 아니라, 성적 섹슈얼리티를 확장시키려는 게이 여성들의 욕망 역시 존재한다. 문화라는 복합텍스트에는 애초에 수많은 의미들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문화의 어떤 고유한 특질을 지켜내겠다는 이념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일지 모른다. 게다가 민족 자체가 근대가 만들어낸 ‘상상적 공동체’임이 폭로된 이상, 민족문화론이 가질 수 있는 위험 부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대중을 동원하는 파시즘적 호명 테제로 작동하면서, 성차나 계급 등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담론이 아니던가. 민족문화와 같은 전략이 요즘과 같은 식민-후기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탈식민주의 논자들이 내놓는 흉내내기, 혼종성, 차이 등의 전략은 주목할 만한 의제가 될 것이다.
혼종문화의 양가성
혼종문화를 얘기할 때 부딪히는 또다른 벽은, 문화의 혼종화로 인해 더욱 촉진될 우려가 있는 신자유주의와 지구제국이다. 특히 혼종성 담론이 종종 동반하는 욕망의 긍정은 자본의 자기 가치 증식과 직결되기도 한다. 혼종화가 그 효과로 차이의 전략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이산하는 초국적 자본에게로 재영토화되기 마련이다. 욕망과 감수성의 일시적인 해방은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로 식민-후기적 상황을 타개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일국의 정부는 물론, 초국적 자본마저도 탈중심화와 혼종성을 곧잘 긍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지배질서 역시 다중(multitude)의 욕망과 문화의 혼종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종성을 의제로 삼는 탈식민주의는 묘한 딜레마에 부딪힌 셈이다. 자신의 주장이 거대한 자본-기계, 화폐-기계에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등 각종 주류 경제학이 행하고 있는 연구들을 보라. 표면상 이들은 들뢰즈와 푸코의 열렬한 지지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탈식민주의 담론의 전략이 묘하게도, 현재의 제국적 판도와 같은 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대변되는 제국적 흐름에서는 분명 제국주의와는 다른, 탈근대주의와 탈식민주의를 아우르는 힘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탈식민주의 역시 화폐-기계에 예속된 담론에 불과할 뿐이다. 혼종성/이동성/다양성 등은 ‘세계 시장 이데올로기’의 구미를 당기는 잔칫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혼종문화가 가지는 양가성에 눈을 떠야 한다. 민족주의와 지구제국에 동시에 대응해야 하는 두 가지 싸움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아주 곤란한 문제일 수 있다. 혼종성을 추진하려고 해도 일차적으로는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가 있고, 혹 민족을 넘어 혼종을 긍정하게 되더라도 신자유주의와 제국의 흐름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에서는 분단이라는 특수성 덕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효용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중 삼중으로 모순이 겹쳐 있는 셈이다. 민족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국에 무작정 동참할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관건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국가나 자본에 일방적으로 종속되거나 호명되지 않게끔 할 것인가, 또 동시에 신자유주의와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역능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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