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P. Appelbaum and William I. Robinson(eds), Ch.26, in Critical Globalization Studies, Routledge, 2005

김성윤/ 2006년 10월 2일/

26장. 세계화와 그로테스크

- Lauren Langman and Karen Halnon


◎ 세계화, 지배, 헤게모니

-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기꺼이 묵인’하는 것일까?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는 글로벌화된 ‘문화산업.’ ‘각축적 영토’로서의 문화. 특히 소비주의의 한 장르로서 세계의 ‘카니발화.’ 현재적 세계화는 그 자체로 이윤이 되고 재생산하는 고유의 반문화를 조성한다.


◎ 카니발과 그로테스크 - 한계

- 모든 사회구조는 일탈을 향한 특정한 압박을 유발한다. 뒤르켐이 시사하듯, 일탈은 미덕을 수호하기 위해 필연적이다. 그러한 한계는 긴장과 모순을 전위시키고 따라서 지배적인 사회는 재생산된다. 상품으로서 한계성의 생산은 글로벌화된 사회 질서를 재생산한다.

- 한계로서의 카니발 문화 -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된 저항 그리고 지주와 성직자에 대한 비굴이라는 영역으로서의 카니발은 역겹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을 찬미한다. 웃음은 엘리트에 대한 힐난을 상징한다. 그러나 희망과 자유를 제공하더라도 초월적인 카니발은 문화적 저항의 형식으로서 정치행동을 대신하는 것이었고, 토지소유 왕조가 성직자 엘리트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구조적인 배열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 그로테스크 - 체계의 진실을 말하는 자유의 영역. 카니발의 웃음은 권위 감소의 물질화. 따라서 웃음은 집합적인 포용(comprehension)과 풍자의 공유된 확언을 상징화한다.

- 카니발 브라질 - 카니발이 베네치아에서 브라질로 건너오면서 대중들(the masses)에 의해 빠르게 전유됨. 연행자와 구경꾼의 경계가 흐려짐. 이 아이러니한 전도와 감각적인 탐닉의 한계적인 반구조화(antistructures)의 다의계(polysemic)에서, 모든 이들이 좋은 시간을 보낸다. 카니발은 그로테스크에 대해 그리고 찬양과 권위와 가부장적 젠더 규범에 대항하는 초월과 파면에 대해 찬미한다. 그 해의 수삼일 동안, 빈민, 피지배자, 피착취여성 등은 행위자와 존엄성의 ‘캡슐화된 영역’을 발견한다. 이날 동안 브라질의 빈민들은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보다 자유롭고 개별적으로 살아간다. 실제로, 카니발의 맥락에서 행위자의 초월적 영역으로서 섹슈얼리티와 공격성은 자아에 권능을 부여한다.


◎ 카니발과 그로테스크 - 상품으로서의 카니발

- 리오 카니발은 수년 동안 변형되어왔다. 대중적 축제라기보다는 엘리트들의 찬양이며, 이제는 제트 여객기를 충당하는 글로벌 여객주의의 회로 안에 있는 상품이다.


◎ 초월적 경험의 다양성 - 그로테스크의 하위문화

- 그로테스크는 정치적 제어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다른 것들을 금지하도록 하는 대중매체의 하위문화적 실천과 표현의 다양성 속에서 볼 수 있다.

- 신체 변형과 도시 원시인 - 문신, 피어싱, 흉터(scarification)와 정체성의 장식으로서의 신체 변형(원시사회에서 널리 행해진 것들). 대안적 하위집단 내의 멤버십과 지배사회에서의 차별의 지표로서 사용됨. 주류로부터의 초월. 현재적 세계화를 전도하는 전근대적인 낭만적 진정성을 교화하고자 하는 행위자들의 글로벌화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

- 펑크족, 고트족, 대량-매개된 그로테스크, 프로레슬링, 쇼크 뮤직, 쇼크 TV, 변태쇼, (비)리얼리티 TV


◎ 결론

-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형식의 자본주의는 불평등, 궁핍화, 소외를 더욱 양산한다. 그러나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의식을 식민화하고 사람들은 지배에 ‘묵인’한다. 21세기의 대부분 동안, 자본의 헤게모니는 민족주의와 소비주의에 의해 유지되었다. 우리의 분석이 카니발화에 의해 달래지는 냉소주의나 니힐리즘으로 쉽게 봉착될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이 육중한 대안적 세계화 운동을 촉진하고 있음을 주지하고 있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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