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제임슨, 강내희 역, 「포스트모더니즘 ―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정정호?강내희 편, 『포스트모더니즘론』, 문화과학사, 1996[1989], 139~202쪽

김성윤/ 2006년 7월 4일



재현체계의 변동과 ‘인식적 지도그리기’


1. 미학적 대중주의가 발흥하고 있는 오늘날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부르는 데 무리가 따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적 우세종’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세종’이란 것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일련의 여러 특징들이 그 우세종과는 아주 다르지만 실제로 존재하며 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개념이다.”(143) 이것은 이 시대에 포스트모더니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흐름도 엄존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우세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자 하는 개념이다. 알튀세르식의 과잉결정 개념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사유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화적 충동들이 뚫고 나아가야 하는 힘의 장”(146)으로서 문화를 사고하게 한다.


2. 한편으로는 이러한 추세가 특정한 역사에 의해 산출된 것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에 퍼진 미국적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세계 전반에 걸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배라는 아주 새로운 물결의 내부적?상부구조적 표현이라는 점”(145)이다.


3. 고호의 「농사꾼의 신발」과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에서 비교되듯이, 본격 모더니즘 시대에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오면서 이제는 “텍스트나 환영이 된 대상세계 자체와 주체의 기질 속에 생겨난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문제”(151)에 눈을 돌리게 된다. 가장 뚜렷한 추세가 바로 ‘정서의 퇴조’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주체가 소멸된 것에서 그 근원을 따질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표현’이란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해석학적 모델, 변증법적 모델, 프로이트적 모델, 실존주의적 모델, 기호학적 대립 등의 심층 모델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153~154). 아울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표현과 느낌 또는 감정에 대하여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는 옛날의 주체중심의 더 낡은 아노미로부터의 해방은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느낌으로부터도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감정을 느낄 자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56).” 주체의 소멸과 ‘행복감’이 공존하고 있는 역설인 셈이다.


4. 표현 자체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손쉽게도 기존에 있던 것을 활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격 모더니즘적 스타일에 대한 이념이 무너짐으로써 문화생산자들은 과거 이외에는 아무 데도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159) 그로 인해 드보르의 스펙터클과 플라톤의 시뮬라크룸이 넘쳐날 뿐인데, 이로써 “환영의 문화가 태어나”고 “먼지에 쌓인 구경거리에 불과한 모든 역사”가 동원되기 이른다(159~160). ‘향수’라는 용어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현재와 바로 직전의 과거, 또는 개인의 실존적 기억을 벗어나는 보다 먼 과거의 역사(161)”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5. 이것은 재현체계의 변화를 암시한다. 이제는 더 이상 옛날식 ‘재현’이 아니라 양식에 의한 함축으로 나아간다(161, 강조는 발제자). 이제는 내용을 재현하는 데 초점이 있지 않다. 이제는 “미학적 양식의 역사가 ‘실제’ 역사를 대체(162)”한다. 그렇다면 실제의 역사는 어떻게 남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이전의 역사 지식을 어떻게든 동원하기 마련이다. (중략)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교리의 사전 간섭 없이는 재현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165~166). 제임슨은 이를 두고 딜레마이자 징후라고 하는데, 따라서 이제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에서처럼 우리가 과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정신적 이미지들을 그 감금의 벽 위에서 추적해야 한다.”(167) 만약에 우리가 의미사슬이 와해되고 지시대상이 묘연한 세상에서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수행해야 한다면, 이 변화된 재현체계를 통해서 그 흔적을 따라가야만 할 것이다.


6. 역사성의 이러한 위기는 라캉이 말한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68~169). 이와 같은 의미체계의 와해를 통해 “현재는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의 생생함, 압도하는 지각의 물성을 가지고 주체를 갑자기 빨아들여 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물질적인 기표가 고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이 생생히 드러난다.”(170~171, 강조는 발제자) 여기서 제임슨이 가지는 문제의식이 더욱 심화되는데, 왜 이런 것들이 “병적인 내용과 필연적인 관계를 갖지 않게 되고 보다 즐거운 집착들, 옛날의 불안과 소외와 같은 정서들을 대체하는 행복감과 같은 집착에 응용되는가 하는 것(173)”이다. 벤야민식으로 모든 게 늘 새롭고 이상적인 것이어서 우울에 빠진 것이 본격 모더니즘이었다면, 역으로 왜 이제는 우울 자체가 새롭고 이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7.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제임슨은 전체작품과 개별화면의 모순으로 특징화되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의 예를 통해, 현재의 대중들이 “근본적 차이를 생생히 지각함으로써 이전에 관계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새로운 파악 양식을 어떻게든 획득할 수 있도록 요청(175~176)”받게 되는 상황을 지적한다. 즉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추론해본다면, 대중들에게 한시적인 ‘지각’이 주어짐으로 인해 행복감과 같은 정서가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러한 정서는 대중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온전히 ‘파악’(획득)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불충분하고 근본적으로는 우울한 것이다. 또 다른 대답은 바로 ‘숭고’ 개념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앞서 추론했던 것과는 다소 상반된 것인데, “인간의 마음이 그와 같은 거대한 세력들을 제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문제(177)”에서 숭고미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제임슨에게 이러한 숭고는 다분히 히스테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8. 숭고 개념이 창안되던 당시 그 대상이 자연이었다면, 자연 자체가 상실되어가는 현재에 그 대상은 그 지시방향이 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임슨은 여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놓는다. 그는 만델의 시대구분을 따라, 시장 자본주의?독점단계의 제국주의?오늘날의 다국적 자본주의를 분류하면서 여기에 상응하여 각 시기별로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문화적 시대 역시 구분되는 것으로 파악한다(179). 특기할 만한 것은 기술의 역할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의한 표상으로서 기술은 예술적 재현양식을 반영해왔는데, 오늘날 그 관계는 예전의 미래파처럼 기술의 내용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양식을 재현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이것은 “모방적인 우상숭배와는 전혀 다른 미학적 재현능력을 요구(180)”하는 것이다.


9. 제임슨은 이를 두고 오늘날의 세계체제에 따른 것으로 풀이한다. “우리 마음과 상상력이 쉽게 파악해 낼 수 없는 권력망과 통제망,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탈중심적 제3단계 자본의 전지구적망(181)”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인식적 지도그리기’ 미학의 최종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도시공간을 통한 사회공간적 규제양식의 변화에 착목하면서(예. 르 코르뷔제에서 포트먼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초공간’이 비로소 “개별 인간의 몸이 스스로의 위치를 찾고, 가까운 주변을 제대로 체계화하고, 또 그 위치를 외부세계 속에서 인지할 수 있게끔 지도로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하는 데 성공했다(188)”고 판정내린다. “우리들이 개별 주체로서 빠져 있는 전세계적이고 다국적이며 탈중심적인 거대한 통신망의 지도를 그릴 수 없는 우리들 내부의 무능력을 가리킨다(188)”는 것이다.


10. 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적 현상이라면(191)”, “우리의 현재 시간을 역사 속에서 진짜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려는 시도(190, 강조는 발제자)”를 해야 할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발전을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 생각(191)”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제임슨은 후기 자본주의에 의해 문화의 반자율성이 내파되었지만, 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모든 것이 ‘문화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193). 그러나 이것은 모든 ‘비판적 거리’를 소멸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무장해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기에,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체제적으로 확장되어가고 있기에, 변증법적인 전략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절실해진다.


11. 여기서 제임슨은 모더니즘(브레히트)의 ‘정치적 예술’과 리얼리즘(루카치)의 ‘문화의 인식적 교육’ 차원들을 지양하면서, 잠정적으로 “인식적 지도 만들기의 미학(196)”을 상정한다. 이것은 “장소감을 실제로 다시 획득하는 것과 선택가능한 이동 궤적을 따라 개별 주체가 지도를 그릴 수 있는 하나의 분명한 총체를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것”으로서, “재현을 더욱 고차적이고 훨씬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 새로이 분석하게끔”하는 것이다(197). 그리고 그 실효적인 방안으로 “실제 경험에 얻어진 자료들(주체의 실제 위치)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추상적 개념의 지리적 총체 사이의 조정(198)”을 든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측량’할 것인가. 제임슨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라캉의 ‘상징계’ 개념을 빌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을 추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알튀세르-라캉 전선의 징후


1. 하버마스-푸코의 전선만큼 중요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잊혀져버린 전선이 알튀세르와 라캉에 관한 것이라 했을 때, 제임슨의 이 텍스트는 다분히 징후적이다. 제임슨은 적어도 소위 후기구조주의적 입장과 등을 지려 한다. 부단히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개입으로서의 정치’를 사전에 봉쇄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보이는 그의 태도는 가히 적대적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이유로 문화의 텍스트성에 대해 고민하는 출발점은 결국 구조를 끌어안으면서 주체가 어떻게 이로부터 벗어날까 하는 이중적 고민으로 귀결된다. 즉 “문화의 기능 문제에 관해 참다운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질문, “문화가 보다 명백하게 가진 ‘허위의 순간들’ 속에서 ‘진실의 순간’을 찾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위에서 제안한 역사발전에 대한 변증법적 시각 안에는 궁극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은가?”(192) 라는 것이 대두된다.


2. 제임슨이 의미 있는 비평가인 것은 자신의 이러한 문제틀을 의식 모델(동의와 교섭의 헤게모니 등)에 두지 않고 무의식 모델(즉 이데올로기와 상징체계)에 두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가 오늘날 문화 영역에서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던 ‘인식적 지도그리기’의 미학이 바로 이를 대변한다. 이 텍스트에서 그는 “문화적으로 우세한 것과 종속적인 것들을 변증법적으로 재구성”(174)하는 것을 문제의식으로 삼으면서, 최종적으로는 ‘인식적 지도그리기’의 미학을 그 답변으로 제출한다. 이러한 논의과정이 무의식 모델에 있다는 것은 포스트모던현상이 근본적으로 불가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기본전제 때문이다. 이 알 수 없는 문화현상을 어떻게 독해할 것인가. 아니 정확하게는, 지각(perception)할 수는 있지만, 파악(grasp)할 수 없는 포스트모던한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175~176). 따라서 주체와 세상이 마주하고 있는 테이블을 의식적인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가 따로 명시하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문제의식은 필연적으로 알튀세르와 라캉으로 타고 들어가야만 한다.


3. 이 텍스트를 징후적이라고 판단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프로이트적 견지에서 징후(혹은 증상)가 ‘억압된 것의 회귀’로 나타나듯, 알튀세르와 라캉에 대한 그의 언급은 뚜렷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무언가 응축된 형태로 새겨져 있다. 불가해한 사회문화적 복합텍스트에 대해 인식적 지도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라벨을 붙이는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그의 문화맑스주의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요청한다. 이 때 이데올로기의 토픽은 상투적인 실재와 허위의식의 대당에서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도식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포스트모던 현상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찬미하거나 몰이성적으로 비판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적 현상”(191)이라면, 이 문화 현상에 대해 다른 토픽으로써 접근해야만 한다. 그럴 때 귀착되는 지점이 바로 알튀세르와 라캉인 것이다.


4. 그는 여기서 라캉의 손을 들어준다. 그에 따르자면, 알튀세르 역시 “실존적 경험과 과학적 지식”이라는 이원론에 빠져 있으며, 반면 라캉은 그에 상응하는 ‘상상계’와 ‘실재계’에 더하여 ‘상징계’를 통해 삼중적인 토픽으로써 “재현적인 변증법을 최종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200). 징후적이란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일단 알튀세르에게 상징계에 상응하는 개념이 없었다는 오독은 차치하자. 중요한 것은 제임슨이 프로이트맑스주의적인 견지를 보이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이 바로 맑스주의자가 문화 영역에 진입했을 때 의식모델과 무의식모델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기로이다(하버마스-푸코의 전선, 혹은 그람시-알튀세르의 구도). 무의식 모델이란 현실적으로 프로이트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두 번째 기로는 여기서 그가 바로 라캉의 노선을 채택했다는 점이다(알튀세르-라캉의 전선).


5. 제임슨의 라캉 채택은 한 가지 의문을 품게 하는데, 왜 알튀세르에 대한 오독을 드러내면서까지(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를 택했단 말인가. 오히려 상징계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알튀세르 본인도 라캉을 전유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우선적으로는 여기에 일종의 편향과 같은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구조적으로 독해해야 하는 문학비평가의 입장이라면 그러한 편향은 이해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문제는 일단 괄호치더라도, 여기에 적어도 두 가지 절속적인 난점이 발생한다.


6. 첫째, 제임슨 자신이 텍스트 내내 견지해왔던(가령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만델의 자본주의 분석을 옹호했던) 사적유물론의 구도가 라캉적 비평이론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우선은 상징계의 잘 짜인 욕망 그래프 속에서 주체에게 제시될 수 있는 공간이 히스테리적이고 부산물에 가까운 잔여물의 형태로서만 주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거세된 목소리(voix)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전유하느냐는 그 다음 문제일 수 있겠지만(게다가 그런 전략을 쓴다면 결국 알튀세르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 ‘무의식적으로’ 거세된 잔여물을 통해서 과연 어떻게 ‘인식적인’ 지도를 그릴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로이트주의의 문제점은 사적유물론이 없다는 것이다.


7. 둘째, 따라서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열어둘 수 없는 위험성에 빠질 수 있다. 라캉의 욕망이론에 근거하자면, 상징체계 분석에 대한 그 용이성에도 불구하고, 그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실천전략은 엄밀히 말해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된다. 이것은 무의식 모델이 개인적 수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인데, 결국 집합적 수준에 대한 것과는 구조적으로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이론적으로 그런 유사성이 가능하다면 과연 그것은 실정적으로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가령 라캉식의 상징체계 분석 모델에 입각하여 문화적 텍스트를 분석했을 때, 그 개인적 차원은 어떻게 집합적 수준으로 총체화되어 연장될 수 있는가.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실천, 예컨대 거세된 목소리의 복원이 어떻게 집합적 수준으로 전화할 수 있는가. 게다가 그 목소리가 “기표들의 상호관계가 부서”지고 “의미사슬의 연결고리가 딱 부러져 버릴 때” 나타나는 “정신분열 증상”(169)이라면, 제임슨 자신은 이것을 유일한 정치전략으로 삼을 것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적대시했던 후기구조주의적 전략과 합류하는 것은 아닌가.


8. 물론 이러한 이론적 난점들이 당장 그에게, 그리고 이 텍스트에 국한하여 포화와 같이 집중되어선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러한 이론적 해결을 바라기에는 텍스트 자체가 징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비판적 독해는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분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어떤 정치적?이론적 실천을 사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분석만이라면, 문화연구의 각 비평가들과 그룹들이 보이는 경향은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를 게 있다면 유물론이냐 관념론이냐 라는 것. 그리고 유물론적 문화론이라면, 맑스주의냐 비맑스주의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문화적 실천에 전제를 두고 있다면 그 지형은 더 복잡해진다. 그런 점에서 제임슨의 텍스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징후적 특성은 문화연구의 무의식 모델이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문제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CCCS는 의식모델로 과잉결정되면서 이 문제를 피해버렸다).


9. 문화영역이 대중의 감수성을 다루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합리적인 속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계기들을 전제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서를 합리적으로 성립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화 아닌 것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 즉 문화가 내파하면서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 최초로 문화적으로 된 세상을 살면서(193), 우리는 또한 비합리적인 것들이 외파되어 있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정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계기들이 넘쳐나는 현실인 것이다. 제임슨의 텍스트가 매력적인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태를 적실히 분석했다는 데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인식적 지도그리기’ 개념을 통해 문화가 가진 상징체계 분석과 비판 그리고 개입의 국면을 열어뒀다는 데에도 그 의미가 있다. 게다가 정말 놀랍게도, 이 ‘인식적 지도’에 대해 앞으로 문화연구에 있을 쟁점들을 징후적으로 응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사실 이 텍스트가 하나의 ‘지도’이듯 말이다.

Posted by 김성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