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케 보이(Che Vuoi)?」,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김성윤/ 2006년 6월 5일


정체성


◎ 이데올로기의 누빔점

― ‘누빔’은 총체화를 수행하며, 이 과정을 통해 자유롭게 부유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들을 고정시키게 한다. 라클라우/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론.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이론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전통적인 헤게모니 개념에 따르면, 어떤 특정 투쟁은 다른 모든 것들의 진리로서 간주되고,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투쟁들은 그것에 대한 한 가지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그 투쟁에서의 승리는 다른 투쟁들의 승리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 우리는 어떻게 본질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고 어떤 특정 영역의 결정적인 역할을 공식화할 수 있을까?


◎ 기술주의 대 반기술주의

― 어떻게 이름이 그것에 의해 표기된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탁자’라는 단어가 탁자를 지시할 수 있는 것일까? 기술주의자의 대답. 그것은 그 단어의 의미 때문이라는 것. 반기술주의자의 대답. 단어가 대상이나 대상의 집합에 연결되는 것은 ‘최초의 명명행위’를 통해서라는 것.

― 문제는 바로 이들 기술주의자와 반기술주의자가 모두 지시기능의 일반 이론을 겨냥한다는 사실이다. ‘금’과 ‘유니콘’의 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욕망 성취’의 문제이다. [현실의 것들은 언제나 불만족스럽다는 것. 기표와 기의는 미끄러진다는 것.]


◎ 두 개의 신화

― 기술주의와 반기술주의 모두 명명행위의 근본적인 우연성을 간과하고 있다. 각각의 이름이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그 이름의 의미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이것이 그것의 이름이기 때문이며, 타인들이 이 이름을 문제의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들’은 단순히 경험적인 타인들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라캉의 ‘큰 타자’를, 상징적인 질서 자체를 지시한다. 이름이 대상을 지시한다면, 이는 그 대상이 그렇게 불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반기술주의의 기본 문제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한에서의 이름, 즉 ‘고정적 지시자(rigid designator)’의 객관적 상관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반기술주의 표준 판본에서 간과되고 있는 점은 대상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명명행위 자체의 소급적인 효과라는 사실이다. … 대상의 동일성을 지탱하는 것은 ‘잉여물’, ‘그것 안에 있는 그것 이상의 것’, 대상a … 반기술주의적인 관념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명명행위의 근본적인 우연성이다.


◎ 고정적 지시자와 대상 a

― 누빔점. 기표 자체의 수준에서 주어진 장을 통일시키고 그것의 동일성을 구성하는 단어. ‘실재적인 것’, 도달할 수 없는 X, 욕망의 대상-원인. 정확히 이러한 잉여-X 때문에 ‘누빔’의 작용은 순환적인-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이 잉여-X, 욕망의 대상-원인이다. 즉 ‘코가 안에 있는 코카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도달불가능한 무엇’.

― 그렇다면 ‘고정적 지시자’는 그 불가능한-실재적인 중핵, ‘대상 속에 있는 대상 이상의 것’, 의미화 작용에 의해 창출된 잉여를 지시한다. 그런데 우리가 파악해야 할 요점은 명명행위의 근본적인 우연성과 어떤 주어진 대상이 동일성을 획득하도록 만드는 ‘고정적 지시자’ 사이의 연관이다.


◎ 이데올로기적인 왜상(歪像)

― 누빔점의 근본적인 역설은 ‘고정적 지시자’는 기의의 환유적인 미끄러짐을 멈추게 함으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전체화한다. 그것의 역할은 순수하게 구조적이며 그 본성은 순수하게 수행적이다. ‘기의 없는 기표’.

― 따라서 고유하게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은 일종의 ‘착시’효과이다. 순수한 차이가 합리적-차별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면제되어 그것의 동질성을 보장할 수 있는 동일성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를 이데올로기적인 왜상(ideological anamorphosi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동일시, 그리고 동일시를 넘어서(네 가지 욕망 그래프)


◎ 그래프 I - 하단부 (p.178)

― 의미효과가 소급적으로 발생. △에서 화살표가 출발해서 정점에 이른 다음 왼쪽으로 하강, $로 도착한다. 이것이 주체의 의도의 벡터(△-$선). 또한 주체의 의도의 벡터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기표 연쇄의 벡터(S-S'선).

― 개인이 주체로서 호명되는 과정. 누빔점은 주체가 기표에 ‘꿰매어 지는’ 지점. 중요한 것은 주체의 의도의 벡터가 기표 연쇄의 벡터를 소급적인 방향으로 ‘누빈다’는 사실. △가 기표 연쇄의 누빔의 효과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 바로 분열된 주체, S/이다. 라캉의 강조점은 의미효과가 기표에 대해 소급적이라는 것. 의미효과는 항상 거꾸로 사후에(apres coup) 창출된다.


◎ 그래프 II - 하단부 (p.181)

― 의도(△)가 기표연쇄를 가로지르는 두 지점[그래프 I에서 의미와 의미효과를 발생시키는 누빔점]은 그래프 II에서 각각 s(A)와 A에 해당한다. 두 번째 그래프에서는 앞의 주체와 신화적 의도 △사이의 관계가 역전이 된다. 의미효과는 소급적으로 생성되지만, 주체에겐 그것이 자연적인 질서나 법칙으로 이해되기 때문(전이적인 환영).

― 분열된 주체 S/는 상상적 에고(m)가 관계 맺는 상상적 타인인 i(a)(이상적 자아)와의 상상적 동일시의 상태[거울단계 이론]에서 기표의 연쇄와 충돌. 큰 타자 A와 맞닥뜨리면서(누벼지면서) s(A), 즉 큰 타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큰 타자 A가 있는 위치가 바로 누빔점이다. s(A)의 의미효과를 통해 주체 S/는 I(A)(자아-이상)로, 즉 상징적 동일시에 이르게 된다.

― 또한 왜 기표의 벡터 오른쪽 마지막 부분에 ‘목소리’라고 적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기표작용, 즉 누빔에서 남은 대상적 찌꺼기. 의미를 생산한 다음의 기표는 그 자체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애초에 배제되었던 것. 이것의 구현이 향락의 질서를 예고?]


◎ 그래프 III - 상단부(p.195)

― 그래프 상단의 Che vuoi?라는 질문. 주체의 요구와 큰 타자의 요구가 일치할 수 없는데서 나오는 욕망, d. ‘너는 내게 그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겨냥하는 것인가?’ 타자의 ‘케보이?’에 대해 주체는 오직 히스테리적인 질문으로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 ‘왜 나는 사람들이 가정하는 그것인가?’ ‘왜 나는 이런 위임을 맡게 되었는가?’ ‘왜 나는 …인가?’ 한 마디로 ‘왜 나는 당신(타자)이 나라고 말한 바가 되는 것일까?’

― 따라서 주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환상공식, 즉 S/a이다. 반유태주의의 예. 타자의 욕망을 알 수 없는 주체는, 타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타자의 매혹의 비밀인 대상a를 겨냥한다. 원래 대상a는 s의 A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의 상관물로 s에게 속해 있었던 것(i(a)), 즉 그것은 애초에 s가 A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한 그 무엇. 즉, 대상a는 A에게도 있는 그 무엇.

― 하지만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의 순환운동은 반드시 일정한 잔여물을 남긴다. 대상a가 A가 가지고 있는 매혹의 비밀인지는 사실 큰 타자인 A조차도 알 수 없다. a는, S/에게도, A에게도 매혹적인 비밀. ‘케보이?’


◎ 완성된 그래프 (p.212)

― 상징적으로 구축된 욕망의 벡터와 교차하는 향락이라는 새로운 벡터의 추가. 하단부는 의미의 수준. 소급적인 의미생산에 기초한 주체의 상징적 동일시와 상상적 동일시. 상단부는 향락의 수준. 기표질서의 영역 자체, 즉 큰 타자의 영역 자체를 관통하는 상징계 이전의 향락의 (실재적인) 흐름. 육체는 거세에 종속되고, 향락은 육체에서 빠져나감.

― 기표의 질서(큰 타자)와 향락의 질서(향락의 구현이라 할 수 있는 사물)는 이질적이며 양립불가능. 둘의 불일치로 인해 타자 속의 결여에 대한 기표, 타자의 비일관성에 대한 기표인 S(A/)를 발견하게 된다. S/a는 S(A/)의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스크린 기능. s(A)는 환상에 의해 지배되는 ‘절대적인 의미작용’. [어쨌든 주체에게 없는 매혹적인 대상a는 실제로는 타자인 A에게도 없었던 것]

― 향락의 문제는? 향락을 배출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배출’은 결코 완벽하게 성취되지 않는다. 충동이 결착되어 있는 잔여물. 향락의 오아시스. 이 성감대들은 D(상징적인 요구). S/◇D는 향락이 스며들어있는 기표의 특수한 형성물, 다시 말해서 향락과 기표의 불가능한 접합이다. ‘증환’. 여기엔 상상적인 동일시 대신 환상(S/a)에 지탱되는 욕망 d가 있다. 환상의 기능은 타자의 구멍을 메우고 그 일관성을 은폐하는 것.

― 환상이 끝나면? 충동. 죽음 충동. ‘환상 너머’에는 어떤 동경이나 그와 비슷한 숭고한 현상이 전혀 없다.


◎ 사회적인 현상 ‘횡단하기’

― 그래프의 상단 부분 전체가 ‘호명 너머의’ 차원을 지칭. 항상 잔여물이 남아서 욕망의 공간을 열고 타자(상징적 질서)를 비일관적으로 만드는 것. 이에 따라 그 간극과 비일관성을 은폐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서의 환상 또한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 알튀세르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론들은 하단부에만 한정했다는 것. 동일시의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호명 너머의 부분’은 타자 속의 결여, 욕망, 환상,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잉여 향락 주위로 박동하는 충동 등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이다.

― 이데올로기 비판의 두 가지 상보적인 절차. ①담화적인 차원.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증상을 읽는 독법’.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을 해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이질적인 ‘부유하는 기표들’에 대해 어떤 ‘매듭’의 개입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②향락의 중핵을 추출. 환상 속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

―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유태인은 이에 대한 증상이다. 전치와 응축. 반유태주의. 적대의 근원을 왜곡. 증상이라 함은 코드화된 메시지?암호?사회적 적대의 왜곡된 표상 등을 의미한다. … 하지만 우리의 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환상은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횡단’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그것 뒤에 아무 것도 없는지를 체험하는 것뿐이다.

―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보는 통합주의적인 관점.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하나로 통합된 신체로서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통합주의적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간의 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사회적인 환상이란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바꿔 말해서 환상은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균열을 미리 고려해 넣는 방식이다. 파시즘에 있어 ‘유태인’은 파시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 내재적인 한계를 구현하는 것일 뿐. ‘유태인’은 사회적 적대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단지 사회가 하나의 완결되고 동질적인 전체로서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벽과 불가능성의 구현물일 뿐이다. 사회적인 부정성이 실제의 현존을 떠맡는 지점.

― 상징계(통합론적인 질서)로부터 배제된 것이 ‘유태인’이라는 편집증적인 구성의 모습으로 실재 속에서 되돌아온 것. 환상의 횡단과 증상과의 동일시. 우리는 ‘유태인’에 귀속된 속성들 속에서 우리의 사회체계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을 확인해야 한다. 유태인에게 귀속된 ‘과잉분’ 속에서 … ‘과잉분’이란 개념 때문에 라캉은 증상을 발명한 사람이 마르크스였다고 지적한 것. 체계가 개선되면 제거될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체계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인지를 입증해 주었다는 것. ‘증상과의 동일시’는 사태의 ‘정상적인’ 작동방식의 파열과 과잉분 속에서 진정한 메커니즘으로의 접근을 가능케 하는 열쇠를 확인하는 것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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