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분석론에 대한 보론...

김성윤/ 2006년 7월 17일

총체성의 지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1. 제임슨은 현재의 역사가 데카당스와 하이테크로 점철되어 있다고 본다. 부재하고 또한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려는 냄새와 같은 것으로서 데카당스는 “근대성의 경험이자 포스트모던적 징후”(Postmodernism ch. 9)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데카당이 보들레르를 비롯한 프랑스 퇴폐주의적 사조를 일컫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이 일정 부분 벤야민에게서 빚지고 있음을 추론해볼 수도 있다. 벤야민이 보들레르를 빌어 ‘우울과 이상’의 양가적 문명을 지적했다면, 제임슨 역시 ‘데카당스와 하이테크’로써 현재 역사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 데카당스가 부재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하이테크는 곳곳에 편재해 있는 것이며 또한 종교적인 형태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대와 탈근대를 아우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반응 역시 파편적인 형태로서 드러난다. 제임슨은 근본주의 역시 하나의 징후로 간주하는 한편, 데카당스/근본주의/하이테크가 절합적으로 존재하는 현대사회에 일종의 ‘대분리’(Great Divide)가 있다고 이해한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대분리’를 통해 맑스주의가 고안한 사적 유물론의 단계적 진화론을 {선언}에 기초하여 ‘단절’로서 재구성한다. 첫째는 원시사회와 이후 생산양식 사이의 단절이며, 둘째는 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단절이며(이로써 끝없는 팽창이 성취됨), 셋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단절(전자본주의 구성체를 새 방식으로 재창안)이다.


3. 후기 맑스주의자로서 그의 이러한 견해와 재해석은 다분히 정치적인 전략으로서 이해된다. 그의 ‘문화적 지배소’ 개념에 근거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라는 것은 하나의 뚜렷한 데카당스적 징후로서 과잉결정된 것이고, 이것은 결국 현대의 대분리,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단절이라는 거대한 국면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물론 현대사회가 그렇게 자기의 약한 고리를 쉽사리 노출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단순히 그러한 징후와 증상으로써 ‘질병’의 근원을 해석하고 치유하기에는 기호학적 사슬 자체가 너무나 촘촘하기 때문이다. 제임슨이 탈구조주의적 견해들에 대해서 회의했던 맥락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이론적 담론의 생산이란 약호변환(transcoding)의 형태로서 제기될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필사(筆寫)적인 반복의 굴레이다.


5. 그럼에도, 지젝의 지적처럼, 그는 섣불리 리요타르식의 ‘거대서사의 종말’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제임슨의 견해대로라면, 그러한 ‘선언’이야말로 오히려 데카당스적인 징후에 불과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총체성을 둘러싼 전쟁’(war on totality)이 엄존함을 선포한다. 그것은 역시 생산양식 개념의 여전한 유효성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자본의 축적양식과 예술의 재현양식 사이에는 어떤 주고받음이 있는가. 이러한 생산양식 개념은 사회문화적인 재현체계와 조응하는 구조적 인과성을 창출할 것이라는 제임슨 자신의 대전제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이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의 의식 차원을 넘어서는 그 어떠한 것에 관한 문제설정이다.


6. 전략1: 그는 총체성의 지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Postmodernism에서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한다(ch. 11). 첫째는 동종요법적인 전략이다. 가령 이미지로써 이미지 무너뜨리기. 둘째는 인식적 지도그리기 전략이다. 이에 대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 ―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프레드릭 제임슨, 강내희 역)]에 대한 노트를 참조할 것.


7. 전략2: 총체성의 지도그리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무의식}에서이다. 그는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의 변증법’을 발견한다. 이들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각각의 것을 체현하고 있는 형태로서 변증법적인 구도 속에 그려져 있다. 어떠한 유토피아적 제안이라도 거기에는 이데올로기적 계기들(라캉은 환영과 환상을 구분하기까지 했다)이 내재해 있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비판이라도 거기에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개입된다. 차라리 이것들은 동일한 것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문화분석이 기능주의와 도구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정치적 실천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분석(소극적 해석학)과 유토피아적 충동의 해독(적극적 해석학)을 동일성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통일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론이다.


8.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남긴 것인가. 이로써 우리는 총체성의 지도에 유토피아적 충동에 대한 적극적 해석이라는 계기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알튀세르가 했던 대로 프로이트가 출현하며, 지젝이 했던 대로 라캉이 출현한다. 심지어는 정신분석학이 해결할 수 없는,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 I}에서 맑스가 언급한 바 있는 교통(intercourse)의 문제설정으로까지 전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과의 절합프로젝트는 그 성격상 개인 수준에 근거해 있는 바, 맑스주의적 문화분석이 그 결을 따라간다면 자칫 계급의식과 역사주체의 복원이라는 전도된 형태가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9. 그리고 또 하나의 난점은 교통관계의 문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생산양식의 개념과 접붙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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