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가

김성윤/2006년 4월 10일/

◎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형식분석

― 맑스와 프로이트의 상품분석과 꿈분석의 상동관계는 ‘형식’에 있다(그 내용이 아님). 분석을 통해 내용의 비밀이 아닌 형식 그 자체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 형식 그 자체에서의 욕망 : 구조의 세 가지 요소(외현적인 꿈텍스트, 잠재적인 꿈내용, 무의식적인 욕망)의 관계에서 욕망은 꿈에 밀착되어 잠재적인 사고와 외현적인 텍스트 사이에 끼어 있다. 욕망은 잠재적인 사고와의 관계 속에서 ‘더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님. 따라서 욕망의 유일한 자리는 ‘꿈’의 형식 속에 있다. 꿈의 진정한 주제는 꿈작업 속에서, ‘잠재적인 내용’을 공들여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 그리고 나서, 꿈의 ‘숨겨진 의미’, 다시 말해 꿈형식 이면에 숨겨진 내용이 주는 현혹을 제거해야 함. 그리고 형식 자체, ‘잠재적 꿈사고’가 따르고 있는 꿈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

― 맑스의 ‘상품형식의 비밀’과의 일치점 : “가치량이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상품의 상대적인 가치의 현상적인 운동 이면에 숨겨진 비밀이다. 그 비밀을 캐냄으로써 상품가치의 크기가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듯한 외관은 모두 제거된다. ‘하지만’ 가치의 크기를 결정하는 양식은 결코 변질시킬 수 없다.” … 고전 정치경제학은 오직 상품형식 이면에 숨겨진 내용에만 관심을 갖는데, 중요한 것은 형식 이면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의 비밀이다. 가치의 크기의 비밀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냈음에도 여전히 상품은 (꿈과 마찬가지로) 고전 정치경제학에서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즉 숨겨진 의미가 그 형식으로 둔갑하는 ‘과정’만이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 상품형식의 무의식

― 상품의 이중적 추상화와 초월적 주체의 사유 형식 : ①상품의 교환 가능성으로부터 추상화가 일어나며, ②상품의 구체적/경험적/감각적/특수한 특성으로부터 추상화가 일어남. 화폐의 초월적인 작용은…네트워크의 토대인 초월적인 주체는 자신이 형식적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어떤 내면세계의 ‘병리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여기에서 현실이란 ‘마치 ~인 듯이(als ob)’이라는 가정의 성격을 지닌다. … 화폐는 경험적이고 물질적인 재료가 아니라 숭고한 물질. 물리적인 신체의 부패 후에도 여전히 존속되는 ‘파괴불가능하고’ ‘변경불가능한’ 또 다른 육체에 관한 문제. 즉, 이러한 ‘현실추상화’는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형식이 된다.

― 무의식의 형식 : 따라서 무의식은 외적인 사유형식이다. 다시 말해 사유형식을 사전에 분절시키는, 사유에 대해 외적인 어떤 다른 무대인 것이다. 상징적 질서는 ‘외재적인’ 실제 현실과 주체의 ‘내재적인’ 경험 사이의 이중적인 관계를 보충하고/하거나 붕괴시키는 형식적 질서이다.(현실 추상화의 문제)

― ‘현실 추상화’와 이데올로기 : 교환의 사회종합적 기능, 이것이 바로 사적인 생산이 시장을 통해 사회화하는 형식으로서의 ‘현실 추상화’이다. 이에 대한 무지는 교환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 그리고 이러한 무지는 ‘실천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으로 분열시킨다. 아마도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차원이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그 본질에 대한 참여자들의 무지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이다. 주체는 모르는 한에서만 ‘자신의 증상을 즐길 수 있다.’


◎ 사회적 증상

― 맑스의 고안물로서의 ‘증상’ : 라캉에 의하면 맑스는 부르주아의 보편성과 모순되는 ‘병리적인’ 불균형·비대칭·균열 등을 탐색함으로써 ‘증상을 고안.’ 불균형 자체가 보편적인 원칙들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이자 그것의 토대를 뒤집는 요소. 이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맑스는 ‘증상적’.

― 이성 안의 비이성 : ‘양적’인 발전 자체, 상품생산의 보편화는 새로운 ‘특질’을 초래. 등가적 교환이라는 보편적 원칙의 내재적 부정으로서 새로운 상품이 출현. 즉, 증상은 보편적 이성 안에서 자신의 비이성을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다.


◎ 상품 물신

― 상품 물신의 해석 : 상품 물신주의는 구조화된 네트워크와 그 요소들 중의 하나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대한 어떤 오인(증상)에 근거. 즉, 질적으로 상이한 두 사물이 서로에 의해서만 동일한 가치로 표현되는 현상. 마치 처음부터 동일한 것처럼.

― 인간물신화에서 상품 물신으로 :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왕이 어떤 오인 안에서 마치 자연적 속성으로 왕인 것처럼 행동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그것을 상품으로 전이시킨다. ‘인간에서 사물로 이행’한 물신주의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인식하는 방식이 될 것. 이것은 여전히 억압된 지배와 예속관계를 말해주며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는 증상이 된다.


◎ 전체주의와 냉소주의

― 상품 물신에서 전체주의 이해로 : 상품 물신에 대한 변증법은 ‘전체주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 맑스는 자신의 상품 물신에 관한 분석 안에서 사물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입장을 내놓는다. 즉 등가물의 관계에 있는 사물간의 질적인 균열을 인간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 무의식적 행위들을 객관적인 과학으로 만들면서 현실의 허위적 구성을 모르게 됨.

― 증상의 변질 : 전체주의에 대한『장미의 이름』식의 냉소주의적 거리두기 전략조차도 게임의 일부. 역설. 우리가 증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바대로’ 보는 순간 그 존재는 무화되어 버린다.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현실로 변질된다.

― 알면서 행하는 냉소주의 : 냉소주의는 …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하고 있다.” 냉소주의 고전적 키니시즘의 전복에 대한 지배문화의 대답. 부도덕성에 봉사하는 도덕성. 일종의 도착된 ‘부정의 부정’.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근본 수준을, 이데올로기가 사회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수준을 그대로 남겨놓는다.


◎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 무의식적 환영과 이데올로기적 환상 : 부르주아적 개인들은 사회활동과 현실 속에서 물신주의적 환영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 상품 물신에 의해 전도되어 구체적인 내용(사용가치)이 추상적인 보편성(교환가치)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상의 현실적인 작동을 볼 수 있다. 즉, 부르주아적 개인들은 사물들 간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전도되어 개별 사물들이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따라서 환상(fantasy)은 우리의 현실을, 실제적인 현실관계를 구성하는 환영(illusion)을 간과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현실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과된 무의식적인 환영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행동하면서 환영을 쫓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것을 행한다.”


◎ 믿음의 객관성

― 외부에서의 작동 : 자본주의에서는 주체(카리스마적인 주인) 대신 사물(상품과 화폐) 자체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신비화는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인 관계’로 구현된다. 주체는 믿지 않는다. 대신 사물 자체가 그를 위해 믿는다. 이는 믿음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외적인 것이며, 사람들의 실생활의 실제 절차 속에 구현된다는 것을 말한다(우리의 웃음을 대신하는 시트콤의 웃음소리). 가장 내밀한 신앙들, 심지어는 가장 내밀한 감정들조차도 그 진정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전이되고 위임될 수 있다. 즉 믿음은 외부의 기계적 요소들의 작동이다.


◎ ‘법은 법이다’

― 믿음의 통제력 : 믿음은 사회적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그리고 믿음은 사회현실을 규제하는 환상을 지탱해준다. 관료주의는 전능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관료기계 앞에서 우리의 ‘실제’ 행동은 이미 그것이 전능하다는 믿음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마치 대통령이 국민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듯이, 정당이 노동자 계급의 객관적 이익을 대변해준다는 듯이). 그러한 믿음이 상실되는 순간 사회적인 장의 조직 자체는 와해된다.

― 법과 초자아 : 우리는 법이 이롭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외면적인(피상적인)’ 복종만이 진정한 복종인 반면, 확신에 의해 비롯된 복종은 진정한 복종이 아니다. 또한 이미 믿기 때문에 믿는 이유들을 찾는 것이지 그것의 역은 아니다. 따라서 법은 명령이 이해불가능하고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 그리고 외상(trauma)적이고 비합리적인 특징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법의 실정적인 조건 그 자체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초자아 개념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초자아는 외상적으로, 몰상식하게 경험되는 다시 말해서 주체의 상징적 세계 속에 통합될 수 없는 명령이다.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은 이러한 균열들에 있다.


◎ 알튀세르의 비판가, 카프카

― 이데올로기적 향락 : 상징적 기계의 외면성은 단순한 외면성이 아니다. 우리의 내적인 운명이 미리 무대화되고 결정되는 장소이다. 믿음은 종교적인 의례의 기계처럼 죽은 문자의 위상에 대한 복종이다. 거기엔 항상 내면화시킬 수 없는 오점과 잔여물이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잔여물은 외적 기계의 조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적인 향락이라 부를 수 있는 일종의 잉여이다. 카프카의 관료제는 정확히 몰상식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카프카의 주체는 신비스러운 관료(법, 성)에 의해 호명된다. 그 주체는 필사적으로 동일화 될 만한 특징을 찾지만 타자의 부름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즉 알튀세르는 외적 기계와 내면화의 동일성을 즉각적으로 결부시키지만, 그 동일화 이전에 카프카의 주체는 타자에게 무엇인가 비밀(대상-원인(a))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환상이다.($◇a)

― 현실로의 도피와 증상의 은폐 : 프로이트의 ‘불타는 아이’에 대한 라캉의 독법. 아버지가 깨어난 것은 따라서 꿈에서 현실로 도피한 것. 즉, ‘현실’은 우리가 욕망의 실재를 은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환상-구조물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즉 이데올로기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현실 자체의 토대인 환상-구성물이다. 이 환상은 우리가 말하는 증상을 은폐시킨다(맑스적 개념으로의 적대). 이는 인간을 현실과 직접 동일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 현실의 토대로서의 환상

― 환상의 환원불가능성 : 현실은 단순히 환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즉 그 현실과의 동일화를 깰 수 있는 증상의 중핵이 항상 남아 있다. 중핵의 실재(the Real).

― 객관적 비판의 무능성 : 객관적인 사실은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재하는 대상을 관념(표상)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관념은 실재하는 것을 봉합하는 수단일 뿐.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그것과 현실 사이에서 아무런 대립도 느끼지 못할 때 성공한다. 즉 표상과 실재하는 대상이 일치한다고 생각할 때 말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생기는 간극은 그 이데올로기를 위한 논증으로 되돌려버리게 된다.


◎ 잉여가치와 잉여 향락

― 실재를 외면하는 역사 : 라캉은 잉여향락의 개념을 맑스의 잉여가치에서 취하는데, 이는 주류 맑시즘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역사적으로 동일하게 되돌아오는 실재적인 중핵을 바라보게 한다. 즉 주류 맑시즘은 이데올로기의 원인을 단지 역사적인 현실에서 찾으려하는 반면 라캉은 그러한 구체적인 현실들이 실재를 외면하려는 시도라고 바라본다(강제 수용소와 탈레반 등은 영미의 잉여).

― 원동력으로서의 잉여 향락 : 맑스의 잉여가치가 말하는 것이 사실상의 자본 스스로의 생산력의 한계를 규정지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즉 “자본의 한계가 바로 자본 자신”이라는 역설적인 진리. 이러한 자본의 외상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이 오히려 자본 발달의 원동력이 된다. 잉여향락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역설이다. 향락은 오직 잉여 속에서만 나타나며, 구조적으로 항상 ‘초과분’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잉여분을 빼버리면 우리는 향락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와 욕망의 대상-원인인 잉여 향락 사이의 상동관계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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