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1. 팬덤fandom 현상
잠깐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등촌동에 살고 있다. 우리 동네에는 SBS 공개홀과 KBS 88체육관이라고, 신세대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명소가 있다. 알다시피 이 곳에서는 각종 공연이 열리는데, 그러다보니 가수들을 따라다니는 10대 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잦다.
토요일 저녁 이 곳에선 진풍경이 연출된다. 다음 날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SBS 인기가요'를 보기 위해(정확하게는 스타들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소년소녀 팬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몰려든 10대들은 보통 SBS 앞 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한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의 대형 현수막으로 거리를 도배하고, 공개홀 앞에서 침낭이나 즉석 이부자리를 꺼내놓고는 밤을 벗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 친구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날은 방송 당일인 일요일이다. 오후 세 네시쯤이면 2∼3백 여명의 중고생들이 불야성을 이룰 정도다.
한번은 깜짝 행사가 열린 적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이었는데, 일군의 10대 소녀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을 만들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행렬은 SBS 공개홀에서부터 시작해 근처의 어느 초등학교까지 이어졌다. SBS 인기가요에서 고별무대를 가졌던 GOD가 팬들에 대한 답례로 깜짝 콘서트를 연 것이었다. 족히 1천명은 될법한 소녀들이 이 공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러시를 이룬 것이다.
SBS 공개홀 앞이 매주 한 번 열리는 7일장이라면, 대형콘서트 위주의 KBS 88체육관은 연중행사가 펼쳐지는 축제의 장이다. 언젠가는 이 일대가 노란 물결로 넘친 적이 있었다. 컴백했던 서태지가 자신의 팬들을 위해 공연을 했는데 이 공연을 보기 위해 3∼4천명 가량의 노란 티셔츠들(서태지팬의 상징)이 이곳에 운집한 것이다. 지방에서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상경한 팬들도 적지 않았고, 아무튼 서태지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광경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런 상황이 일상화된 삶 속에서 나 자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동네가 동네다보니 이런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러한 현상이 그다지 낯설거나 거북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들 10대 팬들이 만들어내는 모습들에 시선이 자꾸만 쏠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특별하게 별종이라거나 신기한 인간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2. 적극적인 팬들!
10대 팬들의 이런 모습을 팬덤현상이라고 한다. 팬덤이라 하면 쉽게 말해 스타덤stardom의 반대말이고, 대중문화판에서 일어나는 뭇 현상들을 스타가 아니라 팬이 주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팬덤현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팬덤현상이 나타난 것은 대략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뉴키즈가 내한공연을 가지면서 보였던 10대 팬들의 아우성이 당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시선이란 게 그리 곱지는 않았다. 대개는 애들이 하라는 공부 안하고 쓸데없는 데다 신경을 쓴다며 질책하기 일쑤였다. 더러 입시제도의 희생양이라는 둥 동정 어린 시선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역시 10대들의 욕망 자체를 긍정하는 시각은 아니었다.
반면에 요즘의 팬덤현상, 팬덤문화라고 하면,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없다. 팬덤을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팬덤은 일방적으로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이 직접 문화를 생산해내는 경우를 말한다. 팬이 문화를 생산해낸다(?). 얼핏 봤을 때 이건 문법적으로는 성립불가능한 현상일지 모른다. 철없는 10대로, 소비자본주의의 노예로 인식되어왔던 팬들이 이제는 어엿하게 문화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예는 팬픽fan-fiction의 등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무협지나 하이틴로맨스의 스타일을 흉내낸 소설을 쓰는 중고생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중문화가 본격화되고 스타시스템이 정착되면서 팬픽션이란 게 등장한 것이다. 팬픽션은 보통 자신과 스타가 서로 친밀한 관계이길 바라는 욕망을 담는다. 때로는 연애를 즐기고 또 때로는 섹스로까지 나아가며, 현실을 자기의 욕망에 따라 재구성해낸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진 팬픽션은 같은 스타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유통되면서 자기 가치를 증식한다. 팬픽션의 위력은 실로 대단해서, 심지어는 '팬픽-이반'이라는 신종 문화주체까지 등장시켰다. 팬픽션을 쓰다보면 좋아하는 그룹 멤버끼리 동성애를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팬픽-이반이란 팬픽션을 읽고 쓰는 사이에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팬덤의 적극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스타-팬이라는 구도는 자칫 팬들이 스타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은 스타-팬의 양각구도가 아니라, 스타시스템이라는 기획사-스타-팬의 삼각구도이다. 팬덤의 긍정적인 의미는 바로 이러한 삼각구도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가령 문화연대의 대중음악 개혁을 위한 운동에 팬클럽들이 참여했던 사례는, 스타산업이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에 팬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3. 팬·매니아mania, 생비자, 오타쿠 - 문화수용자론의 다양함
이렇게 적극적인 팬들이 세상에 등장하면서(혹은 팬들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문화수용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팬덤문화라는 담론이 등장한 것도 그러한 관심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상품을 소비·수용·향유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들이 다양해진 것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무엇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건 매니아일 것이다. 매니아는 팬이라는 말과 여러모로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보통은 팬보다 훨씬 광적인 수용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표현할 때 쓰인다. 종종 '-광'이라는 접미사로 번역되듯이, 매니아는 자신이 즐기는 문화와 정신적·심리적으로 교류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심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 못지 않은 심미안을 가지기도 한다. 매니아적 감수성이란 깊으면서도 매우 폭넓다.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 도로를 달리는 버스, 자신들이 직접 만드는 자동차, 전투기 같은 각종 군수 무기들,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카드 소비, 한 나라의 얼굴이라는 화장실까지. 으레 매니아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조차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다. 한마디로 매니아는 단순히 문화를 향유하는 보통의 팬과는 달리, 문화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취향체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또 어떤 문화상품을 수용하느냐에 따라서도 팬과 매니아는 극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팬이 주로 스타나 영화와 같이 문화자본화된 상품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는 반면에, 매니아는 이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가령 로봇장난감을 수집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매니아라고 부르지만, 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코스프레(코스튬플레이)를 하는 10대들을 보고도 매니아라고 하지, 팬이라고는 않는 것과 같다. 팬과 매니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매니아가 바로 문화생산자라는 점 때문이다. 어쩌면 앞서 팬덤현상을 만들어내는 '팬들' 역시 매니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스타매니아, 대중가요매니아 같은 식으로 말이다.
문화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요즘 문화판의 매니아들은 토플러가 말한 생비자prosumer와도 유사한 것 같다. 생비자라는 개념 자체는 문화를 소비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화를 생산해내는 사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니아는 일본에서 유행했다는 오타쿠(お宅)와도 닮은 것 같다. 오타쿠는 매니아적 스타일을 지닌 사람인데 특별히 자기 관심사 외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문화수용자론의 미시성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팬과 매니아, 생비자와 오타쿠 말고도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은 굉장히 많다. 최근에 유행하는 보보스bobos라는 담론도 그것의 한 예가 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문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제각기인 것이다.
4. 맺음말 : 라이프스타일과 차이 드러내기
사실 매니아들(생비자, 오타쿠 등을 포함해서)을 문화생산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문화소비자라는 원죄 때문에 편향된 문화상업주의만을 부추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자꾸 매니아다, 오타쿠다, 보보스다해서 잔뜩 부각만 시켜놓는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소비를 자극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문화상업주의만이 판을 칠 것 아닌가.
문화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단순히 상업주의를 낳는다는 문제에만 그치진 않는다.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대로, 삶의 방식 자체가 획일화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단순히 상품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 속에 삶의 결들을 간직하고 있다. 가령 LG카드를 사게 되면, 그건 광고에서 보여지는 이영애나 배용준의 라이프스타일에 동의하는 것이 된다. '반지의 제왕'에 열광하고 심지어 팬픽션까지 쓴다면, 그 소설에서 나타난 백인우월주의에 동의하는 셈이 된다. 그렇게 문화를 향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사이 그 속에 숨은 코드들에 동의하게 되고, 따라서 새로운 문화를 생산한다 해도 그러한 코드들을 확장시키는 결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팬이나 매니아가 보수적인 문화 코드들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이나 취향에 따라 그러한 코드들을 선별하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어제 본 드라마에 대해 대화를 해도 제각기 의견들이 다르지 않던가. 필연적으로 이질적인 차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팬과 매니아들이 바로 이런 차이를 '확'하고 드러냈으면 좋겠다. 대개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보수적인 코드를 받아들인다. 그런 면에서 그냥 팬보다는 '생산하는' 매니아의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단순히 소비하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존 대중문화의 코드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차이를 드러내는 일일테니 말이다.
글의 마지막을 겸해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라는 사람이 만든 개념인데, 이 다중이란 것이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말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네그리에 따르면, 다중은 구성권력constitution pouvoir이라고 한다. 앞서 나는 문화수용자들이 주어진 삶의 방식을 따르면서 획일화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우려했는데, 그에 반해 다중은 주어진 길에 동일시되지 않고 오히려 역동일시하는 주체로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수적인 문화코드를 받아들이는 듯 하면서도, 그것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생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매니아적인 태도는 바로 다중이 함의하는 요결과도 비슷하다. 매니아는 스스로 문화를 구성한다. 자기 직업과 주어진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도, 자기가 생산할 수 있는 문화는 최대한 활용한다. 또한 대중문화가 주는 획일적인 코드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코드들을 만들어 유포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 유효성은 문화소비의 위험성을 적절히 걷어냈을 경우에 한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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