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광고 분석 ; '공익광고, 거짓말도 보여요'] 기득권 체제유지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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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과 정보통신부를 중심으로 국민 PC가 시판됐을 때 내걸렸던 카피는 아주 기분 나쁘게도 “컴퓨터 잘 쓰는 국민 만들기”였다. 홍보용 포스터에는 모델 송윤아가 사이버네틱한 패션에다가 우체국 적금통장을 손에 들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째려본다. 그 위를 장식하고 있던 문구가 바로 “컴퓨터 잘 쓰는 국민 만들기”였다.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컴퓨터를 싸게 팔아서 좋긴 하지만, ‘만들기’라니. 날 뭘로 보고 만들겠다는 건가. 난 솔직히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다. ‘컴퓨터 사주세요’ 해도 곱게 들을까 말까 한데, 날 어찌어찌하게 만들어보겠다고? 게다가 그런 도발적인 눈매로 째려보다니, 하기야 그런건 송윤아의 미모를 감안해 참아줄 수 있지만. 자기네들도 그 문구가 문제되리라는 걸 짐작했는지, 정보통신부의 그 카피는 한 달쯤 지난 후 좀 더 부드러운 문체로 바뀌었다. ‘컴퓨터 잘 하는 국민이 됩시다’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걸로 봐선 전보다 나아진 건 확실하다. 아무튼 공익광고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요즘은 보니까 에너지 아끼라는 의미로 “얘, 너도 시집가면 똑소리내면서 살겠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꺼리낌 없이 불러 제낀다. 언니들이 들으면 화낼 만한 소리다. 하긴 이 공익광고란 것들은 어찌보면 귀여워 보이기도 하다. ‘어쩌면 저 따위 소리로 함부로 나불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면서, 요즘같이 웃음이 메마른 세상에 실소까지 안겨주니 말이다. ‘컴퓨터 잘쓰는 국민만들기’ 물론 이런 문제는 공익광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단적으로 모든 상업광고가 다 그렇다. 유치뽕짝인 몇몇을 제외하고 대개의 상업광고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아주 세련되게 제시한다. 이를테면 현대백화점의 애니메이션 광고가 그렇다. 그 광고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가족들과 함께 산들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즐긴다. 감미로운 음악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그러한 정경에 취할 때 쯤 한마디 멘트가 시청자의 귀에 박힌다. “현대백화점”. 그러면 시청자들은 그곳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만으로, 혹은 현대백화점에 가는 것만으로도 그 여유와 웃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여 그렇게 속아넘어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현대백화점이라는 이미지에 호감을 갖기엔 부족할 게 없다. 이런 면에서 상업광고는 공익광고와 한통속이다. 광고 수용자를 광고라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 유도해내고는, 결정적인 일방장타를 먹이는 것. 그렇게 되면 시청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백화점에 한번 가보던지, 혹은 에너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던지. 하지만 상업광고와 공익광고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상업성과 공공성 같은 케케묵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가시적으로는 그게 제일 다른 점이기는 하지만, 내가 얘기하려는 건 둘이 서로 다른 화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업광고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따금씩 상품미학을 운운하기도 하는데, 분명 상업광고는 제도사회에서 주지 못하는 해방감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학교에서는 중고딩들이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기시하지만, 핸드폰 상업광고는 “나는 18살이다”라는 말 하나만으로 이들을 억압과 통제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방의 장면들을 TV화면 속에 스펙터클하게, 마치 실제 ‘현실처럼’ 처리해 보여준다. 이것이 상업광고의 대표적인 화법이다. 물론 상업광고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수용자 무시한 계몽주의적 발상 반면 공익광고의 화법은 다분히 직설적이다. “우린 할 수 있어. 세계 10대 정보강국”, “4월 13일, 꼭! 투표합시다!”와 같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익광고는 엄밀한 의미에서 광고(advertisement)라기 보다는 선전(propaganda)과 선동(agitation)에 가깝다. 흔히 공익광고를 일종의 캠페인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비판의 도마 위로 올려놓는 계몽주의적 발상이기도 한데, 이러한 수법의 맹점은 수용자를 백지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인 1홈페이지 만들기’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사람들에게 정보화 마인드를 ‘심어준다’던가, 칭찬 받으면서 시집생활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꼬시는 것이다. 이 화법에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훈육하고 계도하려는 무지 유치한 음모가 숨어 있다. 컴퓨터 잘 쓰는 국민을 만들며, 에너지 아껴쓰는 국민을 만들며, 과소비 안하는 국민을 만들며, 우린 모두 하나라고 생각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한다. 누가 봐도 뻔한 음모다. 그러니 다행히도 이러한 광고들에 시청자들은 전혀 매혹되지 않는다. 광고를 하나의 영상물이자 창작물이라고 할 때, 작품의 수용자가 되는 시청자들은 결코 만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미적 수준은 공익광고의 직설적인 선전에 선동될 만큼 저급하지 않다. 하지만 우려되는 것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공익광고의 화법이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그 광고의 메시지 자체는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광고가 직접적으로 수용자의 행동을 유도해내는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는 그러한 메시지에 동의하는 것이다. 컴퓨터는 잘 써야 하며, 에너지는 아껴써야 하고, 과소비는 금물, 우린 모두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란 것의 일종이다. 공익광고는 이데올로기 유포장치이고. 썰푸는 사람들은 이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도 한다. 따분하겠지만 고리타분한 이야기 하나. 국민 PC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실상 대개의 캠페인이란 것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국민 PC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진보네트워크 같은 데에 있는 사람들은 국민 PC 정책이 발표되자 당장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정보의 평등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퇴물이 되어가는 PC를 도매급으로 넘기는 것보다, 차라리 전국민에게 인터넷 전용선을 깔아주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갖추고 있는 국내기술력을 감안한다면 64메가 용량의 램으로 구동되는 컴퓨터 보급은 국가차원의 사기극이기도 하다. 칼라TV 팔기 전에 재고로 쌓인 흑백TV부터 팔아치웠던 시절이 80년대 초반이었는데, 20년만에 그런 사기극이 재현됐다고나 할까. 공익광고? 권익광고! 국민 PC 뿐만 아니라 공익광고의 전부가 이런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대한늬우스에서 혼식이 건강에 좋다고 떠벌리던 시절이나, 과도한 절약은 해로우니 적절한 소비는 할만하다고 권장했던 IMF 시절이나, 공익광고의 컨텐츠는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 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온 국민은 ‘소비는 악덕’이라고 세뇌 당해 왔었다). 여기에는 분명 공통분모가 있는데, 어떤 컨텐트를 다루고 있건 공익광고가 체제유지의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홍보처에서 왜 하필 4·13 총선이 끝나자 “우리 모두 다함게 손뼉을!”이라며 “우리는 하나입니다”라고 강조하겠는가.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기 전 시끌시끌하던 청소년 문제 공익광고가 요즘 들어 왜 시들해졌겠는가. 왠만한 분은 다 눈치채셨겠지만 답은 간단하다. 공익광고는 말이 좋아 공익광고이지 실상은 지배질서와 권력의 유지를 위해 국민을 세뇌시키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선 공익광고라기보다는 권익광고요, 차리리 공해광고에 더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익광고의 전반적인 컨텐트 모두를 부정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부탁인데 마치 그게 진리인양 떠들어대지 말란 말이다. 수려한 영상으로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몇몇 이쁜 광고가 없진 않지만), A는 B일 수도 있고 C일 수도 있으니 잘 선택하라고 판단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도 아니다. 이건 말이 좋아서 공익광고지, 공익강요나 마찬가지다. 글을 끝낼 때가 되었으니 접어야겠다. 분명 공익광고의 화법은 바보에게 말걸 때와 유사하다. 공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하면 바보도 인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철저하게 그들, 지배권력은 국민들이 스스로 뭔가어떻게 ‘되게’하게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두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밥그릇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공익광고를 때려댈 것이다. 누굴 바보로 알면서 말이다. 갑자기 겁이 난다. 정말 바보로 아는 게 아닐까. <김성윤 기획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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