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이론연구소 특강 [문화연구 세미나] 2002.1.30 김성윤(서문연 연구원)

Dworkin, Dennis. "Between Structuralism and Humanism." Cultural Marxism in Postwar Britain. p.125~181



“우리 중 누군가가 1956년의 복사판을 뜨고 있다. 지금은 분명 1965년일진대, ‘메뚜기’라도 나타났는지 지난 9년을 좀먹어버렸다. 우리 중에 1956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려 하는 자가 분명 있다.(E. P. 톰슨)” 1960년대 초반, The New Left Review(이하 NLR)의 편집진이 세대교체를 하는 가운데 작지 않은 잡음이 생겼다. 당시 영국 내 신좌파의 ‘좌장’이었던 E. P. 톰슨(E. P. Thompson)과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NLR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게 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간의 불화였다. 톰슨은 앤더슨이 자신을 비롯한 NLR의 초기 편집진이 해산하도록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믿고 있었으며, 잡지사의 자산 분배 문제 역시 앤더슨을 비롯한 신임 편집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실은 톰슨의 판단과는 달리 앤더슨 쪽에 기울었다. 잡지의 재정이 흑자는커녕 현상 유지조차 어렵다는 사실이 앤더슨에 의해 입증되었고, 이런 과정 속에 앨런 홀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 같은 구 편집진마저 앤더슨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톰슨의 위치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톰슨과 앤더슨(들)의 불편한 관계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12~116)

얼핏 소모적인 듯한 이 둘의 갈등은 사실 두 사람간의 급진적인 이론과 실천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문화주의/경험주의 전통이 강했던 영국에 대륙의 구조주의 이론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2) CCCS의 탄생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문화연구의 한 가지 토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문화연구가 바로 문화주의와 구조주의가 접전을 이루던 그 시점, 그 자리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말이다.


50년대 이래, 영국의 사회주의적 지성들 사이의 주요쟁점은 ‘노동계급과 당이 사회진보의 주체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앞서의 톰슨을 포함하여 50년대의 신좌파가 노동당을 진보화/급진화하기를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후기의 ‘다양한’ 신좌파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당의 관계가 토리당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간주했다. 반문화운동과 68혁명으로 재형성된 진보세력에 기초를 둔, 70년대의 맑스주의적 지적 풍토는 70년대 말 사회주의 세력의 위기와 맞물려 그 성격 규정이 중층-결정되기에(over-determined) 이른다.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위기는 구조와 주체, 이데올로기와 경험, 또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암시적이고도 명시적인 논쟁들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러한 과정은 문화연구에도 여실히 반영되었다.(126~127)

이 과정에서 영국의 문화연구는 문화맑스주의의 경험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백인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분석을 넘어서, 하위문화/미디어연구/(좀 더 나중이긴 하지만)여성연구 등으로 그 지평을 넓혀나간다. 우리는 ‘영국의 문화연구가 백인 노동계급에서 하위문화/미디어/인종/여성 등의 주제로 퍼져나갔다’는 이 단순한 문장 속에서, 앞서 제시한 문화연구의 주요 토픽 중의 하나인 ‘문화주의-구조주의 논쟁’의 역사가 뿌리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톰슨’과 ‘앤더슨’이라는 기표의 대립으로 상징되던 영국 문화맑스주의의 내부갈등이 문화연구라는 제3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구조주의를 비롯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등 대륙의 구조주의가 영국으로 건너오자 영국내의 신좌파들로서는 그 이론적 정합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한가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사회주의의 지적 분위기는 일순간 경직되고 말았는데, 영국 외부 세력에 의해 일단 수동적으로나마 고무되기는 했지만 톰슨의 책 제목처럼 ‘이론의 빈곤(The Poverty of Theory)’ 현상을 보이고 만 것이다. 탈중심적/탈계급적 노선 지향으로 인해 이전의 운동 능력을 잃고 이론중심적 지향으로 인해 일상 노동자들의 경험과는 유리된 지적 편력만이 난무했다.

잠시간의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고 나선 것은 역시 NLR의 신세대 신좌파들(앤더슨, 네이어른, 블랙번 등)이었다. 이들, 특히 앤더슨은 20세기 영국의 편협한 지적 시야를 비판하고 서구맑스주의의 담론들을 소개하는 대신, 이를 비판적으로 독해함으로써 독자적인 사회학적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주 1과 2 참조). 그는 영국 부르주아가 구귀족계급을 대신한다기보다는 다른 계층들에 용융?침투해 있기 때문에,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 개념설정하고 정치한 설명 없이 곧바로 투쟁과 혁명을 설명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지배계급을 전복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대륙의 사회학이 대규모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되었던 반면, 영국은 19세기 노동계급운동의 결과로 ‘사회당이 아닌 노동당’을 산출했기 때문에 지배계급화된 이들로부터 대안의 강구를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32~134)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대륙의 구조주의 전통에 영국의 문화주의 전통이 붕괴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NLR을 비롯한 영국내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앤더슨이 벗어나고자 했던 바로 그 영국의 전통주의와 경험론의 타당성에 이끌려 대륙으로부터 망명한 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비트겐슈타인, 말리노프스키, 포퍼, 곰브리치 등). 직감적이고 우연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종래의 영국 경험론을 성문화하면서(codified), 이 망명자들은 대륙의 체계적 사유에 대한 거부 체계를 확립해갔고, 그 결과 경험론의 코드는 보다 굳건해지고 세밀해지기에 이르렀다.(135, 136)


앤더슨이 서구맑시즘에 대해 ‘혁명적 정치론으로부터 소원해지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트로츠키주의의 국제주의와 반스탈린주의로 나아가면서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접합시키려는 동안3), 버밍엄 연구소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영향으로 맑스주의에 새롭게 접근해갔다. 버밍엄 연구소의 이러한 노정은 문화를 토대의 기계적인 결과 또는 반영이라고 간주했던, 소위 정통맑스주의도 아니었고, 또 비록 문화의 구체성과 비환원성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문화를 ‘경험’이라는 배타적인 용어로 개념화했던 초기 신좌파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적 해석으로서의 맑스주의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화연구는 서구맑스주의를 수용하면서, 생산양식이 사회의 근본적 갈등의 원인이 된다는 견해를 고수하는 동시에, 정치와 이데올로기와 문화가 각각의 독특한 구체성과 논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버밍엄 연구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두 명의 서구맑스주의자는 알튀세르와 그람시였다. 그람시에 관한 연구소의 이해는 해를 거듭하면서 바뀌기는 하지만, 간단히 말해 그람시는 자본주의 사회들에서의 권력관계에 대한 안목?견해?해석의 틀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①권력관계의 고전적 모델에서의 환원주의를 지양하는 것 ②문화와 이데올로기 영역에 대해 역사를 구성해가는 지배/종속 집단 사이의 갈등의 장으로 이해하는 것 ③헤게모니를 지배계급의 지배라는 단순한 등식관계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 ④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의/합의’ 도출 과정의 총체성과 모순성 양자를 동시에 이해하는 것 등으로 정리된다.

문화연구는 또한 구조주의로부터도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적 개념과 구조주의적 개념을 연결시키면서 이데올로기를 재정의한 측면 덕분에 영국 문화연구자들로부터 환영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는 개인의 자율적인 인식을 이데올로기에 의한 호명의 결과로 간주하여 상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물질적 조건들 가운데에 이데올로기를 반(半)자율적이고도 중층결정되는 과정으로 위치시키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이로써 문화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맑스주의의 과학화를 내세우며 헤겔맑스주의로부터의 탈출을 꾀했던 알튀세르의 ‘과학’은 문화연구자들에게 텍스트 분석에 있어 생산관계의 재생산 과정을 포착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무의식적 경로를 따르는 ‘주체 없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자율성에 힘입어 생산양식에 노동계급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한 그람시를 가져옴으로써 문화연구는 무엇보다 국면을 분석할 수 있는 이점을 얻게 되었다. 이 역시 헤게모니 과정의 역동성과 생동성을 통해, 하위문화를 비롯한 문화구성체의 수용자들이 문화생산양식은 물론 사회적 관계들에까지 틈입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해준 것이었다.


이로써 문화연구는 물론 영국의 문화맑스주의는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장르를 넘어서고 횡단하는 텍스트 비평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잠재되어 있는 문화적 전복의 국면들을 찾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가 70년대였고 버밍엄 연구소는 가장 먼저 하위문화에 주목하면서 노동자 계급 출신 청년들이 즐기는 펑크 스타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하나 역점을 둔 분야로 미디어 연구를 빼먹을 수 없다. 미디어를 중심으로 문화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문화코드를 둘러싼 헤게모니 게임은 주요 분석대상이 된다.

폴 윌리스(Paul Willis)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폭주족과 히피족들의 생활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동정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윌리스는 그들의 생활이 지배 체제에 대해 반항적 의미를 가지며, 조직화된 좌파의 문화적 정치학의 한 유형으로 파악했다. 그는 그들의 스타일과 물질적 실제에 이렇게 두가지 유형으로 드러난 하위문화의 내적 의미와 구조를 밝히는 데 주력했으며, 이러한 유형의 하위문화를 ‘문화적 삶의 지형학 혹은 방언’이라고 정의했다.

필 코헨(Phil Cohen)의 경우 문화적 층위보다는 경제적 층위에 집중했다. 그는 청년 하위문화의 출현을 ①경제적 변화와 연관된 과정 ②전통적 노동자 계층 사회의 붕괴 ③노동자 계층의 삶의 중심으로서의 가족의 쇠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코헨이 하위문화를 경제관계에 의한 부산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면, 존 클라크(John Clarke)는 스킨헤드족을 붕괴하는 가족이나 공동체 사회의 붕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저항을 실행한 계층으로 생각했다. 이들의 가치가 처음에는 생활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점차로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정치적 목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159).

딕 헵디지(Dick Hebdige)는 이전 연구자들의 접근과는 다른 측면에서 하위문화를 분석한다. 하위문화가 일견 젊은이들의 순수한 표현방식으로 보이지만 이미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이미지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며, 하위문화의 구성요소라는 것도 계층적 경험보다는 자본주의와 국가 차원에서의 변화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 헵디지의 창안이었다. 헵디지의 이러한 논의는 이전의 하위문화 논의를 완전히 뒤집는 성격의 것이었다. 하위문화를 문화구성체로 놓고 해석할 때에는 구조주의적 접근방법을 택하는가 하면4), 문화주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펑크족 청년들의 스타일이 다른 집단과의 구별을 짓는 행위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즉 펑크스타일이 노동자 계층 젊은이들의 대명사가 되긴 했지만, 그 스타일이 노동자계층의 경험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그들의 스타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재현했다거나 혹은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헵디지가 이전의 하위문화 연구자와 대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의 욕망 코드를 읽어냈다는 점이다.


구조와 주체, 구조주의와 문화주의의 경계를 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영역은 미디어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통 미디어에 대한 연구는 대중 매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화 작용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 결과 미디어의 행위적 효과보다는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힘의 구조와 미디어의 정치학에 대한 좌파 진영의 일반적인 탐구였다.

따라서 미디어를 통한 코드화/탈코드화의 모델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의사소통에서 발신자/수신자 모델에 대한 중요한 비판은 그 메시지가 전달되기 이전에 그 의미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근거하곤 한다. 메시지는 코드화되는 과정, 그리고 수신자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변질되고 올바른 의미 전달이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수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발신자가 보내는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코드화 과정에서 미디어는 선호하는 혹은 선택한 내용만을 전달한다. 수신자 역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선별할 뿐이다. 자신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과 상관없는 정보에 대해서는 자신의 귀를 닫아 놓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 전달이 이뤄질 수가 없다.

문화연구 그룹, 특히 CCCS는 미디어를 통해 형성되는 코드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발신자/수신자 모델 비판에 의거한다면, 분명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고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발신자는 메시지를 협소하게 의도대로 해독하도록 코드를 생산/주입하지만, 미디어 수용자는 여기에 대해 교섭적으로 코드를 풀어내는 것(negotiate decoding)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의도대로 호명된 주체로서 미디어를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dominant-hegemony decoding), 이를 저항적으로 탈코드화하는 것(resistant decoding)이야말로 문화연구의 할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CCCS의 문화연구가 하위문화와 미디어연구를 거치면서 한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는데, 그것은 버밍엄 연구소 내에서 페미니즘적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했고 여성이 직접 연구에 참여한 논문도 고작 4편에 불과했던 것이다.(176) 이러한 현상은 여성 연구자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이들의 불만은 CCCS가 추구하는 이론이나 실천이 보다 광범위하게 투쟁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여성연구(woman's studies)는 당시 연구소의 주요 주제였던 미디어 연구나 하위문화 연구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를 테면 ‘미디어와 여성의 관계’나 ‘하위문화에서의 여성’ 등과 같은 것이었다. 사회적 타자로서의 여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했던 여성 연구자들은 미디어 텍스트에서 이루어지는 코드화/탈코드화 분석에 몰두한다. 남성연구자들은 여성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억압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여성문화연구자들에 의하면 여성들이 취하는 미디어 역시 남성들 중심으로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은 수동적인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기존의 연구를 뒤집는 것은 미디어뿐만 아니라 하위문화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젤라 맥로비(Angela McRobbie)는 헵디지가 펑크 스타일이나 계급갈등에서 벗어난 문화현상의 복잡성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긴 했지만, 이는 패션이나 댄스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여성들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것이었다고 말했다(179).

문화연구에 있어서 여성연구자들의 개입과 권리 행사는 CCCS의 지향점을 채워주는 효과도 가져왔지만, 일단 이 발제의 맥락에서 위치짓는다면 무엇보다도 구조주의가 수용된 이래 문화연구가 다양한 문화적 심급들을 채택한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체 결론이다. 모든 문화적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것은 비주류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무한한 구속과 이데올로기로서 다가오는가 하면, 어느 순간 잠재되어 있던 긍정의 계기가 표면 밖으로 솟아오르기도 한다. 이것은 정세다. 문화적 정세가 하루에도 수차례 솟았다 지는 복잡다기한 세상에서 정세를 판단할 만한 인식틀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문화판에 숨어 있는 억압의 코드를 판별해내고, 생산의 잠재성을 포획해낼 수 있는 그런 이론 말이다. 어쩌면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사이에서 격론을 펼쳐야 했던 영국의 문화 맑스주의자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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