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지] 2003년 3월 10일, 김성윤
김용규, 「구원의 정치학과 미적 가치 - 테리 이글턴의 정치비평」, 『비평과 이론』, 3호, 1998년 5월
1. 서론
영국 맑스주의에 생겨난 이론과 실천 간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 (209)
80년대 들어 영국의 진보적 비평, 특히 테리 이글턴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문학비평에서 ‘이론과 실천의 단절’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글턴은 맑스주의 비평의 전사(前史)를 비판하고 텍스트 생산의 과학의 준칙과 절차를 구체화하고자 했던 자신의 이전의 작업을 문화적 실천과 동떨어진 아카데미시즘이었다고 자기반성한다. (209~210)
70년대 중반에 『비평과 이데올로기』처럼 기존 비평을 탈신비화하는 보다 이론적인 비평작업이 절실히 요구되었다면, 80년대 초반의 정치적 지형의 변화와 더불어 제도적이고 실천적인 정치비평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211)
2. 구원의 해석학
구원의 해석학은 정전적인 작품에서 무엇을 비판?거부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무엇을 구원?재구성?재평가?재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중점을 둔다. 이글턴의 정치비평은 70년대의 자신의 비평이 연장임과 동시에 단절로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영국의 문학이론이 도덕적?윤리적인 가치에 의하여 지배되어왔다는 인식을 여전히 간직하는 한편, 그것에 정치적 가치를 복원함으로써 그 지배를 실천적으로 ‘지양’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212~213)
80년대 초반 들어 이글턴은 발터 벤야민과 브레히트의 정치적 이론에 의지함. 왜냐하면 이글턴이 볼 때, 역사주의는 “모든 개별적인 특수성들을 황량한 무한 속의 폐쇄된 체계로 지양”하고 현재의 순간을 간단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의 한 계기로 간주함으로써 현재의 모든 정치적 실천을 미래로 연기하는 비정치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213)
전통은 ... 역사에 의하여 억압되고 묻혀버린 파편화된 잔재들의 궤적으로서 “역사의 연속체를 열어 젖힐 수 있는”힘을 의미한다. (214)
이글턴이 벤야민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은 이론적 정합성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혁명적 정치에 관한 벤야민의 사고를 이용하여 현재의 다양한 이론들이 어떻게 형성?관계?갈등하게 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즉 그를 현재의 맥락 속으로 불러와서 현재의 문학적 가치, 텍스트의 이용, 그리고 문화와 정치의 관계에 관하여 그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215)
전통 속에 존재하는 혁명적?정치적 ‘흔적’과 ‘편린’을 기억해내는 것은, 이글텐에게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15)
이글턴 역시 『비평과 이데올로기』에서 영국의 국민문화의 고질적인 경험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영국의 토착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글턴은 그동안 자신의 작업과 영국의 토착적인 전통 간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그러한 전통에 대하여 보다 균형적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 ... 레이먼드 윌리엄즈에 대한 달라진 평가... (216)
그 다음으로 ‘전통’의 문제는 이글턴에게 정치적 차원을 도덕적 가치로 치환해 온 영문학의 지배적 전통에 맞서 억압된 정치적 차원을 복원하는 한편, 모든 연속성을 부정하는 오늘날의 탈구조주의적 경향들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밀턴을 복원... (216)
이글턴의 정치비평은 벤야민의 ‘전통’ 개념에 의탁하여 80년대 초의 정치상황 속에서 동질적이고 공허한 연속체로서 작용해온 영국의 도덕적이고 유기적인 전통에 의하여 억압된 정치의 흔적과 편린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복원은 탈구조주의의 대대적인 유입과 긴박한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현재의 정치적 상황만을 조급하게 쫓는 좌파들의 지나친 정치주의를 비판하는 의미를 지녔다. (218)
3. 수사학과 문학
수사학...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처럼, 물화된 문학비평에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기능을 돌려주는 것. ... 의미화의 정치적 효과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 ... “담론의 구성방식과 조직방식”을 이해하고 “담론의 형식과 장치가 실제 상황 속의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가”하는 점을 검토하는 것. ... 따라서 수사학은 정치의 문제이자 미학의 문제였고, 비유의 문제이자 진리의 문제였다. (218~219)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통합적인 상태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고와 언어, 이론과 설득, 언어와 담론, 과학과 시 사이의 엄격한 분화가 이미 제도화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수사학은 실천적인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단절된 채, 특정담론의 진리가치를 외면하는 자기탐닉적인 준칙들로 굳어져 버리거나 아니면 “겉만 그럴듯하게 세련되고 과장된 언어”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수사학적 이론과 수사학적 실천은 단절되고, 수사학은 주로 텍스트적인 활동으로 국한되거나 문체적인 기교로 여겨지게 되었다. (219)
이글턴은 수사학의 쇠퇴와 와해의 과정에서 문학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합리주의적 언어관의 지배는 수사학과 시가 지닌 언어의 허구성과 감정적인 감염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수사학과 달리, 시는 합리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 언어관에 쉽게 적응함과 동시에 그러한 언어관에 대항하는 특권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220)
‘문학’은 수사학의 타락이자 언어와 언어의 실질적 상황간의 분리를 의미하며, 그러한 분리와 자신의 기원을 망각함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문학’으로 하여금 그 기원을 잊게 하고 그 탄생의 실질적인 맥락과 분리시킨 채 그것의 내재적인 특징들만을 존재론화시켜 문학을 정의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할 행위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문학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보편적인 정의로 내세우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221)
문학비평 역시 ... 만약 비평이 텍스트의 기교와 형식을 다룬다면, 그것은 텍스트의 진리내용이나 도덕적 가치를 외면한 채, 언어장치의 분석에만 매달리는 공허한 것이 될 것이고, 반대로 비평이 텍스트의 도덕적 가치를 문제삼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의 경험과 직관적으로만 관계하는 모호한 교훈주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수사학이 와해된 이후, 비평은 공허한 형식주의와 모호한 인간주의 사이를 방황하게 된 것이다. (221)
수사학의 쇠퇴 과정이 ‘문학’과 ‘미적인 것’을 분화?탄생시켰다면, 문학이론의 새로운 가능성은 그것을 역추적함으로써, 그것들에 과거의 통합적 기억을 새롭게 되찾아주는 과정에서 찾아질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문학’ 개념을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개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그것을 보다 넓은 담론구성체로 편입시켜 그것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나아가서 그것을 담론구성체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실천들과 관계짓는 작업이 될 터이다. (222)
4. 미적 가치와 정치비평
니체 - ‘수사’(trope)를 자의적으로 언언에서 떼어 내거나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선언했다. 드 만 - “언어의 기본적인 구조는 지시댕상을 표현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적”이며 특히 “수사학은 논리를 중지시키고 지시대상에서 벗어나 어지러운 일탈의 가능성을 개방한다”고 주장한다. ... 전통적인 주장을 완전히 전도시킨 것이다. (222~223)
그러나 이글턴에게 이러한 역전은 수사학의 진정한 모습을 왜곡시킨 것이며 수사학의 쇠퇴를 알리는 또 다른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이글턴이 볼 때, 이들에 의하여 “시장에서 서재로, 정치학에서 문헌학으로, 사회적 실천에서 기호학으로 물러난 수사학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활력있게 탈신비화하는 작용을 하지만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글턴에 의하면 이들의 수사학은 문학에 정치적 실천의 차원을 되돌려주는 것과 전혀 다른, 훨씬더 강화된 신비평의 새로운 등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 의하여 ‘문학’은 “모든 지시작용의 폐허이자 의사소통의 공동묘지가 되었고,”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에워 쌓인, 최후의 유희공간으로 물신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223)
이글턴은 그 대안으로 수사학의 또 다른 이름인 의미?대상?실천의 모든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기표의 연결망으로서의 담론 개념을 제안한다. 담론 속에서 의미는 실천적인 삶의 형식과 결합하면서 보다 규정적이고 결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진리’, ‘현실’, ‘지식’, ‘확실성’과 같은 단어들 또한 ‘해체의 언어’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갈등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223)
수사학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정치비평의 과제와 관련짓는다. 그 과제는 첫째, ‘문화적’ 매체를 변혁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하는 데 참여하고, 둘째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효과를 생산하는 작품들의 수사적 구조와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마지막으로 심지어 그런 보수적 작품에서조차 사회주의에 유익한 자산이 될 법한 것을 전유할 수 있도록 그것을 ‘결에 거슬러서’ 해석하는 것이다. 보수적 작품의 결을 거슬러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 종교적 심상으로부터 반종교적인 쾌락을 읽어내고, 정치성을 배제한 작품의 생산도 권장하며,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예술작품의 ‘위대성’, ‘진리’, ‘심오한 감동’, ‘즐거움’, ‘경이로움’을 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글턴은 미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기존의 정전 작품에서도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미적인 가치를 특정한 사회 상황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실천들과 길항하는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담론의 특정한 양식으로 간주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224~225)
80년대 들어 이글턴은 문학적 생산의 과정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접어두었던 가치평가(evalu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는 문학작품을 현재의 수용 조건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젊은 급진적 비평이론들을 겨냥해서 문학작품의 생산적 과정을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225)
이글턴에 따르면 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제하는 유일한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텍스트를 그런 식으로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식의 독서에 맞추어 읽기 위하여 텍스트의 구성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전위?변형시킨 방식”에 주목하는 일이다. ... 베네트의 견해에 대한 비판. (226)
80년대 후반부터 이글턴은 ‘미적 가치’를 자신의 본격적인 탐구영역으로 삼는다. 그는 미학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연계성을 부정하거나 ‘미적인 것’을 대안적인 형태의 문화정치학에 의하여 타도?추방되어야 할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정치적 좌파를 정면으로 문제삼는다. “미학이 부르주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비난적인 의미로 통하는 것은, 철저하게 비변증법적인 속류맑스주의의 사고나 ‘포스트맑스주의적인’ 경향에서뿐이다. 맑스, 브레히트, 벤야민이 이해한 바와 같이, 급진적 비판의 임무 중에 하나는 우리가 그 상속자가 되는 계급적 유산들 속에서 지금도 생명력있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이든 좌파의 정치적 용도를 위하여 구원하고 복원하는 것이다.” (227)
이글턴은 ‘미적인 것’을 부르주아적 가치라기보다는 모순적인 가능성을 지닌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에 의하면 미적인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이지만, “맑스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적 공리성에 대한 혁명적 저항의 인간학적 토대가 된 인간적 힘과 능력의 자기결정적인 능력”이 되기도 했다. (228)
5. 결론
(이글턴의 정치비평에 대한 비판)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하면서도 그것들의 다양한 차별적 의미를 그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반성하기보다는 그것들이 공통으로 지닌 특정한 정치적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의 다양한 이론의 전개를 그 역사적 구체성 속에서 검토하기보다는 이미 낯익은 영국의 전통비평의 변종들로 간주하고 있음. 이는 정치비평의 가능성을 현실적 맥락 속에서 텍스트의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계기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채 그 정치적 가치만을 강조한 대가인 것이다. 이론주의가 정치비평의 가능성 속에서 극복되지 못한 채 정치비평의 가능성을 협소하게 만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최근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지면서 이러한 한계는 그대로 묻혀질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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