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쉴러, 안인희 옮김, 『인간의 미적교육에 관한 편지』, 청하, 1995
김성윤/ 사회학과 석사2차/ 2004년 9월 9일
쉴러의 미학이론과 문화개념
* 편지의 애초 의도 - 아름다움을 분석하고 비판철학적 방법으로 아름다움의 본질 규정을 하겠다는 의도 -> 수정된 의도: 아름다움과 예술의 작용에 대해서, 그리고 참다운 휴머니티를 가능케 하는 그 두 가지의 역할에 대해서 관심 --- 경험적 연구를 하려던 것이 연역적 방법으로 진행 -> 아름다움의 본질은 경험에서 얻어질 수 없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이념이며 절대적인 명령
* 『미학편지』의 배경 -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 프랑스 혁명 - 계몽적 이상은 공유, 폭력적 성향은 거부
- 산업화 - 분업체계로 인한 인간의 단편화와 기형화
=> 인성 균형의 붕괴. 감성/오성 등의 총체성이 깨짐. 특히 프랑스 혁명은 오성은 계몽됐으나 감성은 계몽되지 않음.
* 칸트 비판철학의 영향
- 총체성의 회복은 아름다움과 예술을 통해서. 감성능력의 발전이 오성의 활동과 균형을 이루어야만 인성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감성능력을 고양하는 일은 아름다움과 예술이 할 일이다. 아름다움이란 오성과 감성의 결합.
- 인간의 인식을 물자체가 아닌 경험의 선험적 형식으로 한정 지었던 칸트와 마찬가지로 쉴러 역시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미리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형식을 다루고 있다.
* 예술의 자율성 -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하게 이루어진 예술적 가상의 상태에서 인성은 원래의 총체성을 회복하고, 그러한 상태에서만 참다운 인성의 실현이 가능하므로 결과적으로는 바람직한 사회의 실현도 가능해진다는 것. --- 그런데 실제로 작가로서의 쉴러는 참여예술적 경향을 보여왔음. 그러나 그의 예술론은 도구나 수단으로로서의 예술이 아님을 알 수 있음. “현실에 나타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적인 길을 택해야 한다는 사실(16, 제2편지)”
* 산업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거론되는 문화개념 - “문화야말로 현대의 인간성에 상처를 입힌 장본인입니다. 한편으로는 경험의 확대와 보다 엄밀한 사고방식이 학문들간의 한층 엄격한 분리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복잡해진 국가라는 시계(기계장치같이 작동하는 국가라는 의미)가 계층들과 업무를 한층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자, 인간 본성의 내적 통일성도 깨어져서 파괴적인 갈등이 그 조화로운 힘들을 불화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직관적인 오성과 사변적인 오성은 적대적으로 되어서 각자의 영역으로 들어가 불신과 시기심을 가지고 자기 영역의 경계선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활동을 특수한 영역에 국한시키는 것과 아울러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하나의 지배적 영역을 만들어 내었는데, 드물지 않게 이 지배적 영역이 나머지 다른 소질들을 끝까지 억압하는 것입니다.(33-34, 제6편지)”
* 그렇다면 문화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 “인간에게 있는 다양한 소질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상호 대립시키는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힘들의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문화(=교육)의 위대한 도구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도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립이 존속하는 한, 인간은 아직도 문화를 향한 도중에 있는 때문이지요.(38, 제6편지)” --- 여기서 문화는 인간의 총체성을 파괴했다는 앞부분과는 다르게 오성과 감성을 총체화할 수 있는 매개 내지는 도구로서 언급이 되고 있다. 다소 모순적이라 할 수도 있는 이 두 부분을 좀더 넓은 시각에서 이해를 한다면, 이를 통해 쉴러의 문화개념을 '인간의식 또는 역사의식의 보다 나은 상태로의 발전(과정) 혹은 그 의식들의 변화(과정)'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이런 맥락에서 문화라는 말에는 괄호치고 교육이라는 말이 늘 병용되고 있다). 즉, 인간이 총체성을 상실한 것도 문화가 장본인이며, 그 총체성을 회복하는 것에도 문화가 위대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 예술 중에서도 아름다운 예술 -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순환논리가 아닐까요? 이론적 문화(=지성 교육)가 실천적 문화(=도덕성 교육)를 유도해야 하는데, 도덕성의 함양이 지성 교육의 조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중략) ... 이제 나는 지금까지의 성찰이 추구해 온 그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 도구는 바로 아름다운 예술입니다. 저 원천은 불멸하는 예술의 모범들 안에서 솟아납니다.(49, 제9편지)” --- 참고적으로 이때 예술은 시대로부터의 유용성을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설명이 부연되고 있음.
* 인성과 아름다움의 이성적 개념들(의 구도)
- 감성/오성
- 상태(생성)/개성(존재)
- 감각충동(존재에서 생성으로)/형식충동(생성에서 존재로)
- 활력을 주는 아름다움/기를 꺾는 아름다움
- 그리고 문화와 유희충동. “감수성이 다양하게 발전할수록, 유동적일수록, 현상들에 더 많은 표면을 제공하면 할수록, 인간은 세계를 더욱더 많이 장악하고 더욱더 많은 소질들을 자기 안에서 발전시키게 됩니다. 개성이 힘과 깊이를 얻을수록, 이성이 자유를 많이 얻을수록, 인간은 세계를 더욱더 많이 파악하고 더욱 많은 형식을 자기 밖에 창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화(=교육)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감각능력에는 세계와의 극히 다양한 접촉을 마련해 주고, 감정의 영역 안에서는 수동성(=감각적 수용능력)을 최고로 끌어올립니다. 둘째로 규정하는 능력(=사고력)에는 감각능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해 주고, 이성의 영역 안에서 활동성을 최고도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74-75, 제13편지)”
=> 여기에 감정과 사고력이 이상과 유사하게나마 일치하는 순간 유희충동이 등장한다. 두 가지 충동의 강제성을 배제하고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유희충동이다. 유희충동의 대상은 살아 있는(감각충동) 형성력(형식충동)이며, 그것은 곧 아름다움을 뜻한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됨. 인성의 구현. “이제 아름다움의 영향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에서, 그리고 그들이 미적인 문화(=교육)를 인정하면서도 늘 부딪치게 되는 저 모순을 설명하고 해결도 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94, 제16편지)”
* 미적 상태 - “감각적 규정의 상태를 물리적 상태, 이성적 규정의 상태를 논리적/도덕적 상태라고 부른다면, 현실적이면서 활동적인 규정가능성의 상태를 미적 상태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114, 제20편지)” ... “그러므로 문화(=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들 중의 하나는 인간을 단순히 물리적 삶의 단계에서 이미 형식에 종속시키고 아름다움의 영역이 미칠 수 있는 한 그를 미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미적인 상태에서만 도덕적 상태가 발전되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130, 제23편지)”
* 미적 가상 - 가상이란 탈현실적인 것. 일체의 목표나 유용성으로부터 벗어나 재미로 하는 일. -> 예술의 자율성의 미학. “바로 앞의 편지에서 미적 가상에 부여하고 있는 높은 개념이 일반화될 경우에 현실이나 진실을 위해서 두려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잘못 사용할 정도로 미숙한 동안에는 그것은 일반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화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일체의 오용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화(=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자율적인 가상을 추구하는 일은 인간이 자신을 현실에 제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추상능력, 더 많은 심정의 자유, 더 많은 의지의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러한 가상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현실을 넘어서 있어야 합니다. 현실로 가는 길을 면제받기 위해 이상의 길로 접어 들려는 것이라면 얼마나 잘못 판단한 것인가요!(157, 제27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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