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홀, 「의미작용, 재현,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후기 구조주의와의 논쟁」, 제임스 커런 외 편, 백선기 역,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한울아카데미, 1999[1996], 29~73쪽

김성윤/ 2006년 10월 10일/



문화연구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 알튀세르에 대한 애증의 시선


0. 문화연구에 있어 알튀세르는 불편한 존재이다. 반드시 넘어가야 할 산이면서도, 빠져서는 곤란한 듯한 늪이다. 그의 이데올로기론이 문화연구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논의를 따르다보면 이론적 투사가 되어야만 하기에 우리는 그 늪을 건너기가 조심스럽다.


1. 구조의 사유 : 알튀세르는 총체성을 재구성한다. 루카치식의 표출적인 총체성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구조(29)를 전제로 총체성을 재개념화한다. 그의 성과는 그러한 구조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때문이다(30). 맑스주의의 단선적인 논의를 넘어서는 이러한 이해방식은 그의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를 횡으로 잘게 분해한다. 그가 상정하는 구조의 복잡성은 미끄러짐의 구조라는 점에서 종적으로 분해된다. 왜냐하면 그의 구조 개념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실천의 결과로”(37) 이해되는 동태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2. 과잉결정의 사유 :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속성들이 구조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함의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알튀세르는 ‘담론의 다의성, 의미의 영속적인 하락,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31)과 같은 것에 함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구조 내의 속성들은 불균등성unevenness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생각하는 필연성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다양성의 우선권에 압도당하지 않는, 복합적 통일체 내에서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특성화해야 한다.”(33) 여기에 대해서는 「모순과 중층결정」이라는 그의 논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3. 정세의 사유 : 그런데 (프로이트에게서 차용한) 이 과잉결정의 과정은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발적이라 할 만한 과정으로 인해 전이되고 응축되는 것이다. 홀은 이것을 ‘필연적인 비상응관계’(36)라고 한다. 알튀세르의 구조는 정합적인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고전적 모델에 비해 더욱 더 비결정적이고, 끝없이 열려 있으며, 그리고 상황의존적인 모델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은 우리들이 사회경제적 관계의 구조 내의 원천적인 위치로부터 특정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해독할 수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37) 이것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게서 빌려왔던 바로 그 ‘정세적 사유’의 단면을 보여준다. 가령 1917년 혁명은 레닌이 술회하는 것처럼, ‘극도로 특이한 역사적 상황의 결과’였다.(36) 정세의 사유는 알튀세르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다른 ‘열린 길’을 제시한다. 예컨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구조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는 주체를 설정했다는 세간의 이해와는 전혀 다르게, 알튀세르는 그 구조가 정세적인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개입해갈 수 있는 영역임을 언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홀이 동의하는 것처럼, 알튀세르주의를 일컫어 ‘이론의 빈곤’이라했던 톰슨의 결점은 알튀세르가 배태한 진정한 진전에 대해 인식할 수 없는 무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40)


4. 이데올로기의 정식화 : 알튀세르는 기존에 유령처럼 떠돌던 이데올로기 개념을 정식화했다. 단, 그의 논의가 속류맑스주의와 달랐던 점은 ①이데올로기가 계급적 환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점은 과잉결정의 사유에서 확인한 바 있으며, 상대적 자율성 테제로도 이어진다), ②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허위의식’으로 치부하지 않다는 점, ③이론에 대한 지위를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영역으로 본다는 점이다. 가령 (이데올로기적인) 이론과 (그로부터 자유로운) 대문자 이론의 구분. 그러나 여기에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이론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논점이 뒤따른다.(40~42)


5. 재생산, 이데올로기와 지배 :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알튀세르는 재생산에 무게를 둔다. 사회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홀이 여기서 제기하는 첫 번째 논점은 이 대목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는 점이다.(44) “이것은 영구히 지배체계에 종속될 수 있는 노동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43) 적어도 여기에는 두 가지 논점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홀이 제기하듯이 이데올로기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만 있는 것인가. 즉,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투쟁하고 서로 경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둘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가. 즉, 피지배계급은 왜 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순순히 동의 혹은 호명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6.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토대로 실천된다. 잘 알려진대로 국가장치라는 점에서 여기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테제가 도출되는데, 홀은 그보다는 ‘언어와 행동’이 이데올로기의 유물론적 메커니즘의 매체로 작용하는 사실에 주목한다.(45) 실제로 알튀세르는 추상과 사유를 관념적인 것으로 치부한 적이 없다. 어쨌든 홀은 여기에서도 알튀세르에게 난점이 따른다고 지적하는데, 알튀세르가 국가와 시민사회를 동일시한다는 점 때문이다. 홀에게 있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알튀세르에게선 시민사회라는 ‘자율적인’ 영역이 국가라는 타율적인 영역으로 소구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아주 복잡한 재생산적인 과정을 거치는 시민사회의 ‘자유로운 활동’의 결과가 왜 시종일관 이데올로기를 ‘지배 속의 구조’로서 재구성하는가 하는 것이다.” (46~48)


7. 주체와 호명, 사회학과 정신분석 : 세 번째 중요한 논점은 이데올로기와 주체성 그리고 주체화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들에게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하며(이것은 엥겔스의 논법이다), 구체적 개인으로 호명한다(이것은 라캉의 논법이다). 이 문제에 대해 홀이 명확하게 정리하지는 않고 있지만, 주체성과 주체화에 관한 이러한 두 특성은 다분히 균열적이다. 왜냐하면 전자를 따를 경우 재생산이라는 문제설정 하에 푸코식으로 “특정의 담론구성체 내에서의 발화의 조건들을 탐구”하게 되는 반면, 후자를 따를 경우에는 무의식이라는 문제설정 하에 라캉식으로 “주체와 주체화가 구성되도록 한 무의식 과정에 대해 탐구”하게 되기 때문이다.(50, 57~59) 이것이 균열적이라는 지적은 알튀세르의 이 두 문제설정이 이원론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의 동요」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맑스주의가 사회학과 정신분석 그리고 집합성과 개별성이라는 이질적 속성들을 봉합해버린 불안정한 논의틀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8. 재현체계, 이데올로기, 살아냄live-out : 홀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의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부분은 ‘재현체계’에 관한 논설에 있다. “이데올로기를 ‘재현체계들’로 규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담론적이며 기호학적인 특성을 인지하는 것”인데,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관념들이 단지 공허한 공간의 주변을 떠돌지는 않음을 상기”시켜줌을 인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그곳에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51~52) 물론 이 재현체계는 일방향적이지 않다. 홀은 이어서 그 체계가 ‘체계들’, 즉 복수임을 상기한다. 이렇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관념으로 작동하지 않고 “담론적 연계에서, 군집 내에서, 의미론적 영역 내에서, 그리고 담론의 구성체 내에서 작동한다. (중략) 이데올로기 재현들은 서로를 함축한다―불러일으킨다.”(53~54) 또한 홀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살아간다’는 맥락은 우리 인간이 문화 내에서 의미와 재현을 경험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9. 알튀세르의 재발견 : 알튀세르 이래로 대중사회를 연구하는 흐름에는 무의식에 관한 이상한 열기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 홀의 지적처럼,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테제가 사실상 ‘무의식은 언어, 문화, 성적 정체성, 이데올로기 등으로의 입문과 같은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위력을 발휘하는 듯하다.(59) 여기서 홀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생각했던, 초기의 보다 단순하고 보다 생산적인 방식으로 돌아가자”(60)고 제안한다. 「모순과 중층결정」에서처럼(60), “어떤 특정의 사회구성체 내에서, 계급, 인종, 성이 서로에 접합하여 특정의 응축된 사회적 위치를 형성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67) “이것은 구성, 규제, 사회적 투쟁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이기 때문이다.(71)


10. 알튀세르에 대한 애증 : 끝으로, 홀은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알튀세르의 주장이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기능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역시 하나의 지배적 사회가 손쉽고, 부드러우며, 기능적으로 그 자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를 설정한다. 이데올로기가 항상 준비되어 귀속되어 있다는 주장은 지속적이고 끝없는 과정인 언어와 이데올로기 내에서 강조의 이동에 관하여 충분히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홀은 알튀세르, 정확하게는 알튀세르주의를 거의 완전히 정리해버린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람시주의적 계기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궁금증은 그치지 않는다. 문화영역에서 대중들 그러한 역능화empowerment는 결과적으로 문화연구의 정치적 무기력증을 유발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관하여, 우리는 일종의 재정식화를 요청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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