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Louis Althusser Assaults the Lacanian Fortress (알튀세르, 라캉의 요새를 급습하다)
II-1. 문화이론 2006. 5. 30. 15:15Louis Althusser, “Complementary Remarks on the Meeting of March 15, 1980, at the Hotel PLM Saint-Jacques”, in “in the Name of the Analysands...”, in Writings on Psychoanalysis: Freud and Lac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135-143
루이 알튀세르, 「보론 : 1980년 3월 15일 PLM 성-자크 호텔에서의 모임에 대하여」
김성윤/2006년 5월 29일
나는 3월 17일 르 마팅(Le Matin)의 헤드라인처럼 “라캉의 요새를 비난”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라캉에 대해서도, 그의 결정에 대해서도, 그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가 기초하고 나중에는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재조직을 목적으로) 해산시킨 조직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의 논의는 정신분석보다는 ‘철학’이라 부르는 것, 심지어는 ‘프랑스 철학’과 더 많이 관계하고 있다. (135)
그 모임에서 나는 내 생애에서 쉽사리 갖지 못했던 그런 경험을 ‘피부로’(in vivo) 절감했다. 라캉의 기명된 제자들로 인한 경험은 문자 그대로 나로 하여금 말문을 막히게 했다. 우선 거기에는 라캉이 말했던 걸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제가 없었다. 나를 당황케 했던 한 마디 말만은 제외하고, 내가 들었던 바로는 놀라울 것도 없었다. (136)
사정이야 어찌됐든, 상세한 것은 넘어가고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서너 가지 논의로 요약이 가능하다. ① 즉각적이고 법률적이며 정치적인 문제 : 총회에서의 학파 해산에 대한 투표. ② 라캉의 사유 : 보완되고 정정될 수도 있겠지만, 비판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 ③ 정신분석자의 위상 :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보다는, 그들이 어떤 존재라고 믿는지. ④ 가장 중요한 이슈로서 분석인의 위상 : 분석 작업에서 분석자가 자기 임무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하게 드러날 수 있고, 아니면 막다른 길에 부딪쳐 단순히 옴짝달싹도 못하거나 자살로 귀결될 수도 있다. (137)
토요일 날 유일하게 다뤄졌던 것은 바로 첫 번째 것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불안감(사실 어떤 중재로써만 간신히 표면화됐던)이 예외적으로 있었는데, 이로써 뭔가 이상한 질문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겪었던 당황스러운 경험이다. 휴식 시간 동안 나는 거의 모두가 임상 분석자인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떠들썩하고 지적이었으며 비판적인 사람들로, 내 앞에서만 말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실제로 라캉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이기도 했다. (138) 그런데 그들은 토론에 참석하기만 하면 단지 침묵하기만 했으며, 휴회 동안만 말을 할 뿐이었다. “조용해야죠. 조용해야 해요. 왜냐면 두렵거든요.” 그런데 누가 두렵단 말인가? 어떤 이에게 그건 라캉이었고, 어떤 이에겐 그 자신이었으며, 또 어떤 이에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내가 물었다. “그렇게 두렵다면 대체 여기는 왜 왔습니까?” 한 사람이 말해주기를, “그건 분명해요. 두려워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으로 우릴 확실히 안심시킬 수 있거든요.”
두렵고자 하는 욕구는 능동집단과 보호집단의 평온함(모성적인 것 등등)을 제공하는 믿음과 사고와 행동의 공동체에 소유되는 이유로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소속의 결과로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공동체는 그러한 두려움과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안심시킬 수가 있다. (139)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타자들에게 개방적이면서도 종교적으로 내맡기는 것이다. 이 ‘어머니’(Mother)는 어쩌면 라캉일 수도 있다. 이 ‘어머니’는 또한 아이처럼 발화하고 그로써 자기 자신을 아이로서 취급하는 존재(the one)일 수도 있다(나는 의도적으로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라캉이 ‘아버지’의 관점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저러한 개인의 무의식적 환영들을 발동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러한 단언은 순진하고 단순한 몽매주의(obscurantism)라고 말하겠다. (140) 그날 모임이 ‘어머니’ 앞에서 불안에 떨고자 하는 욕구의 상연에 지나지 않은 환영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러한 것들이 단순한 환영들이 아닐지라도, ‘어머니’로부터 위로와 안심을 얻고 궁극적으로는 돌봄과 보호를 받는 데 필요한 예의범절에 대해 ‘공적인 불평’이나 비난을 하는 상황으로써 ‘소환된’(스승에 의한 그 모든 제자들)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여기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① 마침내 폭발한 프로이트 학파의 단계적인 위기. ② ‘공인 받은 날조자들’(J. A. 밀레르 같은 사람)을 배제하려는 라캉의 욕구. ③ 라캉의 사유와 관련하여 세계적인 규모로 분석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맞물리는 갈등 : 이것이 유효한지, 이론인지, 사유인지, 하나의 철학인지, 철학 일반인지 등. ④ 분석자 일반의 문제 : 프로이와 라캉 또는 다른 이들간의 관계, (141) 공개된 절단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분리와 갈등, 학파를 해산시키는 일개 개인(라캉)의 결정. ⑤ 분석인들의 문제 : 사실상 분석자가 행하고 있는 역전이(counter-transference)의 무의식적 결과들.
분석인들은 그 자신이 아니라 분석자와의 관계 속에서 무방비에 있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로 분석자가 스스로 진정성 획득을 추구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그는 단지 이 사람 저 사람(예컨대 라캉)의 생각으로써만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 문자성, 그 이론-형식주의적인 차림새(pretension) ― 이것은 프로이트의 텍스트들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참된 진리로서 사유(라캉의 그것)의 내부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마치 분석자가 시간을 자기 혼자서만 잴 수 있는 것처럼 예정된 시간이나 합의된 시간 없이 세션이 구성된다(그렇다면 대체 분석인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누가 자기 맘대로 한다는 것인가?). (142)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긴 한데, [양자 간에 합의가 있더라도] 그것은 분석자가 제안하고 환자가 명백하게 수용한 계약의 형식으로서 자리 잡는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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