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뛰세르,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기원들의 불균등성에 관하여)」, 이종영 역, 『맑스를 위하여』, 백의, 2002
김성윤/2006년 5월 8일
모순이 과잉결정으로 구조화된 전체,그리고 정세적판단과 이론적 실천
◎ 나에게 가해진 비판과 이 글의 연구 질문
- 첫째, 맑스와 헤겔을 가르는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 ⇒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에서 발견한 ‘합리성’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 둘째, ‘과잉결정된 모순’의 개념으로써 맑스주의 역사관의 ‘일원론적’ 관점을 ‘다원주의적’ 관점으로 대체 ⇒ 맑스주의적 변증법을 헤겔적 변증법으로부터 엄격히 구분시키는 ‘고유성’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1. 실천적 해결과 이론적 문제, 왜 이론인가?
◎ 이론적 문제의 실천적 해결 : ‘전복’이 무엇이며 둘(맑스주의 변증법과 헤겔 변증법)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론적 문제. 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맑스주의적 실천 속에서 실천적으로 해결된 상태로 존재. 문제와 이론적 해결의 형태 하에서 언표되어야 하는 것은 이미 맑스주의의 실천 속에 존재. 따라서 이론적 해결은 실천적 상태에서 존재하는 ‘해결책’을 종국적으로 이론적으로 언표하는 것. 이러한 언표는 자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이론적 노동을 요구한다. 즉 인식의 생산과 환상의 비판을 필요로 한다.
◎ 실천 : 소여된 특정한 일차 재료를 특정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모든 과정
◎ 사회적 실천 : 하나의 특정한 사회내에 존재하는 실천들의 복합적 통일체. 노동활동을 통해 자연을 유용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실천이 종국적으로 결정적.
- 정치적 실천 : 사회적 관계라는 일차 재료를 특정한 생산물(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 이데올로기적 실천 : 종교, 도덕 등 망라. 인간들의 ‘의식’이라는 자신의 대상을 변형
- 이론적 실천 :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이러한 예비적 인정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모든 이론에 필수불가결한 조건. ‘경험적’, ‘기술적’, ‘이데올로기적’ 등의 다른 실천들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일차자료(표상들, 개념들, 사실들)에 대해 노동. 전(前)과학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적 실천 + 과학의 이론적 실천. ->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절단’ 용어의 가능함. 불연속적.
◎ 이론 : 과학적 성격의 모든 이론적 실천. 하나의 실재의 과학의 특정한 이론적 체계를 ‘이론’이라고 부름
- <이론> : 대문자 이론(Theory). 일반이론. 기존의 ‘경험적’ 실천들의 이데올로기적 생산물을 ‘인식들’로 변형시키는 기존의 이론적 실천들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구성되는, 실천일반의 <이론>. 변증법적 유물론과 하나를 이루는 유물론적 변증법.
◎ 이론이 실천에 중요한 이유(이중의 의미) : 이론은 자신에게 고유한 실천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중요. 실천 일반의 본질과 나아가 사물들 일반의 변형과 ‘변전’의 본질에 있어 일반 <이론> 자체(변증법)가 관계함.
- 인식론, 과학사, 이데올로기사, 철학사, 예술사의 맑스주의적 이론적 실천을 구성하는 데에는 <이론>에서 사용하는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 아님. 즉, 변증법적 형태들의 적용이라는 교조주의를 버리고 기존의 이론적 실천의 자생성에 의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함.
- 왜냐하면 과학의 역사에서 관념론, 즉 포위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영원토록 보호받고 있는 순수한 이론적 실천, 완전히 벌거벗은 과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순화와 자유화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즉 관념론에 대한 부단한 투쟁을 대가로 획득될 수 있는 것. <이론>(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투쟁의 이유들과 목표들을 밝혀줄 수 있고, 다른 어떤 방법과도 달리 세계로 인도해줄 수 있다.
2. 작동중인 이론적 혁명
◎ 맑스주의적 이론적 실천 : 맑스주의 변증법의 고유성은 ... 자신이 작동하고 있는 맑스의 이론적 실천 속에 존재. 맑스의 이론적 저작 『자본론』 속에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 변증법을 실천적 상태에서 발견한다. 이를 이론적 상태에서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전복’에 대한 맑스의 ‘통지들’.
◎ 맑스주의적 정치적 실천 : 1917년 혁명과 레닌의 성찰들 속에서 실천적 상태의 맑스주의적 변증법을 발견. 계급투쟁의 실천이 방법 또는 <이론>이라는 이론적 형태 하에서 반성되지 않았다. ‘다원주의’, ‘과잉경험주의’, ‘요소들의 이론’ 등의 비판. But, 레닌의 이 텍스트들은 이론적 무게를 갖는 분석의 의미를 가짐. 정치적 실천 일반의 장, 대상 또는 고유한 일차재료의 구조에 대한 분석. 정치적 행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반적인 이론적 질문에 실천적으로 대답. 제국주의라는 ‘당면 시점’의 존재 자체에 다름 아닌 모순들의 전위들과 응축들 그리고 그 역설적 통일체 속에서 국면의 구조분석. ‘가장 약한 고리’의 이론은 ‘결정적 고리’의 이론과 하나이자 동일한 것. 맑스가 그토록 심층적으로 말한 것처럼 변증법을 완수된 사실의 이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방법으로 삼도록 해주는 모순의 그 고유한 차이.
◎ 맑스에 의한 헤겔 변증법의 ‘전복’의 의미 : 맑스주의적 실천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 그 해결책은 맑스주의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실천적 상태에서 존재한다. 이제는 그 해결책을 이론적 형태 하에서 언표해야 한다.
3. 이론적 실천의 과정
◎ 추상화, 이론적 노동 : “직관들과 표상들을 개념으로 변형시키는 구성적 노동의 생산물.” 이 노동은 ‘보편성’의 노동이 아니라, 선결적인 하나의 보편성에 대한 노동, 이 보편성에 추상화나 ‘철학적인’(이데올로기적인) 시도를 금지하는 것과 이 보편성을 자신의 조건에, 과학적으로 고유한 하나의 보편성의 조건에 강제로 결부시키는 것을 그 목적과 결과로 하는 노동.
- 일반성I : 과학의 이론적 실천이 고유한 ‘개념들’로 변형시킬, 즉 인식이라는 ‘구체적인’ 또 다른 일반성(일반성III)으로 변형시킬, 일차재료를 구성. 이데올로기적 개념들로 구성되었거나 아니면 과학적 ‘사실들’로 구성되었거나 이미 과학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과학 이전의 단계에 속하는 개념들로 구성된 일차재료.
- 일반성 II: 그렇다면 누가 노동? 과학이 노동한다는 표현. 생산수단에 상응하는 계기, 수준, 층위. 주어진 시점에 있어서 다소간 모순적인 통일체가 과학의 ‘이론’, 즉 과학의 모든 문제가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장을 규정할 ‘이론’을 구성하는 개념들의 몸체에 의해 구성.
- 이론적 실천은 일반성I에 대한 일반성II의 노동에 의해 [구체적인] 일반성III을 생산하는 것.
- 일반성I과 일반성III 사이에는 본질적인 동일성이 없다. 일반성II에 의한 노동, ‘추상’을 ‘구체’로 이행시키는 노동은 이론적 실천의 과정에만 관계. 다시 말해 완전히 ‘인식 속에서만’ 진행된다. 인식으로서의 사고된 구체성과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현실적 구체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구체성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명제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여야 한다. 인식으로서의 구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은 완전히 이론적 실천 속에서만 진행된다.
◎ 포이어바흐의 혼동 : 그러한 혼동은 정확히 포이어바흐의 혼동, 포이어바흐적 시기의 맑스의 혼동. 그러한 혼동은 오늘날 유행하는 소비의 이데올로기의 공통된 장소들에 자양분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종종 너그러운 저항적 미덕의 ‘자명성’에 사로잡힌 자들이 출구없는 이론적 궁지 속에서 길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이론과 과학에 속하는 추상화를 실재 자체로서의 구체성에 종국적으로 대립시키는 비판은 아직 이데올로기적 비판이다. ... 이 관념은 자신이 ‘전복’한다고 선언한 이데올로기 속에 머무른다. 즉, 일반적 추상화가 아니라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추상화 속에 머무른다.
◎ 헤겔의 혼동 : (1)과학적 인식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을 ‘구체성(실재)의 발생과정 자체’로 간주. (2)인식 과정의 출발점에 나타나는 보편적 개념을 인식과정의 본질이자 동력으로, 즉, ‘스스로를 탄생시키는 개념’으로 간주.
◎ 포이어바흐의 비판 : 헤겔의 근본적인 악은 ‘사변적’ 환상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포이어바흐에 의해 이미 폭로된 그 사변적 환상은 사고와 존재를, 사고의 과정과 존재의 과정을, ‘사고된’ 구체성과 ‘실재의’ 구체성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개념의 자기발생과정을 실재의 자기발생과정으로 간주하는 추상화의 죄. 결국, 추상화의 나쁜 용법(관념론적이고 사변적인)이 있어서 우리에게 그 대립물로서 추상화의 좋은 용법(유물론적)을 지시해준다. 포이어바흐는 추상화를 해방적 ‘전복’을 통해 뒤집어 놓는다. (일반적) 개념이 과일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구체적) 과일들이 과일의 개념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 맑스의 재비판 : 우리는 이러한 ‘전복’ 속에 내포된, 이러한 ‘전복’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혼동에 동의하지 않음. 맑스는 「1857년 서문」에서 “그들의 개인성들을 추상화하면서” 그들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올바른 추상화에 의한 개념생산이라는 경험주의적 모델과는 어떠한 관련도 갖지 않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 즉, 과학적 노동은 ‘구체적 주체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성I>에서 출발한다.
- 그렇지만 <일반성I>은 과연 그러한 것인가? <일반성I>은 헤겔이 사용했던 올바른 추상화에 의해 생산된 것. 인식의 선결적 단계. 역사적 유물론에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은 차라리 경험주의적이고 감각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일반성I>은 경험적, 기술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상이한 수준의, 구분되는 다양한 구체적 실천들이 항상 개입되는 작업의 복합적 과정의 결과. 인식이 이데올로기와 단절을 하지 않은 한, 모든 <일반성I>은 사회적 전체의 존재에 핵심적인 근본적 실천들 중의 하나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심층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구체적 개인들로부터 그들의 순수한 본질을 추출한다는 추상화 행위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신화.
- <일반성I>은 추상화가 추출해내는 대상의 본질에 본질적으로 부적합. 이론적 실천이 <일반성I>의 <일반성III>으로의 변형에 의해서 드러내고 제거하는 것이 바로 이 부적합성. 따라서 <일반성I> 자체가 ‘전복’이 전제하고 있는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모델을 부정. (노동되는) 일반성I에 대한 (노동하는) 일반성II의 우위, 즉 ‘이론’의 우위에 대한 몰인식, 이것이 바로 맑스가 비판하고 있는 헤겔적 관념론의 토대 자체. ‘청산’(reglement). 이데올로기를 전복해서 과학을 획득하는 것이 아님.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을 버리면서, “또 다른 요소들 속에”, 새로운 문제틀의 장 속에 새로운 이론의 활동을 정립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을 획득할 수 있다.
4. ‘이미 주어진’ 구조화된 복합적 전체
◎ 모순의 고유성과 복합성 : 우리는 이제 모든 모순의 고유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아니다. 우리는 아직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고유성이 아무런 일반성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것, 최소한 이데올로기적 일반성의 고유성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고유성은 <일반성III>의, 인식의 고유성일 것이다.
-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들. 동일한 과정 속에서의 여러 가지 모순들의 존재를 가정함. 모순들간의 복합적 과정
-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 각각의 모순 속에서의 복합성
- 모순의 불균등 발전. 마오의 분석에 있어서 어떠한 복합적 과정도 우리에게 단순한 과정의 발전인 것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복합적 과정은 복합적 과정 그 자체의 결과인 것처럼 주어진다. 복합적 과정은 따라서 항상 주어진 복합성인 것이다. 이는 결코 기원적인 단순함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구조화된 전체
- 맑스는 “항상 사회발전의 특정한 단계에서의 생산,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생산이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즉 구조화된 사회적 전체 속에서의 생산이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생산’의 단순한 보편성의 기원으로, 그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순한 형태 하에서 경제학적 관점에 의해 포착된 ‘노동’은 이러한 단순한 추상화를 발생시키는 관계들만큼이나 현대적인 것이다.”
- 특정한 단순한 범주들의 경제적 존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조화된 전체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본질이건 범주건 간에 단순성의 순수한 존재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구조화된 ‘구체성’, 존재자들, 과정의 존재에 관계한다.
- 바로 이러한 근본적 원리가 모순의 헤겔적 모태를 영원히 거부하는 것. 헤겔적 변증법적 모델=‘두 대립물들의 단순한 과정’. 즉 두 대립물로 양분되는 단순한 기원적 통일체를 필요로 함. 무와 동일한 기원을 무한히 [다시] 시작하고 복원하겠다는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주장.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기원적인 단순한 통일체를 갖지 않고, 구조화된 복합적 통일체의 항상-이미-주어진-것을 갖는다(맑스의 「1857년 서문」, 마오의 1937년 텍스트).
5. 지배하는 구조: 모순과 중층결정
◎ 지배하는 구조 : 하나의 모순이 그 속에서 다른 모순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모순이 그 내부에 위치하고 있는 복합성이 구조화된 통일체여야 한다는 것과 그 구조는 모순들 사이의 뚜렷한 지배-예속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 복합성 자체의 통일체. 이 복합적 전체는 하나의 지배적인 접합된 구조[절합구조]의 통일체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이 특유한 구조가, 마오가 핵심적인 것으로 묘사한 모순들 사이와 모순들의 측면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관계를 궁극적으로 토대짓는 것.
◎ 헤겔적 총체성 비판 : 헤겔적 통일체는, 자신의 모든 표현들 속에서 존속하고 따라서 자신의 복원을 준비하는 소외 속에서도 존속하는 그 단순한 원리의 현상이자 자기 발현이다. 헤겔의 총체성에 따라 형상화된 모든 구체적인 차이는 긍정되자마자 부정. 그 차이들은 결국 총체성의 단순한 내적 원리의 소외의 ‘계기들’에 불과하기 때문. 결국 어떠한 특정한 모순도 결코 지배적이지 못하다.
- (1) ‘영역들’에 외관상으로만 접합, (2) 자신의 복합성의 구조를 통일체로 가지고 있지 않음 (3) 실질적 복합체를 통일체이도록 해주고 그 구조를 변형하는 실천, 즉 정치적 실천의 실질적 대상이도록 해주는 절대적 조건으로서의 지배하는 구조를 결여.
◎ 지배하는 구조의 ‘반영’으로서 모순은 ‘변이’ : 모순의 존재조건의 모순 자체 내에서의 반영, 복합적 전체의 통일체를 구성시키는 접합된 지배적인 구조의 각각의 모순 내부에서의 반영이야말로 맑스주의 변증법의 가장 깊은 특징이며, 내가 ‘과잉결정’이란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 것. 과잉결정으로 부를 것을 내가 제안했던 이 ‘반영’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이론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그것 [반영]의 현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그것[반영]을 고립시키고 확인해내서 이름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체성의 ‘불변항’으로서의 지배하는 구조의 하나의 ‘변이’이도록 하는 관계 그 자체이다.
◎ 모순들의 불균등성과 대립물들의 동일성의 성질
- (1) 규정된 조건들 속에서 하나의 대립물이 다른 대립물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 모순들 사이에 그리고 그 측면들 사이에 역할이 바뀌는 것(전위)
- (2) 실질적 통일체에 있어서 대립물들의 ‘동일성’(응축). 다시 말해, 주요모순이 부차적으로 되고 부차적 모순이 주요모순이 되며, 주요측면이 부차적으로 되고 부차적 측면이 주요측면이 된다는 것.
◎ 모순과 투쟁 : 모순이 동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맑스주의 이론에 있어서 모순이 복합적 전체의 구조의 특정한 지점에 위치한 실제적 투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지배하는 구조에 있어서 모순들의 현재의 관계에 따라 충돌의 장소가 변화한다는 것. 전술적 장소에서의 투쟁의 응축은 주요모순의 전위와 분리불가능.
- 이로써 시점들, 즉 ‘비적대적’, ‘적대적’, ‘폭발적’ 시점들 사이의 핵심적 구분이 설명 가능. ‘비적대적’ 시점은 전위가 지배적(질적 도약의 환유적 형태), ‘적대적’ 시점은 응축이 지배적(계급갈등 혹은 이론적 위기), ‘폭발적’ 시점은 전체의 해체와 재형성, 즉 질적으로 새로운 토대 하에서 전체의 전반적인 재구조화를 초래하는 불안정한 응축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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