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뛰세르, 「모순과 중층결정」, 이종영 역, 『맑스를 위하여』, 백의, 2002

김성윤/2006년 5월 8일

헤겔변증법을 전복하는 모순의 중층결정성

◎ 변증법의 전도 :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머리가 밑에 있다. 신비적 외피 속에서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복해야 한다.” 여기서의 ‘전복’은 헤겔에 대한 일반적인 ‘전복’, 즉 있는 그대로의 사변철학의 전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독일이데올로기 이후 이러한 전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문제삼아지는 것은 ‘변증법’이다.

- 합리적 핵심이 변증법이고, 신비적 외피가 사변철학이라면 이를 벗기기만 하면 변증법만 남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맑스는 껍질을 벗기는 것과 전복이 하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이 추출을 통해 ‘무언가’ 전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관념론에서 추출된 변증법은 ‘헤겔변증법의 정반대’가 된다. 관건이 되는 것은 헤겔로부터 변증법을 되찾아서 관념이 아닌 삶에 적용하는 것. ‘전복’은 변증법의 ‘방향’의 전복이 될 것.

- 결국 ‘신비적 외피’란 단순한 ‘사변철학’, ‘세계관’, ‘체계’가 아니라, 바로 변증법 자체. “변증법은 헤겔의 손안에서 신비화를 거친다.” 신비적 외피는 헤겔 변증법의 실체를 더불어 구성하는 내적 요소. 변증법의 해방을 위해선 첫 번째 껍질(체계) 외에, 변증법을 그의 몸에 붙어 있는 두 번째 외피, 분리불가능한 고유한 피부이자 그 자체가 그 원리에 있어서까지 헤겔적인 두 번째 외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삼아지는 것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추출이 아니다. 실질적으로는 탈신비화이며, 추출한 것을 변형시키는 작업.

- 결국 변증법의 ‘전복’은 동일한 방법론이 적용되는 대상의 본질(헤겔은 이념세계, 맑스는 실제세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의 본질이라는 문제, 즉 변증법의 고유한 구조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방향’의 전복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변증법의 구조들의 변형이라는 문제. 이 결론은 부정, 부정의 부정, 대립물의 통일, ‘지양’, 양질전화, 모순 등등의 헤겔 변증법의 근본적 구조들이 맑스에 있어서는 헤겔에게서 가졌던 것과는 상이한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내포한다.


◎ ‘약한 고리’와 레닌의 이론적 성찰 : 러시아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러시아를 넘어서는 이유, 즉 제국주의 전쟁과 더불어 인류가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상황에 들어섰기 때문. 몇 가지 객관적인 상황은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인 러시아에서만 혁명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는 러시아가 제국주의적 ‘국가들의 체계’에서 가장 약한 고리였기 때문. 레닌은 러시아혁명의 객관적 조건들을 포착. 제국주의적 사슬의 약한 고리에 대한 결정적인 주관적인 조건들을 약한 고리가 없는 사슬인 공산당 속에 창출.


◎ 일반적 모순+정황들+흐름들 : 일반적인 모순을 통해 혁명이 직면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혁명적 상황’을 초래할 수는 없다. ‘정황들’과 ‘흐름들’이 서로 융합되어 하나의 단절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축적되어야 한다. 이런 ‘정황들’과 ‘흐름들’은 일반적인 모순의 단순한 현상 이상으로, 모순의 대립항들 중 하나인 생산관계로 도출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모순의 존재조건이기도 하다.


◎ 모순의 원리적 과잉결정 : ‘모순’은 사회적 몸체 전체의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자신의 존재의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층위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다. 모순은 그 자체가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층위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결정적인 동시에 결정받고 있고, 자신이 추동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수준들과 다양한 층위들에 의해 결정받고 있다.


◎ 헤겔의 모순론 비판 : 헤겔적 모순은 실재적으로 과잉결정되어 있지 않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모순은 단순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대단히 복합적인 것. 그러나 이러한 복합성은 실질적인 과잉결정의 복합성이 아니라, 과잉결정의 외양만을 갖는 누적적 내재화의 복합성.

- 과거의 모든 의식은 현재 속에서 폐기되고, 보존된 ‘과거’와 ‘세계’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의식은 ‘세계’에 대한 의식이지만, ‘세계’는 잠재적이고 잠복적으로 여백에 머물러 있다. 결국 의식은 자신의 지양된 본질들의 세계들을 과거로서 간직한다. 과거는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미래의 내적 본질이며, 의식에 외재하는 진정한 규정성이 아니라 의식 자체의 자기현존.

- 결국 원환들의 원환으로서의 의식은 단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중심만이 유일하게 의식을 규정한다. 의식의 본질이 다른 원환들에 의해 과잉결정될 수 있으려면, 이 원환들은 의식의 중심과는 다른 중심을 가져야 한다. 즉, 탈중심화된 원환들이어야 하는데 헤겔은 그렇지 못하다.

-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이는 더 명확해지는데, 결정성들은 모두가 합쳐져서 하나의 기원적인 유기적 총체성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구체적 결정성들의 진리로서 유일한 내적 원리 속에 반영되기 때문. 하나의 내적원리는 결국 이 세계의 종교적 또는 철학적 의식, 즉 이 세계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이 세계의 자기의식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의 다름 아니다. 헤겔적 모순의 단순성은 한 민족의 이러한 내적 원리의 단순성의 반영에 불과한 것.


◎ 과잉결정된 모순 : 자본-노동의 모순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이 모순이 그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구체적 역사적 정황들과 형태들에 의해 항상 고유화되어 있음. 헤겔적 모순에 대면한 맑스주의적 모순의 고유성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과잉결정. 모든 모순은 역사적 실천 속에 현존하고 맑스주의의 역사적 경험에 있어서 과잉결정된 모순으로 나타난다.


◎ 맑스의 모순의 구조가 맑스의 사회관과 역사관과 연결되는 필연적 연관성

- 헤겔의 사회관은 18세기 정치이론과 정치경제학의 성과들을 재수용한 사회관. 모든 사회는 두 가지의 사회, 즉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물질적 삶과 정신적 삶으로 구성된다는 것. 헤겔에게 물질적 생활이란 이성의 간지에 불과, 국가라는 정신적 생활에 의해 움직인다.

- 경제주의 기술주의는 헤겔의 이러한 문제를 헤겔의 용어들 사이의 관계를 뒤집는 것으로 해결. 본질을 현상으로, 현상을 본질로 바꾸고 헤겔적 용어들은 보존한 것이다.

- 그러나 맑스는 사회에 대한 헤겔적 모델을 전복. 다른 용어로 헤겔의 용어를 대체. 용어들 사이를 지배하고 있던 관계를 뒤엎어 버렸다[생산양식과 최종층위,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등]. 결국 엄격성의 외양 하에서 ‘전복’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osted by 김성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