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윤소영 역,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2002

김성윤/ 2006년 5월 22일


◎ 알튀세르의 ‘비동시대적’인 질문

- 반마르크스주의적 정통이라고 불러야 할 것뿐만 아니라 또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그 흐름에 거스르는 질문들. 여기서 그 질문들의 대상은 마르크스주의(이론으로서의)의 공산주의(정치적 운동 및 역사적 ‘경향’으로서의)에 대한 관계에 관한 것.


◎ 공산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인식

-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정의’가 전에 없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는 단지 공산주의로의 경향에 대한, 또 그것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이었던 한에서만 고유한 의미(그리고 독창적 ‘문제설정’)를 가질 뿐이라는 사실

-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항상 모든 착취와 억압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해방의 고유한 이름을 표상하며, 그러한 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것

-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에서 지배적인 진화주의적 이미지(사회주의적 이행의 최종 단계)나 묵시록적 이미지(투명한 사회)에 대해 점점 더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게다가 공산주의 그 자체의 이름으로). 결국 알튀세르는 시기구분과 투명성의 도식들에 대한 자신의 발본적 비판에 의해 “미래의 상태가 아니라 기존의 사태를 파괴하는 현실적 운동”이라는 정의에 이르게 됨.


◎ 알튀세르가 본 공산주의적 비판과 위기

- 마르크스주의의 ‘공산주의적’ 비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실천적으로 어떤 가치를 갖는가 라는 관념을 분명히 하도록 강제. 그렇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한정된 하나의 ‘생산양식’임과 동시에 모든 형태의 인간적 예속의 보편적이고 무한정인 ‘파괴’여야 함.

- 상이한 관점에서 이와 동일한 딜레마와 대결했던 코르쉬, 벤야민, 그람시, 그리고 루카치. 여기서 알튀세르와 청년 루카치 사이의 비교는 우회 불가능. 완벽하게 대칭적인 두 인물.

- 루카치 … ‘역사의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의식은 총체적으로 물상화되고 따라서 그 자체로서 부정되며, 공산주의에서 의식은 총체적으로 해방되고 따라서 실현된다.

-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의식의 통일성 속에서 실천과 결코 완전하게 일치할 수 없고, 이 때문에 ‘역사의 주체’의 가능성 자체가 소멸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는 적대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적 실천이 자신의 표상들과 항상 모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결국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을 내재적으로 정초할 것을 제안한 반면에,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통을 개혁하려는 시도들이 성공할 가망성을 믿지 않았던 알튀세르는 위기가 프롤레타리아적 정치라는 통념 자체를 다시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위기’를 적어도 철학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식화

- 공산주의가 역사의 외부에, 따라서 계급투쟁의 외부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변적 또는 종교적 신화. 공산주의가 현재의 역사의 과정일 뿐이라면, 그것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 그렇다면 역사의 진행 자체와 그 내부로부터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 계급투쟁에서 지배적인 것을 결정적인 것으로부터 실천적으로 어떻게 분리시킬 것인가?

- 이러한 수수께끼 때문에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에서 ‘비동시대성’을 역사적 시간의 본질 자체로 삼았던 것이다. ① 계급적대는 영원하고, 착취구조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계급적대의 형태들은 부단히 전화된다. ② 정치 일반의 영역 또는 ‘요소’는 이데올로기이다. ③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무의식이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식화들에게 양면적인 상, ‘건설적’인 동시에 ‘파괴적’ 상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기적 전위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들이 결국 무엇을 생산하는지, 모순적 결과에 이르는 것은 아닌지가 문제로 된다.


◎ 다른 정식화들과의 구별점

- 그는 마르크스에 의해 묘사된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관념론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비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도입하면서 역사유물론과 유일하게 양립 가능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제시. 마르크스에게 반대하여 마르크스를 작동시키는 전략.

- 알튀세르는 모든 존재와 의식의 ‘변증법’을 기각한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구조’ 이론에 ‘상부구조’ 이론을 추가하려고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생산’ 및 ‘재생산’이 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에 본래적으로 의존하는 과정임을 증명함으로써 구조 개념 자체를 전화시키려고 한다. 그 결과 사회구성체를 이원론적으로 표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 가지 모순적 계기들

- 먼저 철학적 논거에 따르면 개인들과 집단들의 행동에 유효한 ‘작용’을 바로 이데올로기에 부여하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현실(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의 ‘반영’으로 아주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념들 자체가 물질적이라는 것을, 또는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정신적 힘들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여기서 첫 번째 해결책(관념의 물질성?)은 의식 그 자체의 ‘표상적’ 통념에 의해 배제되는 반면, 두 번째 해결책(역사진행의 정신적 힘?)은 계급투쟁을 역사적 변화의 원인으로 삼는 마르크스주의적 테제들과 양립 불가능하다. 존재론적 악순환, 관념론의 고전적 딜레마.

- 정치적 논거에 관해서 보자면 마르크스의 입장은 이중적으로 부정적인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가 유일한 혁명적 세력이라면 그것은 발본적으로 착취되는 계급이기 때문임과 동시에 기존의 세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 없기 때문이라는 입장이었다(무소유와 무환상).

+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광의의 정치적 ‘당’으로 구성되어야 했을 때에는 이러한 이해가 유지될 수 없고 ‘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적 이데올로기’, ‘세계관’ 등과 같은 통념들이 출현. 프롤레타리아적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은 특히 징후적. 완전한 형용모순. 불가피한 표류 끝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발견되는 것. 이리하여 우리는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제도화됨. 다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가 그 자신의 이름으로 지배되는 계급이 되는 것.


◎ 무의식의 문제설정

- 알튀세르가 대안으로 제시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모든 ‘체험된’ 개인적 또는 집단적 관계의 일반적 ‘요소’는 가상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스피노자, 더욱이 프로이트의 철학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은 대립물이 아니다. 가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서로 침투하고 ‘침식’하며, 분리된 ‘세계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실들 속에서 ‘하나의 세계’로 인지하는 것을 함께 구성한다.

- 그렇다면 왜 이데올로기들이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이라고 말하는가? 이데올로기들이 수행하는 결합은 어떤 ‘주체’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또는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조건들(소유형태, 물질적 언어, 욕망, 성욕의 제약들)에 매번 의존한다. 이데올로기들은 실천을 가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무의식적 조건들이 그 속에서 가공될 수 있는 차별적인 역사적 형태들이다. 이러한 개념화 속에는 과학적 인식 또는 정치적 행동을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전혀 없다. 이는 허무주의적 또는 상대주의적 포기가 아니라 더욱 커다란 현실주의의 조건들이다. 문제는 인식과 자유 그 자체의 필연성의 정도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 정치이론과 절합의 출발점

- 이러한 철학적 개념화가 진정한 혁명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그 방법은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부여하는 것.

- 전적으로 형식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두 측면, 즉 이데올로기 일반의 중립적·대칭적 측면(모든 인간은 ‘이데올로기적 동물’이고 모든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일하게 ‘주체로 호명된다’)과 경향적·비대칭적 측면(‘계급적 이데올로기’ 또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성격‘이 존재한다) 사이의 대조로 제시된다.

- 이 두 측면들은 어떻게 접합되는가? [발리바르의 추론과 검토] 이데올로기들의 개인적 측면과 집단적 측면의 접합과 관련된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일반의 메커니즘은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개인들이 ‘주체들로 호명되는’, 또 개인들의 실천들이 그것들 덕택으로 제도들 속으로 삽입되는 상징적 준거들(신, 법칙, 민족, 혁명 등)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접합의 양상(이데올로기들의 기능작용은 기본적으로 초개인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역설적 테제의 추론 - 최종심에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 알튀세르의 입장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효과들을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 대부분의 사회학적 이론들은 [보편화가] 지배자들 자신의 경험이라고 답변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반대로 대답해야만 한다.

-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적 테제에 이르게 된다. 즉 최종심에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피지배자들의 가상의 특수한 보편화이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상’도 ‘소외’도 아니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사이의 구조적 적대의 부정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착취가 잠재적 모순을 내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도 잠재적 모순을 내포하게 된다. 피지배자들이 ‘위로부터’ 그들에게 보내진 그들 자신의 가상의 보편성을 곧이곧대로 믿거나, 또는 오히려 그들이 가상의 요구들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역사적 정세 속에서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우할 때, 그것이 혁명인 것이다.


◎ 이데올로기를 다시 정식화할 수 있다

- 결국 알튀세르가 제공하는 정치에 대한 비전은 ‘대중들’이 돌이킬 수 없도록 분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의 내재적 분열. 이것은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함.

- 또 ‘지배적 보편성’에 반대하는 하나의 반역으로서의 공산주의는 단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 또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즉 역사는 진보, 발전이 아니라 반복이다라는 알튀세르 사상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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