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 문화사회에 실렸던 글입니다.

논술과 구술 강요하는 사회


김성윤/2007.2.16


논구술(논술+구술) 강요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지일까.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취업준비생에 이르기까지 논술과 구술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입시생들은 입시 때문에, 취업준비생들은 취업 때문에 논술과 면접에 여념이 없다. 이제 인간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글을 얼마나 잘 쓰고 말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리게 되었다.


필자가 약 2년 동안 논구술 학원강사로 품을 팔던 동안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자녀들의 논술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논술 공부는 언제 시작하면 좋을지, 또 어떤 학원을 다니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필자가 논술이나 구술을 가르쳐주면 안 되는지, 갖가지 상담을 해오곤 했다(심지어는 대학교수들조차도 그랬다). 취업준비생들도 논구술 과외를 문의하기도 했다. 필자가 과외를 꺼리는 기미라도 보이면, 예상 주제 몇 개만이라도 말해달라거나 다른 강사를 소개해달라는 청탁도 있었다. 바야흐로 논술과 구술의 시대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4지선다와 5지선다가 인간 능력의 유일한 척도였던 이전에 비하자면, 주체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글쓰기와 말하기 문화는 흐뭇한 세태로 이해될 수도 있다. “자네는 물이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물은 최고의 선과 같습니다.”라고 답한 학생들은 줄줄이 탈락하고 “물은 셀프서비스입니다.”라고 답한 학생이 최고점으로 합격했다는 식의 에피소드들은 주입식/암기식 교육이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의아한 것이 있다. 우리 사회의 철옹성 같던 객관식 시험 체계가 어찌하여 이토록 한 순간에 변모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일견 이것은 하나의 혁신일 수 있다. 논술 체제는 우리 생애 전반에 걸친 노동하는 삶과 문화적인 감수성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인재를 재는 준거로서 시험의 성격은 변했다. 이제는 논술과 구술이 거의 모든 시험의 당락을 결정짓는 요소로까지 부각되고 있다. 2008학년도부터 수능시험은 등급제로 바뀌면서 자격시험으로 변모하게 되고, 입시생들을 변별하는 시험은 대학별로 치러지는 논술과 구술의 몫이 된다. 취업 현장에서도 면접에서 자기 PR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하느냐, 프리젠테이션을 얼마나 능숙하게 수행하느냐, 집단토론에 얼마나 활력 있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소위 ‘글로벌 인재’로서 평가 받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턱이 되는 고용(과 진학)의 현장에서 우리 사회는 유사 이래로 전례가 없는 활력과 역동성이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끝없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사실상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006년 교육부의 논술 강화 시행 지침이 발표된 이래로, 새로 개업하는 입시 학원의 절대 다수는 논구술 학원이 차지하고 있으며, 메가스터디나 유-웨이 같은 기존의 대형 학원들도 내신/수능/논구술 통합 교육의 모델과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취업준비생들은 ‘오로지 취업을 위하여’ 스터디를 조직하고 시사문제를 토론하며, 직장인들조차도 통근 길 광고판에 붙어 있는 화술 학원 프로그램에 눈길을 사로잡힌다. 단언컨대, 시험은 바뀌었으나 시험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나 우리 사회의 문화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풍경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변화와 그 속의 진부함이 사실상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성격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해 달라진 고용 체계로 초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1997년 이래로 우리 사회의 산업구조에는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어 왔다.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말 붐-업을 동반한 IT 업종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기존 산업분야에서 노동시장의 수요가 급감하면서 신규채용이 줄어들자, 요상한 ‘벤처 이데올로기’가 유포되었는가 하면 그 와중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TFT와 같은 새로운 기업문화(corporation culture)가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노동자와 예비노동자들이 ‘경영자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수당 없는 야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난 프로페셔널(전문직)이니까,’ ‘내가 일 안하면 우리 회사가 망하니까,’ ‘회사가 망하면 내가 가진 주식도 떨어지니까’ 등등의 언술로써 스스로를 위안한다. 물론 이러한 자기기만에는 몇 가지 물질적인 혜택도 있었다. 평사원 자신이 ‘우리사주’라는 예쁜 이름으로 스톡옵션을 가지고 있었고, ‘있을 수 없는’ 경영자 마인드로 인해 직장문화 역시 상명하달식의 위계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테헤란 밸리의 몇몇 기업에서는 “사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대신에 “님아, 결재 점 해 주삼.”이라는 말로 조직이 굴러 간다. 게다가 신규 채용 분야의 비중에서 생산직보다 서비스직이 더 많아지면서, 이러한 변화는 IT 업계를 넘어 일반 기업들로 점점 확산되는 경향이다.


또한 이 문제는 노동자 개인에 대해서는 업무 처리 능력에 대한 이해가 전환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주입식/암기식 교육체계에서 성장한 인재는 더 이상 새로운 기업문화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전문직이든 서비스직이든 새로운 인재는 무엇보다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하고(이것은 정말 무시무시한 말일 수 있다), 창의적이어야 하며 리더십(더 이상은 카리스마나 보좌능력이 아니다)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은 누구나 리더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며, 기업은 그러한 인재를 채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미 경쟁체제에 돌입한 대학들은 그러한 고용체제를 선도하거나 그에 적응하기 위해 ‘창의적이고 리더십 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데에 몰입한다. 실제로 각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리더십 연수 과정’이니 ‘글로벌 인재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면서 그러한 붐에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서 논술이 강화된다. 세상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직시할 수 있느냐, 스스로 숨어 있는 문제들을 탐색할 수 있느냐, 그리고 이를 능숙하고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항목들이 새로운 인재들의 필수요건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항목들이 교양과 덕목의 문제가 아니라, 강요의 문제가 되고 있고 그 배경과 초점이 ‘생산성의 향상과 제고’에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세상에 대한 주체적 경험, 문제설정과 문제제기의 능력, 그리고 문제해결 능력과 같은 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든 덕목들이다. 그런데 그 실상을 꿰뚫어보면 우리는 전혀 주체적이지 못한 주체적인 경험, 획일적인 문제설정과 문제제기의 능력, 그리고 진부한 문제해결 능력만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출제자들은 세상의 문제를 이해하라는 차원에서 논술 문제를 출제하겠지만, 입시생들과 학원 강사들은 여기서 세상의 문제를 끄집어내기보다는 ‘논술 문제’에 집중한다. “선생님,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요?”라는 질문 속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사례는 논술 교육이 이중적으로 비주체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얼핏 봐도 알 수 있듯이 학생들은 학원강사가 제시하는 해법에 의존하여 문제를 푼다.


즉, 첫 번째 비주체성은 학생들이 교사나 학원강사의 문제풀이 방식을 ‘암기’한다는 것이다. 가령, ‘글 <가>와 <나>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글 <가>의 관점에서 글 <나>가 옹호하는 역사관의 단점과 한계에 대하여 논술하시오.’라는 문제가 있을 때, 학생들은 자기 논술문 첫 번째 단락에는 ‘(가)와 (나)의 주제 요약’, 두 번째 단락에는 ‘두 지문이 공유할 수 있는 문제의식’, 세 번째 단락에는 ‘(가)의 입장에서 (나)의 단점과 한계 지적’ 등으로 개요를 짜도록 지도 받는다. 그렇게 하면, 맨 앞과 맨 뒤에 서론과 결론을 첨부하여 대략 800~1,200자의 논술문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입 방식이 언론에 회자되곤 하는 ‘천편일률적인 답안’을 만드는 첩경이다.


두 번째 비주체성은 학생이 가리키는 ‘이 문제’가 출제자가 의도한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논술 문제 그 자체’라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입시교육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출제자의 출제의도가 입시생들에게 전혀 관통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출제자의 의도가 ‘한중일 역사분쟁’에 관한 학생들의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에 있다손 치더라도, 학생들이 일차적으로 체감하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문제를 푼다.’라는 말만이 의미 있기 때문이다. 일선의 몇몇 뜻 있는 교사나 학원강사들이 ‘시험을 시험으로 대하지 말라’는 비법을 제시해주더라도, 우리의 입시사회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이다.


이러한 풍경은 구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술면접을 지도 받는 학생들은 제일 먼저 면접 당일의 차림새, 면접실의 문 여는 방법, 면접관에게 인사하는 방법, 면접관을 쳐다보는 방법부터 교육 받는다. 실제로 오늘날 면접을 보는 거의 모든 학생들은 면접관의 인중을 쳐다본다. 그래야만 손윗사람에 대한 대응력과 동시에 겸손함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토론을 하는 경우에도, 학생들은 토론주제를 심화시킴으로써 더 깊은 질문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다른 학생들보다 나은 언변과 카리스마로 경쟁에서 이기는 데에 집중한다. 토론이라는 장(場)에 입시라는 요소가 끼어들자마자, 그 토론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니라 논쟁으로 변질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강조하자면, 논구술은 이미 우리 사회를 가동시키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논구술 체계가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는 아무리 강조된들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들이 학생과 예비노동자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발성에 기인하지 않은 것이라면, 충분히 문제꺼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생각 이상으로 구조적인 문제일 수 있다. 대학교수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천편일률적인 답안’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학과 취업에 목매달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사회에서 논구술 시스템은 인간과 교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강박증에 불과할 수 있다. 창의성과 리더십이 이미 특정한 산업적 이해와 이데올로기적 흐름에 얽매여 있는 이상, 논구술은 그 자체만으로 해방구가 될 수 없다.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논구술 문제는 우리 생각하는 이상의 체계적인 차원으로 공고화되고 있다.

Posted by 김성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