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지 문화과학에 실렸던 글입니다.

대학문화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것1)


김성윤/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2004.2



1. 들어가며: 대학생?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대학생과 대학문화를 왜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대체 대학생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명될 수 있는 존재인가. 마찬가지로 오늘날 혼탁한 대학문화가 특정한 정체성으로 짚어낼 만한 성격의 것인가. 어쩌면 대학생과 대학문화를 언급하는 순간 이것들이 하나의 특권화된 범주로 통용되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앞서지 않는다면 대학문화의 위기를 선언하는 것도, 현재의 대학문화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모두 무의미할 것이다.

한 시대를 선도했던 학생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치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위기는 계급 불평등과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고리를 떠안고 그 포물선을 음의 방향으로 내동댕이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비판적 발언의 메카라던 대학은 오히려 연일 딴따라로 일관한다. 이십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시대에 오늘의 이태백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생과 대학문화를 이야기하는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여기에는 사회적 위기의 희생자로서의 대학생을 바라보려는 시각과 대학생들이 이 위기를 뚫을 만한 주체들인지를 살펴보려는 시각이 혼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이 구연해낸 패배적 대학문화(대중문화에 대해 뭔가 지킬 것이 있다면 분명 패배했다)의 사회적 근거들을 찾으려는 시각과 그럼에도 정말 희망의 원리를 찾을 수는 없는지 질문해보려는 시각도 뒤섞여 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상황에서 이들에게 그 어떤 주체적 역량도 기대하기는 힘들다. 우선 대학생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스스로 자기자신을 ‘대’학생으로서의 정체성으로 규정짓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예전 같은 대학생이라면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강박을 가질 수 있겠지만2), 지금처럼 대학수학능력이 있는지만을 대충 검정하고 성적에 맞춰 거의 모든 수험생들을 대학에 배치시키는 구조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기 구속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나 『글 읽기와 삶 읽기』 같은 세미나의 고전들은 이제 대부분의 신입생들에게는 별세계의 이야기인 양 간주되고는 한다.

반면에 학생들은 지식인이나 전위 같은 부담스러운 정체성보다는 자기 자신을 대중이라는 범주에 더욱 친화시킨다. 이러한 경향은 물론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대중소비사회로서의 한국에서 10대 시절을 보내며 소비주체로 호명되었던 경험에 연유하겠지만, 아울러 이들이 대학에 들어와서도 대중문화에 친화력을 갖게 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리고 대학에 들어온 후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대중문화에 의해 소급되고 긴장을 겪는다.

이러한 대학생들에게서 과연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대학문화를 예전 같이 비판적이고 역동적이게 만들려고 기획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체들이 갈수록 파편화와 탈정치화의 강도를 더하며 대학에 유입해오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현재 상황으로서는 절대로 요원한 일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들이 엄존하는 사회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구성하고 있는(live out) 대학문화를 좀 더 가까이에서 어울려보고, 거기에서 일종의 원리들을 하나씩 수집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대중문화와 조응하여 어떠한 대학문화가 만들어지는지, 자본주의 적응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교과과정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대학이라는 틀거리에서 어떠한 집단문화가 형성되는지, 이러한 관점들이 이 글을 구성한다.



2. 대학문화 형성의 기반조건과 틈새


(1) 대중문화와의 결별

대학문화에 관한 논의들 중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의 영향력에 관한 것인데, 물론 그 대부분은 한국사회가 대중소비사회로 성격을 탈바꿈하는 가운데 대학문화가 대중문화에 의해 잠식되었다는 견해들이다. 대학 축제에서 이름 있는 가수나 연예인을 초청하지 않으면 손님이 모이질 않고, 학교 안에서 자기만의 리그를 꿈꾸기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자본으로부터 호명 당하며 열심히 문화상품들을 소비하는 것이 오늘날 대중문화와 한 몸이 되어버린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게다가 이제 학교 안에는 모 이동통신사가 대학생 이용고객을 위해 Na캠퍼스라는 PC방을 꾸몄고, 이전 같았으면 독점자본/매판자본이라며 추방당했을 법한 요식유통업체들이 학생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주체를 통제하려는 구획된 공간과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의 대학문화란 소비대중문화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들의 대중문화 수용이 이미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수행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미 중고딩 시절부터 이들은 학교종이 울리고 나면 TTL의 벨소리로 해방감을 고취해왔던 세대들이다. 입시지옥의 압박감을 스타시스템에 대한 팬덤으로 털어냈던 세대들인 것이다. 게다가 ‘뉴논스톱’ 같은 드라마나 ‘색즉시공’ 같은 영화를 보면서 대학생활에 대해 무구하게 소비지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품어 왔던 터이다. 소비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커녕, 10대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는 문화산업의 수혜를 받고 이미 대학문화=대중문화임을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실상을 보다 자세히 꿰뚫어보면 대학문화가 대중문화에 의해 순전히 잠식당했다는 선언은 어딘지 성급한 판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히려 대중주체가 대학문화를 점거했다는 표현이 옳다. 가령 ‘천국의 계단’ 같이 유치한 드라마를 도대체 왜 열광하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학생들은 열광이라기보다는 그저 “씹는 재미”로 본다고 한다. 이때는 주연 연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브라운관의 스펙터클보다는 주인공의 혀짧은 소리와 드라마 구성의 진부함 등이 단골메뉴가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에 동화되어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즐거움과 동시에 드라마의 몰개연성과 유치함을 비웃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학생들이 대중문화에 빠져들었다는 일면적인 고정관념은 다소 수정되어야 할 듯싶다. 우선 대학생들이 접하는 대중문화가 겉에서 보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들은 세대/성별 등에 따라 취향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취향의 공동체 등과는 성격이 다른 까닭에 대중문화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서태지팬과 HOT팬 사이의 구별 같은 것이 대학문화에도 그대로 집적되어 있다. 이를테면 문화적 취향이 서태지 신드롬 시기부터 형성되었던 고학번 집단과 HOT의 인기 시절 취향이 형성된 저학번 집단 간의 엄연한 차이이다. 또한 여학생들이 주로 보이는 연예뉴스, 패션 등에 대한 관심과 남학생들이 주로 보이는 스포츠, 게임 등에 대한 차별적 관심 등도 대학생들이 전유하는 대중문화의 구도를 단순하게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물론 세대와 성별 여하를 막론하는 연애라는 가장 강력한 취향도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에 들어와서 이들이 사실은 소비대중문화로부터 발 한쪽을 슬그머니 빼고 있다는 사실도 대학문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리게 한다. 특히 매스미디어에 의해 유포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관심이 멀어지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토익․토플 공부나 고시 공부가 차지한다. 관심사의 이러한 변화는 자신들에게 쓸모 있는 문화와 쓸모 없는 문화를 구분 짓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 적응을 준비하면서 이제 서태지나 HOT 같은 대중문화에 대한 매니아적 기질은 점점 수그러들고, 반면 우연찮게도 패션 게임 스포츠 등과 같이 자기치장과 사교행위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문화형태만을 남기게 된다.

이 구별의 지점에 “비웃고 씹는 재미”가 개입된다. 10대 시절 자아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던 대중문화와 초연한 결별을 시연하기 위해 동년배들과 함께 브라운관 앞에 앉아 “비웃고 씹는” 것이다. 이러한 연희과정을 통해 대중문화의 이차원(異次元)으로부터 탈출하고 적자생존의 땅에 당도할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학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복잡한 구도와 긴장적인 관계를 본다면 대학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틈새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교과과정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대학생들의 반응

불안한 고용현실에 대비하기 위해 대학 입시를 마치기가 무섭게 고시준비에 들어가는 고등학생들이 있다고 한다.3) 분명 지금의 대학생들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도 현실적이다. 수년전부터 계속되어온 취업난은 학생들을 현실의 궁지로 계속해서 몰아넣는다.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성공의 불문율로 여겨지는 오늘날 대학생들이 현실주의에 매몰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어려운 경제상황은 대학생들을 문화적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게 하며 오히려 정치적 보수로까지 나아가게 한다.4)

대학생들이 대중문화에 친화됐던 순간을 지나 영어공부나 고시준비로 아예 탈문화화되는 지점에 대학교육의 탈숙련화 과정이 맞물려 있다. 대학들은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경쟁사회의 예비교육장으로서의 자기기능을 증대시키면서, 동시에 학생들이 자기 노동력을 상품화할 준비를 서두르게 한다. 학부제의 도입, 전과․편입의 자율화, 복수․연계․심화전공의 확대, 취업교육의 일반화 등은 대학 교과과정의 현재적 지표 중의 하나이다. 이 와중에 대학교육이 구조적으로 탈숙련화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5) 대학교과과정이 점차적으로 취업도구화하고 실용교육화하면서 공장-사회적 인간형이 주조된다. 심지어는 이의 탈출구가 될 법한 문화관련 강의들조차 대개는 독일문화의 이해나 프랑스문화의 이해 같은 식으로 종종 산업심리학으로 이어지는 실용교육에 불과해서, 오히려 문화자 들어가는 강의가 학생들의 탈문화적 경험을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대학교육의 구조적인 재생산 기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연적인 틈입점은 존재한다. 학생회운동이 제2대학 운동 등을 통해 커리큘럼에 개입해보려던 시도는 거의 실패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현재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 영역에서 무시 못 할 간파(penetration)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주체적 역량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선택지에서 수행된다는 점에서 결국 소외된 자기결정 능력에 불과하지만, 전공교육과 필요숙련기술교육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비대칭성이라는 조건은 대학의 주체들을 곤란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가능성으로 꽉 차 있는 상황에 처하게 해준다.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어학학원에 다니는 것이 대학교육과정의 필수적인 사교육 현실이 된 상황에서 학생들은 강의실에서의 교육과정을 비웃는다. 그것은 마치 중고등학생들이 1, 2단위짜리 수업시간에 국영수 과목을 혼자 공부하던 풍경과 흡사하다.

학생들은 사회적응에 쓸모 있는 커리큘럼과 쓸모 없는 커리큘럼을 구분 짓는다. 자신이 처할 만한 직무수준과 교육 내용이 괴리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공대생 중 몇몇은 애초에 이공계 쪽으로 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예 학년초부터 전과를 준비한다. 이 준비과정에서 그의 애초 전공인 기계공학 등의 학문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수강신청 목록에서마저 자취를 감춰버린다. 인문계의 비인기학과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입학 정원 30명 중 편입과 전과로 인해 4학년까지 남는 사람들은 겨우 7, 8명에 불과하다.6)

강의시간 중에도 이러한 흐름들은 지속된다. 교실붕괴 현상처럼 강의실이 붕괴되고 있는데,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는 수업시간은 핸드폰 통화나 문자메시지 송수신 등으로 강의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된다. 몸은 비록 강의실 안에 있지만, 계속해서 교과과정의 외부를 지향하는 행동의 결은 끊이질 않는다. 대학이 차려놓은 사회적응프로그램(전과, 편입, 복수전공 등)으로 제도적 환경이 준비되고 통신기술 등의 발달로 커뮤니케이션적 환경이 마련됨으로써, 학생들은 정규교과과정으로부터 보이콧을 감행한다. 때로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때로는 회피와 모면의 전략으로 수업거부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부는 완전히 보수의 방향으로 치닫고 만다. 단적으로 이들의 간파 과정은 중등교육현장에서의 그것에 비하자면 턱없이 비겁한 수준이다. 교실에서 ‘날라리와 양아치’ 중고등학생들이 사회적 계급적 재생산 프로그램들을 목도하고 사보타지와 낙오자적인 정서를 택한다면, 이미 그런 프로그램에 편입되어 있는 존재로서 ‘범생이’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보다 높은 가치를 받기 위해 전공교육내용을 외면하고 비겁자적인 정서를 택한다. ‘능동적인’ 보이콧이 가능한 환경에서 현실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택하면서 다른 관계를 승인하지 못하는 제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3) 파편화와는 거리가 먼 집단문화와 커뮤니티문화

이들이 자기중심적인 의식에 경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표출양식은 매우 복잡하다. 이를 사회에 대한 자기적응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법도 하다. 실제로 이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정체성이 점철되어 있다기보다는 끊임없이 관계맺음을 갈구하고 있다. 강의실 바깥에서의 행위 양식을 보면 그러한 욕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학생들이 집단문화와 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대학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집단화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결속과 취향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부분이다.

출신 대학에 대한 대학생들의 애착과 유대감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일례로 보수청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한양대 훌리건들의 지난 3~4년간의 사이버 활동은 매우 유명하다. 처음에는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사이버공격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점차 영역을 넓혀 대학의 위계서열구조를 이용해 다른 대학 사이트에 테러를 일으켰던 장본인들이다. 재미난 것은 이들의 공격에 대한 타대학 학생들의 반응인데, 안하무인격인 이들의 행동을 해프닝으로 받아넘기기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같은 논리로 대응에 나선 것이다. 성균관대, 경희대, 중앙대 등의 열혈학생들은 결국 자기 대학의 대외적 이미지를 제고한다는 목적에서 각 대학의 고시합격율과 재정상황 등을 줄줄이 꿰고 다니며, 다른 대학 사이트에 역-사이버테러를 일으키곤 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보다 학력자본과 상징권력의 튼실한 매개가 되는 '상상적 공동체'로서 대학문화가 성격 지워진 탓이 크다. 자기 학교의 위상은 바로 자신의 사회적 자본과 직결되기 때문에 ○○대학생이라는 자기 호명을 통해 집단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대학생들이 갈수록 현실화/보수화되어가는 경향과도 크게 연관되어 있다. 자기 대학을 지키기 위해(실제로는 자기의 입신양명을 위해) 동료들에게 호소하고 그들은 그 부름에 호응함으로써 집단의식이 공고화된다. 이런 점을 본다면 일부 대학생들이 형성하고 있는 위계구조적인 집단문화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는 설명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두 번째, 취향을 중심으로 온-오프라인 상에서 조직되는 집단문화의 성격은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라는 테제와는 거리가 전혀 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가장 두드러진 규칙은 위계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질서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프라인상에서 집단 내부의 소통을 방해하는 욕설이나 초딩체 외계어 등에 대한 배제 규칙들은 이들이 공동체 내적인 질서를 조직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보다 일상으로 들어가 사적인 모임들의 성격을 보면 재미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종종 이들은 선후배들과 패밀리를 맺곤 한다. 누군가는 엄마고 누군가는 아빠며 누군가는 아들딸이 된다. 여기서 일종의 가족적인 질서가 발견된다. 선후배간의 위계는 사라졌지만, 가족형태와 유사한 조직으로 모임이 유지 존속된다. 대학에서의 교과과정 이외에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대신에 술자리를 갖고 함께 연예인들을 씹으면서 사적인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러한 사적인 모임을 두세 개 이상씩 가지면서 개인중심화된 생활패턴에 활력소를 얻곤 하는데, 이러한 비정치적 관계의 형성들은 이들이 개인화/파편화되어 있다기보다는 공동체지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대학문화의 조직 주체로 추앙받곤 하는 학생운동이 동원되지 않는 학생대중들을 향하여 지나치게 개인주의에 빠져 있다고 세태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몰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대학문화가 파편화되어 있다고 스스로 사망선고를 내린 순간, 정작 학생들은 버젓이 집단의식을 고취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대학문화에 아직도 학생회가 가질 수 있는 역할이 남아 있다면, 우선은 대학문화를 조건 짓는 실제적 근거들을 짚어보고 공동체 형성의 새로운 작동원리를 곰곰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결론: 대학문화 이해의 몇 가지 길들


대학문화를 이해할 때 몇 가지 중요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선은 실제 논자들 사이에서 대학문화가 일종의 ‘상상적 공동체’로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대학문화라는 것이 특정한 지배소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다층화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특정한 문화구성체인 것처럼 표상되는 경향을 자주 목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학이라는 공간은 매우 불안정하다. 대학문화는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과정에 가깝다. 서로 다른 계급적 기반이나 문화적 견해와 취향들이 복수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바로 현재의 대학사회이다.7) 게다가 대학문화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학생들은 4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한에서만 대학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다.

한때 대학문화는 서태지의 아우라가 지배해왔다. 수년이 흐르자 이제는 점점 HOT와 그밖의 SM 계열 스타들의 아우라가 대학문화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년이 더 흐르면 인터넷을 휘젓고 다니는 외계어와 초딩체의 주인공들이 대학문화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아스날의 앙리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드라마 ‘올인’의 남녀주인공들이 서로 짝짓기 연애 중이라는 사실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같은 대중문화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그 내부에서만큼은 이질적인 취향들로 산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학문화의 정체성은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규정도, 대학문화가 대중문화에 의해 잠식당했다는 사망선고도 모두 섣부른 판단에 불과할 수 있다. 대학문화는 순수한 결정체도 아닐 뿐더러, 그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매우 복잡한 문화적 지형도를 상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인식의 계기는 대학에서의 교육과정이 학생들에게는 학습노동이라는 노동과정에 비견된다는 상상력이다.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교실붕괴 현상이 종종 보고되던 것을 기억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교실문화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학으로까지 진입해 들어와서 지배적인 강의실문화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텍스트들을 참고삼을 수 있는데, 부러워이의 『생산의 정치』와 윌리스의 『노동배우기』가 그것이다. 작업장에서의 노동문화와 교육현장에서의 학습문화의 미시적 분석은 오늘날 대학문화의 이해에도 중요한 입지를 제공해준다.

강의시간에 종종 발견되는 잡담나누기, 문자메시지 주고받기, 핸드폰 통화하기, 땡땡이치기, 대리출석 등등의 것도 이제는 대학문화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은 이제 자기 배알에 맞지 않는 교강사들에게 토론 같이 공식적인 경로로는 교권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들은 꼰대적 관점에서보다는 진정 문화정치적인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을 지식인으로 여기지 않는 대학생들로서는 강의실의 환경이 교육적 테일러리즘 정도로밖에는 간파되지 않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학생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 학문이나 교양이 아니라 실제로는 학습노동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대학문화를 얘기할 때 우리는 종종 대학문화(multi class)와 하위문화(under class)의 부정합적인 조우를 꿈꾸고는 한다. 그러나 대학문화를 사회적 조건과 조응하고 있는 주체의 영역에서 본다면 불순한 인간들이 뒤섞여 있는 이 공간에서 저항의 희망을 도출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이것이 희망이 될 수는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앞서는가 하면, 사회적 압박감의 틈새를 비집고 형성되는 간파의 지점이 있기도 하고, 또 지배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안에서 소외되어 욕망의 기표에 집착하는 모순도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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