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빈민의 자녀다. 그리고 그 계급을 세습하고 있는 언제나-이미 노동빈민이다. 달동네는 나의 출생지이고, 영구임대 아파트는 나의 성장지이며, 다세대주택 반지하는 현재 나의 거주지이다.
나같은 종자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은 8할 이상이다.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빈민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이유를 일종의 빈곤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계층 향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며, 노동에 대한 의욕도 없고, 자신의 처지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들로 빈민들을 바라볼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빈민이란 타자가 아니던가.
그걸 깨달은 게, 바로 영구임대 아파트에서였다.
영구임대 아파트…. 많은 빈민들이 그곳에 들어가길 바란다. 실제로 철거민들의 경우 투쟁의 결과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얻어내기도 한다. 이들 철거세입자들을 비롯해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생활보호대상자, 모자가정 등이 영구임대 아파트의 세대분포를 이루고 있다. 산동네에 살면서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우리집의 경우는 모자가정 혜택으로 등촌단지에 입주할 수 있었다.
빈민이라는 타자
아파트 생활이 주는 편리함에 감복하면서도, 사실 이사했을 때의 첫 느낌은 이곳이 닭장같다는 당황스러움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8평짜리 닭장에서 닭들이 볕을 쬐러 나오고, 날이 지면 다시 닭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사람 사는 패턴이야 크게 달라질 게 없겠지만, 아파트에서의 시간은 그 공간적 특성과 묘하게 마주치면서 사람냄새를 제거해버린다.
또한 낯선 것은 내 옆집, 옆동, 어느 곳을 둘러보더라도 생전 처음 보는 이웃들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 사람과 마주치더라도 간단한 목례나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 예전 동네에서와 같은 마음어림은 어느샌가 내겐 없는 것이 돼버렸다.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놈의 습관은 그대로 굳어져서, 최근 이사 온 동네에서마저도 우리 가족은 이웃들과 별다른 교감을 주고받질 못하고 있다.
영구임대 아파트는 이런 식으로 주민들의 삶의 결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한번은 이웃집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가 죽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질 못했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냄새가 코를 찌르게 되자, 그때서야 이웃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초상을 치러야만 했는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8평짜리 집에서 어떻게 상을 치를 수 있겠나. 경조사라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이것저것 돕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 당연지사일 텐데, 그럴만한 공간이 없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안타까워 할 수밖에…. 공동체적 관습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단칸방에서 사는게 더 나아
또다른 문제는 아파트라는 개량된 곳에서 산다고 해서 빈곤의 일상이 끝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외롭게 사라져가는 독거노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결국 8층 베란다에서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가장, 월 30만원을 웃도는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해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입구에 이름이 붙여진 가족들, 이들 모두가 빈곤의 극한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놈의 집은 왜 또 그렇게 좁은지. 8평에 부엌 딸린 좁은 복도, 조금 큰 방, 작은 방, 화장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우리집이야 엄마와 나 두 식구였으니 큰 불편은 없었지만, 이 공간에 5인 가족이 사는 경우도 있다. 상상해보라. 이럴 경우, 공간의 사적인 소유는 결코 있을 수 없다. 부모가 큰 방을 쓰고, 자녀 셋이 작은 방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식이 딸 하나에 아들이 둘 같은 식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남자들이 큰방에 자고 여자들은 작은 방에 자면서 공간을 성별로 나눈다든지(세대별이 아니라), 막내아들이 부엌에 따로 이부자리를 펴고 자든지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차라리 단칸방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까지 한다.
게다가 자녀가 소위 삐뚤어진 길에라도 빠진다면 빈곤의 일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영구임대단지에 사는 아이들을 보면 적지 않은 수가 가출은 기본이고 또래들끼리 어울려 다니면서 소위 ‘삥’을 뜯기도 한다. 본드를 불고 가스를 마시면서 일탈행위를 일삼다 심지어는 부모를 폭행하는 자녀들도 있다. 문화연구자들이 흔히 말하는 일탈의 긍정성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이런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란 상상 그 이상이다.
또한 별 문제아가 아니더라도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 자체는 어쩔 수 노릇이다. 특출난 효자가 아닌 이상 부모 세대와의 갈등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빈곤의 경험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나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비교대상이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내가 살았던 등촌동과 인근 가양동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곳 단지들에는 영구임대아파트만 있는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곳에는 진로나 대림처럼 건설회사의 이름이 접두어로 붙어 있는 중산층 아파트들이 섞여 있다. 나 역시도 중산층 아파트를 ‘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빈곤의 일상은 더욱 복잡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내가 산동네에 살 때에는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고개 너머 ‘좀 사는’ 동네에서 내리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한참을 걸은 후에야 집에 들어오지만, 버스의 다른 승객에게는 적어도 내가 가난한 놈으로 비춰지진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구임대아파트의 아이들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대림아파트에서 내려 닭장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반면 중산층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우리 같은 계층과 구별을 지으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보통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의 구별이 자기 취향을 가지고 있는 ‘날라리’와 취향도 없고 별 줏대도 없어서 놀림감이 되곤 하는 ‘범생이’로 이뤄진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호명방식/구별방식이 조금은 남다르다. 영구임대에 산다는 이유로 이쪽 아이들은 보통 ‘영구’라고 불려진다. 못 산다는 이유로 모자라는 아이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부아가 치미는 일인가. 영구임대 아이들이 중산층 애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싸잡아 ‘범생이’라고 매도를 하고 있으니 좀 참을만 할 뿐이다(어쩌면 영구임대 아파트의 정식명칭이 등촌주공아파트, 가양도시개발 아파트인 것도 이런 말장난을 애써 피해보려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철없는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철없는 중산층 부모들도 개념 없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자녀가 ‘영구’들과 어울려 다닐까 노심초사하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질 나쁜’ 영구들이 적은 학교에 자식을 보내려고, 아예 학교배정 때부터 발벗고 나선 일도 있었다. 실제로 중산층 학부모들이 교육청에 집단 항의해서 학군을 조정함으로써, 자기 자식이 ‘영구’ 아이들에게 물들지 않게끔 투쟁(?)한 것이다. 아직도 이들은 질이 좀 좋아보이는 중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 등 갖은 수단을 다하고 있다.
공공적 관계 깨져
이야기를 다 하려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강내희교수가 타자들은 침, 가래, 똥오줌, 코딱지 같은 ‘영락물(零落物)’로 취급받는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나는 노동빈민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처사들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창호지문, 연탄아궁이보다는 분명 철재현관문과 중앙난방이 좋긴 하다. 그러나 빈터에 닭장 몇 개 짓고 그 속에 가난한 인간들을 몰아넣는 토목적 사고만으로는 빈민들의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빈곤의 일상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 노동-빈곤의 상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줬던 이웃간의 유대관계와 공공적인 삶의 영역마저 깨져나가고 있다. 더군다나 중산층들과 섞여 사는 바람에 차별의 체감도는 높아만 간다.
우리나라의 영구임대정책은 복지정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노동빈민들에 대한 철거/이주정책이라고 생각하는 게 낫다. 7, 80년대에 달동네 빈민들은 경기도 광주·성남 등으로 강제 추방됐었다. 90년대가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집처럼 자활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가정에 국한해 중산층‘형’의 아파트를 임대해 준 것뿐이라는 사실이다(물론 이는 빈민투쟁의 성과물이기도 하지만). 아직 복지사회라고는 구경조차 못해본 우리에게 ‘영구’임대 아파트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집의 경우에도 처음 3백여 만원의 보증금으로 입주했지만, 매해마다 재계약으로 인해 보증금을 인상해야 했다. 내가 성년이 된 후로는 갑자기 2백만원이나 되는 돈을 추가해야만 했고, 그렇게 해마다 오른 보증금은 급기야 7백여 만원을 웃돌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입주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결국 ‘속은 셈’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빚을 구해야만 하고, 사정이 더 나빠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빈민촌을 찾아 떠나야만 한다. 우리집은 그 과정에서 멋모르고 신용불량자로 사회적 낙인까지 찍힌 채,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희망같은 게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정말 똥오줌같은 인생 아닌가. 다시 힘주어 말하겠는데, 나같은 종자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은 정말 8할 이상이다.●
김 성 윤 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cydem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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