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연 한문지 2002.12.14 / 김성윤
서문연 한문지 자료집 2권 2. 맑스주의의 전화와 구좌파의 이론적 전략
⑤ 김세균, 「편자서문: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간」, 『이론』 16호(1996년 겨울/1997년 봄)
⑥ 김세균,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 재구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 박종철출판사 『마르크스-엥겔스 선집』 완간 기념토론회, 1997년 3월 28일. (혹은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 재구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 『이론』 17호, 1997년 여름)
⑦ 김성구?강내희?이성백?최갑수, 김세균의 「오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토론, 박종철출판사 『마르크스-엥겔스 선집』 완간 기념토론회, 1997년 3월 28일. (혹은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 재구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 『이론』 17호, 1997년 여름)
알튀세르 맑스주의자 김세균?
지난 주 윤소영에 이어 이번 주에는 김세균이다. 김세균의 글을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에 과연 헤겔식 맑스주의자가 있긴 했던 걸까. 보통 김세균을 편의상 구좌파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분류하곤 하는데, 본인에게는 당연하겠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본질주의적이며 환원적인 입장을 가지는 헤겔식 맑스주의에 대해 ‘속류적 맑스주의’라고 과감히 폄훼하고 있다. 구좌파=정통맑스주의=헤겔맑스주의로, 신좌파=문화맑스주의=전화된맑스주의로 도식화시켜 이해해왔던 발제자에게 김세균의 이러한 발언은 무지하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 한국 좌파 이론가 중에 과연 헤겔식 맑스주의자가 있긴 했던 건가, 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어쨌든 눈으로 두드러지는 점 중의 하나는 김세균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나름대로 열독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를 감히 알튀세리안 중의 한 명이라고 소개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 재구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는 철저하게 알튀세르의 논의를 따라가고 있다. 그가 재구성하는 맑스주의의 항목들만 봐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다음 표를 참조하라). 정통맑스주의를 혁신하려는 정통맑스주의자라고 해야 할까. 구좌파에 대해 고정관념과 온갖 선입견으로 가득찬 발제자의 머리에 혼란을 안겨주는 김세균의 시도. 그래서 지지 않으려고 그의 글을 읽다보니, 사뭇 색다른 긴장감이 느껴진다. 곪은 자기 육신에 직접 메스를 들이대는 의사.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속류적 맑스주의 | ? | 재구성의 전략 |
토대-상부구조론 | 심층-표층 구조론 | |
본질주의적-환원주의적 총체성론 대(對) 탈중심화된 총체성론 | 중심성을 인정하는 비본질주의적-비환원주의적 총체성론 | |
필연성의 유물론 | 우발성의 유물론 | |
이데올로기 대(對) 진리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의 우위 | 이데올로기 속의 진리 이론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우위 | |
대중에 대한 당의 우위 국가로 전화하는 당 | 당에 대한 대중 국가로 전화하는 대중 |
|헤겔맑스주의와 알튀세르맑스주의 사이에서의 긴장|
“알뛰세르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하나의 단순한 근원적 모순으로 환원하는 관점을 헤겔의 ‘표출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파악하는 관점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알뛰세르의 주장은 헤겔변증법의 구조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헤겔 논리학에서의 출발점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순수한 직접성, 즉 그 점에서 그 속에 그 어떤 대립적인 것도 포함하지 않는 절대적 동일자인,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인 ‘존재’(Sein)이며, 그 운동의 최종적인 귀결점은 그 존재의 즉-대자적인 형태인, 모든 모순적인 것들이 그 속에서 지양되고 용해되는 절대적인 일반자인 ‘절대이념’(die absolute Idee)이다. 이로 인해 헤겔에 있어 모순의 운동은 시작과 종말이 있는 유한적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하나의 단순한 근원적 모순으로 환원시킨다고 할지라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같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모순의 운동 그 자체는 시작과 종말을 지니지 않는 무한한 것이 된다.”(8쪽, ⑥)
글 앞부분에서 김세균은 위의 인용문처럼 헤겔을 옹호한다. 알튀세르가 헤겔변증법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튀세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국 좌파 이론가들에게 대한 돌려말함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글 전체에서 김세균은 이미 알튀세르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긴장이 엿보인다. 보통의 신좌파 이론가들이 알튀세르맑스주의(이데올로기 비판)와 니체맑스주의(욕망-생성 이론)의 절합을 구상했던 것과 달리, 김세균은 알튀세르를 받아들이는 초입부터 조심스럽다. 알튀세르와 들뢰즈가 교접을 보기 시작하던 97년에, 김세균은 헤겔과 알튀세르를 접합시키는 형국이라고 할까.
|심층-표층구조론 : 중층결정과 토대-상부구조론 사이의 긴장|
헤겔의 옹호에서 시작한 글은 알튀세르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유하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 토대-상부구조론에서는 경제적 관계와 정치적 관계 및 이데올로기적 관계란 그 자체로서는 ‘서로 처음부터 분리된 것’으로 나타난다. ...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불가분의 내적 연관성을 지닌 계급적 관계의 세 수준이지, 서로 환원불가능한 독자성을 지닌 사회적 관계들이 아니라는 점, 다시 말해 분화과정으로 통해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율성을 지닌 독자적인 사회적 형태들이 되었지만, 그 자율성이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맺고 있는 긴밀한 ‘내적 연관성’에 기초해 있는 ‘상대적’ 자율성 내지 ‘통일성 속에서의 차이’라는 점이다. ... 이 점에서 우리는 알뛰세르가 말한 ‘환원불가능한 복잡한 모순들’이란 자연과 사회와의 관계 및 계급적 관계와 비계급적 관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있지만, 계급적 관계의 세 수준들 간의 관계에는 기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9~11쪽)
이런 식으로 알튀세르를 비판적으로 전유한 김세균은 동시에, 토대-상부구조론의 맹점을 짚어낸다. “우리는 경제적 관계를 토대로, 그리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상부구조로서 파악하는 ‘토대-상부구조론’이란 사실상 정치와 경제 등의 형태적 분리, 즉 형태특수화 내지 형태자립화를 통해 정치와 경제 등이 이미 처음부터 맺고 있는 내적 연관성이 은폐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자율성을 획득한 사회적 형태들인 것인 양 나타나는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전 역사과정에 투영시킴으로써 성립한 하나의 가상적인 이론구성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2쪽)
?오늘의 맑스주의?의 주된 개념어인 ‘심층-표층구조론’은 계급적 관계의 세 수준, 즉 정치/경제/이데올로기를 봉합시켜버리는 ‘중층결정론’과 이를 분리시켜버리는 ‘토대-상부구조론’을 가로지르며 제안된다. 즉, 긴장의 산물. “사회구성체의 계급적 관계의 총체를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규정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심층적인(또는 보다 심층적인) 것’과 ‘표층적인(또는 보다 표층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것과, 이 양자는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같은 쪽)” 그러면서 김세균은 이러한 파악을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 적용시킬 때, (1)경제적 규정 (2)정치적 규정 (3)이데올로기적 규정들의 연관체계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계급투쟁 역시 보다 심층적인 것과 보다 표층적인 것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고 한다. (1)착취-지배계급 대 피착취-피지배계급투쟁 (2)노동력 상품의 등가교환이나 생산된 부의 공정분배를 위한 투쟁의 자유가 인정되는 체제냐 아니냐를 둘러싼 투쟁 (3) 투쟁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조건 속에서 노동력 상품의 판매-구입 및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의 확정을 둘러싼 투쟁.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계급투쟁의 구체적 정세란 (많든 적든 나타나는) 가장 심층적인 계급투쟁에서 가장 표층적인 계급투쟁의 형태들이 복잡하게 뒤얽히는 계급투쟁의 구체적 전개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3쪽)
|중심과 탈중심의 긴장 : 모순과 중층결정을 독해하는 김세균|
계급투쟁이 중심에서 점점 벗어나는 정세. 좌파이론가로서 김세균 역시 비계급적 문제들을 삭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적 관계의 총체 속에서 계급적 관계와 비계급적 관계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중층결정되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친다. ... 우리는 계급적 관계와 비계급적 관계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간의 환원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중층결정과 동시에 중심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 ‘중심성을 인정하는 비본질주의적-비환원주의적 총체성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첫째, 비계급적 모순들은 구조화된 계급적 관계와 계급투쟁의 모든 수준에서 계급모순들과 뒤얽혀있다. ... 이러한 자본의 지배력은 오직 계급적대에 기초해서만 성립하는데, 이는 환원불가능한 제모순들의 중층결정 속에서 중심적인 모순이 곧 계급모순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특정 국면 내지 특정 정세 속에서 무엇이 지배적인가를 중심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계급모순 내지 계급투쟁이다’리고 말할 수 있다. ... 둘째, ‘중심적 모순의 존재’와 ‘환원불가능한 모순들의 중층결정’은 특정 모순의 다른 모순으로의 ‘전위’(displacement)와 ‘응축’ 및 ‘폭발’ 등을 가져온다. ... 셋째, ‘환원불가능한 제모순들의 중층결정’을 수용하는 것은 ... ‘마르크스주의는 총화적 세계관이자, 전지전능한 절대적 진리이다’이라는 테제를 명백히 폐기해야 한다. ... 넷째, ‘환원불가능한 제모순들의 과잉결정’을 수용하는 것은 ... ‘등가적 접합’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연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 연대는 오히려 중심적인 주체를 인정하는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민주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어야...” (15~18쪽)
읽는 사람은 혼란스럽다. 이게 과연 중심성을 사고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저 사상의 깊이를 어떻게 짐작해야 하는가. 김세균은 “중심적인 주체의 인정이 곧 민주성의 부인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18)” 내지 “무엇보다 ‘중심론 테제’와 ‘최종적 심급론 테제’는 명백히 구분되는 것(19)”이라고 단서를 달지만, 그게 왜 민주성의 부인이 아닌지, 왜 최종적 심급론과 명백히 구분되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좌파의 책임! 많은 사람들이 아우토노미아 같은 것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런 식의 비조직이론적인 변혁사상에 경도됐던 것에는 중심성과 탈중심성 사이에서 스스로조차 혼란스러워 하는 좌파이론가들의 탓이 크다.
|김세균이 과연 우발성의 유물론을 사고할 수 있겠는가|
“우발성의 유물론을 기본적으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진리와 미래에 대한 보증’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변혁과 이행에 대한 확신성을 더 이상 지닐 수 없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고하게 보이는 구조 역시 항상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 나가고, 우연을 필연으로, 위기를 호기로 전화시켜 나가는, 역사와 사회과정에 대한 정치적 개입’의 중요성 등을 더 한층 깊이 자각하게 된다.” (20)
의문이다.
|알튀세르의 전면 수용 : 이데올로기-진리, 이데올로기-이론|
여러 긴장들이 엿보이는 가운데에도, 알튀세르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흔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의 ?모순과 중층결정?과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에 비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비교적 흡수하기가 용이했던 덕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가 지닌 환상과 암시의 효과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김세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와 진리-과학이 엄격한 대당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 초기의 입장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진리-과학’을 진지하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21)”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 속에서 이데올로기-진리-이론을 정리하는 김세균의 입장은 우리가 보통 알튀세르를 전유하는 방식과 크게 다른 부분이 없으니 그 부분은 생략하겠다. ^^;
|대중과 당 :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김세균 본인은 긴장하는 면이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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