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뉴얼 월러스틴, 김인중 외 역, 1장「공업과 부르주아지」 & 2장「핵심부에서의 투쟁-국면 Ⅲ: 1763~1815년」, 『근대세계체제Ⅲ』, 까치, 2003[1999]

김성윤/ 2006년 11월 6일/



1장. 공업과 부르주아지


- 영국 산업혁명,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 혁명의 시대. 그러한 ‘불연속성’(단절)은 사실인가.


◎ 산업혁명에 대한 견해들

- 사회적 혁명: 중세적 규제를 경쟁으로 대체(토인비)

- 경제적 혁명: 혁명수준의 생산 성장률 증가(하트웰)

-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계의 사용(기계화)’. 기계집중의 공장은 노동 조직에 결정적 혁신.

=>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들은 기계화와 pt화를 당연시하고, 왜 영국이 최초인가에 집중.


◎ 산업혁명의 원인에 대한 견해들

- 수요 증가: 생산양식에 대한 수요의 압력(해외/자국시장)이 영국에서 새로운 기술을 유발.

- 자본 축적: 수요보다 공급과정 강조. 18세기 후반의 이윤 인플레이션. 이자율의 하락으로 비교적 저렴해진 자본.

- 자본 유통: 자본금의 상대적 규모가 아니라, 자본금의 ‘내용’(근대적인 자본축적 형태로 투자 전환)에서 원인을 찾음. 영국은 공업에 이용할 수 있는 신용기관이 많았음.

- 인구 증가: 수요와 생산노동력 모두를 제공. 교육과 기술적 배경 갖춘 하위 중간계급 팽창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짐. 그러나 18세기말 인구증가는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회복, 만회, 복구로 간주되어야 함. 증가하는 다산율보다는 ‘저하하는 사망률’. 의술 발전보다는 저항력의 개선. 도시로의 ‘인구 이전’ 역시 고용기회 등의 결과이므로 [보다 확실하게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개선된 데에 원인이 있음.

- 농업혁명: 선행조건과 결정요인으로서 농업부문의 변화. 19세기초 영국에서도 농업이 제1의 산업. 그러나 생산량의 증가는 농기구 기계화에 의한 것이 아님. 발전은 주로 사료작물을 이용한 집약적인 경작(교대농법/교체농법)으로 이뤄짐. 즉 이전과 다르게 목축과 농업생산의 병행.

- 인클로저: 토지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공업노동의 노동력을 창출. 인클로저가 공업화 과정과 전체 과정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닐까? 인클로저는 1750년 이전부터 시작. 영국 의화가 속도와 가시도를 높임. 즉 ‘정치적 개입’. 그러나 ‘농업개인주의’(블로크)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18세기 전유럽적 현상이며 ‘국가기구의 힘’에 의한 것. 또한 토지 통합과 생산량 증가의 관계는 입증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었을 뿐. 새로운 농법은 농업에서(공업이 아니라) 보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함. 또한 도시의 노동인구 증가 역시 전체적인 인구증가에 기인한 것. 농업혁명은 16-17세기에 이미 일어났다거나, (18세기) 농업의 변화에서 산업혁명과 유사한 것을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

- 규제: 영국이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면에서는 자유주의적 국가구조가 다른 국가들보다 탁월. 길드의 역할을 제거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 세계시장에서는 보다 직접적. 보호주의는 영국의 면직물 생산에 기여.

- 과세: 영국의 세금수입은 절대적, 상대적으로 훨씬 빨리 증가. 과세가 덜했다는 잘못된 인식은 단지, 영국에는 공식적인 세금면제가 없었다는 것, 직접세가 지대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비가시화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함.


◎ 산업혁명의 성격

- 월러스틴: 축적 추구의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는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한 16세기 이후로 줄곧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 모티브. 과학이나 기술의 획기적 진전은 없음. 방적기 발명과 같은 영국의 특수성 문제는 면과 철강시장에서 영국의 승리를 설명해줄 뿐.

- 면공업: 새로운 면직기술은 노동절약적. 인도의 직물 노동자와 효과적 경쟁. 면직물 공업에서는 서유럽이 인도와 경쟁했고, 서유럽의 기술혁신이 인도에 전파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있었던 것.

- 철과 석탄: 기계류와 운송 발달에 따라 철 소비 증가. 세계경제의 주도산업이 된 것은 1830년대의 철로. 석탄 및 철광공업의 대규모 팽창. 운송업에 대한 대량의 자본투자. 1750년대 목재 부족은 석탄의 효율적 사용을 촉진. 프랑스는 영국과 같은 목재 기근 없었음.

- 면공업의 우위: 면공업은 물리적이고 노동절약적인 데 반해, 철강산업은 화학적이고 노동이 많이 사용됨. 면직물 공업의 성장으로 노동조직(생산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세계시장과도 가시적으로 연결됨.


◎ 산업혁명은 영국에만 있진 않았다

- 17-8세기의 프랑스가 세계 제1의 공업국가. 공업생산물이 능가한 것은 프랑스에서 먼저.

- 산업혁명은 존재했는가: 최초의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세계경제의 틀 내부에서의 상대적인 위치의 배열이 중요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영국의 이점을 절대적인 특징들의 배열로 설명하는 잘못된 전제. 문제는 왜 이 시기에 특정한 국가에서 가장 이윤이 높은 경제적 행위들이 더 집중되는 결과가 나타났는가 정도.

-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은 프랑스혁명과의 연상작용으로부터 나온 것. 그 역도 마찬가지.



◎ 프랑스 혁명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

- 프랑스가 자본주의 발전에 이상적으로 적합했다면 왜 영국에 비해 ‘경제발전’이 더 느렸는가? 그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부르주아 혁명’이며, 설령 부르주아적이라고 해도 어떤 의미에서 혁명이란 말인가?


◎ 반론들

- 대서양혁명: 프랑스 혁명은 서양세계의 거대한 혁명운동 중 한 부분. 귀족정치에 대항한 일종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됨. 그러나 소불은 대서양 혁명론이 프랑스혁명을 자생적인 것으로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반동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프랑스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분리시켰다"고 비난. 대서양혁명론은 냉전적인 사고의 결과.

- 우발적 사건: 프랑스혁명 그 시기를 넘어 수세기에 걸친, 16~19세기에 이르는 보다 긴 시간대 위에서 보아야 한다(토크빌). 대부분의 영주는 경제계에서 이미 부르주아 역할(성공한 부르주아). 즉, 이 시기의 부르주아와 귀족 사이에서 근본적 차이(계급적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 프랑스의 토크빌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을 ‘하나의 우발적 사건’으로 해석. 의회의 혁명과 파리와 도시들의 혁명, 농촌의 혁명이 겹쳐 일어난 우연한 결과.

- 자유주의 혁명: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자유주의 혁명. 부르주아들의 참된 목표는 경제적 자유, 소유권의 개인주의, 제한선거제도(퓌레).

- 반자본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농민 역할 강조. 반자본주의 혁명으로 보는 관점. “이것이 잉글랜드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프랑스보다 훨씬 앞서게 만든 특징 가운데 하나”(코반).

- 정치혁명: 민중의 관료적 통합, 국가 강화의 혁명.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구분(스카치폴).


◎ 프랑스 혁명의 재해석

- 러시아 혁명의 이미지(pt혁명/전체주의)를 위해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bg혁명/자유주의)를 창조할 필요 없음. 부르주아와 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범주는 설명력 약함.

-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기구의 변화도 200년 동안 계속되어온 과정의 연속. 차라리 프랑스혁명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마침내 경제적 토대를 따라잡은 순간. 그것은 이행의 원인이나 이행이 일어난 순간이 아니라 ‘이행의 결과’였다.

- 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대부르주아가 신봉한 것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윤’.

- 또 하나의 의미: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최초의 반체제혁명. 그것이 만들어낸 신화는 부르주아 신화가 아니라 반부르주아 신화.



2장. 핵심부에서의 투쟁-국면 Ⅲ: 1763-1815년


◎ 1763년 파리조약

- 7년 전쟁의 결과로 영국/프랑스/에스파냐가 체결. 이로 인해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동부 루이지애나(프랑스->영국). 플로리다(에스파냐->영국). 미시시피강 서부 루이지애나(프랑스->에스파냐).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몇몇 무역 거점을 제외한 일체의 식민지를 포기.

- 파리조약은 영국이 프랑스 압도한 헤게모니 싸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 17세기 정체기 동안의 세계경제 재편성의 결과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새로운 팽창에서 발생.


◎ 구체제의 위기인가, 팽창의 토대인가

- 단기적 수확의 위기: 흉작으로 인한 대규모 생산자의 이윤 상승(라브루스). 그러나 수확이 좋았던 해에도 가격은 유지. 소농의 이점으로 상쇄되지 않음(모리노). 진짜 문제는 기후가 아니라 소득과 분배라는 사회적 투쟁무대(빌라르). 오히려 핵심적이었던 것은 전반적인 자본축적률(라브루스).

- 팽창기의 토대: 장기 17세기의 주요성취는 자본가들이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이윤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세계경제 전역에 걸친 주변 생산자들의 제거.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소득의 재분배.


◎ 18세기 농업의 맥락

- 1620~1750년경의 낮은 곡물 가격. 그러나 그 자체는 새로운 수요의 원천을 창출했으며 인구 증가를 자극.

- 이는 핵심부의 농업자본가들이 이윤의 새로운 원천을 찾도록 조장. 환금작물 생산을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 직접생산자의 몫을 낮추려는 노력 강화. 산업 혁신을 통해서 이윤의 새로운 원천 장악하려고 함. => 이제 세계시장을 둘러싼 투쟁을 강화시킴.


◎ 프랑스의 영주적 반동과 인클로저

- 프랑스의 영주적 반동과 영국의 인클로저 물결은 과연 다른 것이었을까?

- 폐지되거나 줄어든 영주적 특권의 새로운 강화. 동일한 영주들 그리고 지역의 다른 대지주들에 의한 공동지의 전유.

- 반동은 팽창하는 세계시장의 맥락 안에서 발생. 세계시장에 대한 포괄적인 반응. 거기에는 기업가들과 유사한 기대(근대적 토지경영, 재고품 비축, 투기, 저당물 반환권 박탈 소송, 가격에 대한 중농주의 지지)가 포함됨.

- 가장 큰 소득의 증가분은 지대. 이 시기 실질소득이 가장 높았던 것은 대지주 신분. 증가된 지대에 따라 지주는 영지의 규모를 증가시키려 노력. -> 빈농의 공동방목권과 인근토지방목권 제거 시도. 공동지 분할과 인클로저 허용 시도.

- 그러나 1750년 이후 프랑스 대지주들은 잉글랜드 대지주들보다 현저하게 덜 성공적. 프랑스의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와 정치적으로 약한 영국의 농민들.


◎ 영국 추월의 과정

- 농업생산은 증가되었지만 “질주했던” 부문은 공업과 상업. 영국(1740년경)보다는 프랑스(1715년경).

- 유효수요의 문제: 중간계층과 하위계층의 규모와 가용한 현금의 정도를 구별해야 함. 번영한 계층의 수입 증가가 그렇지 못한 계층의 수입 감소에 의해서 넘칠 정도로 상쇄되었음. 양국에서 전반적인 구매력은 사실상 감소. 이로 인해 다수가 가내공업과 농촌의 임금노동에 종사하게 됨. 또한 농촌과 도시지역 모두 1750~1815년 시기에 실질임금 하락. 증가한 것은 국내수요가 아니라 인구.

- 7년전쟁과 프랑스의 위기의식: 7년전쟁으로 영국은 해외의 경제적 토대의 핵심적인 전략상의 요충지를 확보. <-> 프랑스는 붕괴. 영국에 뒤처졌다는 느낌. 중농주의적 개혁. 농지 개간. 곡물가격 자유화, 농업 개량 등 시도.

- 프랑스의 실패: 그러나 프랑스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법적 취약성과 물질적 이익에 대한 위협 때문에 실패. 공유지 분할을 둘러싸고 얽혀버린 중농(pt화)과 대지주의 이해관계. 즉 단위토지들의 분산 정도가 프랑스에서 훨씬 컸음. 소유권이 프랑스에서만큼 깊이 뿌리 내리지 못했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게는 불리했음. 토지강탈에 대한 저항이 강함.

- 공업: 프랑스는 국내의 높은 이윤수준 때문에 해외에서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압력이 상대적으로 낮음. 영국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국가기구(보호정책)가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점을 감안해도 영국의 이점은 그렇게 크지 않았음.

-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 미국독립전쟁은 수출고객이었던 영국식민지의 분리를 노린 프랑스의 보복전쟁. 그러나 탈식민지로서는 기존의 상업적, 사회적,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서 그들의 옛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 관계를 다른 핵심부의 국가들로 이전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했음. 영국은 과거처럼 행정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거대한 상업이 제공하는 이익을 획득. 반면 미국독립전쟁의 대가로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으로 치르고, 국가부채는 전쟁 이후 두 배가 되었음.

- 미불금과 부채의 문제: 영국은 추가 세입을 늘림으로써 미불금을 줄여나갔고, 네덜란드인의 투자 본국으로의 투자상환으로 1783~93년 사이에 영국의 부채는 대부분 청산된 반면, 프랑스의 부채는 계속 증대.

- 이든조약과 새로워진 영불관계: 1786년의 이든 조약은 영국과의 무역균형을 의미. 그러나 프랑스에 주어진 반주변부로서의 역할(영국의 면제품과 프랑스의 포도주)이 성립. 결국 일부 농업 기업가들에는 보탬이 되지만 제조업자 계급들은 위태롭게 만드는 부분적인 탈산업화. 조약의 결과 영국으로부터 면제품의 대량수입 초래. 포도주의 이익도 거의 없었음. <-> 이든 조약으로 영국은 국가세입 증대, 수출기회 확대, 높아지는 무역수지, 프랑스 시장 개방을 얻어냄.


◎ 프랑스 혁명의 재해석

- 프랑스 혁명은 이 세계경제 헤게모니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의 결과.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 물론 이러한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

-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에서 최초로 의미 있는 반체제운동. 근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영역이 마침내 경제적/정치적 현실과 합치되게끔 함.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첫 세기가 걸치고 살았던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붕괴.


◎ 국면은 만드는 것

- 전반적으로 유리했던 콩종크튀르 안에서 영국은 정치적으로 때로는 군사적으로 그 자신의 콩종크튀르를 만들어냄. 농업, 공업, 무역, 재정에서의 경제적인 격차를 결정적으로 증대시켰던 것은 영국의 정치적-군사적 승리.

- 농업: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기에 농민이 과시한 정치적 힘이 소유의 집중화 과정을 지연(심지어 중단)시킴. 그러나 영국에서는 전쟁 시기의 집중화가 사실상 가속화.

- 공업: 영국의 팽창이 훨씬 빨라졌다기보다는 프랑스의 속도가 느려짐.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는 스스로 자초한 붕괴의 시기. 1810~15년의 영국의 강요에 의해 나타난 새로운 느린 성장기. 영국에서는 선대제가 소멸되고 직물공업의 생산활동이 도시화하는 시기. 반면 프랑스에서는 직물공업의 선대제 구조가 사실상 창출되는 시기였음.


◎ 계급투쟁의 여파

-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유산. 민중의 경제상태 향상. (체감수준에서) 실질임금의 상승기.

- 영국: 1790년대 지독하고 효과적인 민중 탄압. 인신보호법 정지와 강력한 노동통제. 임금의 하락. 하위계층에게 파이의 일부를 떼어주기만 하면 됨.


◎ 새로운 헤게모니의 시대

- 영국의 헤게모니 획득: 전쟁의 종료와 함께 영국에게 진정한 헤게모니. 전쟁과정에서 네덜란드의 이전 헤게모니의 마지막 흔적인 금융중심지 역할도 종식. “공업적 유럽의 교사”로서 새로운 역할. 인구의 자연증가율 장려, 고용노동 비율 확대, 노동력 확대. 그러나 세계경제 전체의 노동계급이 차지한 파이의 몫은 줄어듦.

- 서유럽 전반과 미국의 북부 주들은 영국에 뒤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화를 계속해나감.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에 강력한 핵심부 지역으로 (재)등장.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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