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울즈․진티스, 이규환 역,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사계절, 1986
폴 윌리스, 김찬호․김영훈 역,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노동자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 민맥, 1989
김성윤/ 2006년 11월 21일
알튀세르는 가족, 교회, 학교 등을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ISAs)로 개념화함으로써 계급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논점을 제기한 바 있다. 가정과 종교와 교육은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호명하고 이로써 기존의 계급관계는 재생산된다. 여기서 쟁점은 기존의 계급관계가 과연 있는 모습 그대로 재생산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논의들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다분히 폐쇄적인 구조주의로 이해하고 사회주체들에게 자율성과 능동성을 부여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알튀세르의 입론은 종종 구조기능주의로 폄훼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불변한다. 만약 이데올로기론을 이렇게 가변적인 구조의 문제설정에서, 그리고 비환론적인 총체성의 문제설정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재생산의 문제 역시 전통적인 이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교교육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와 재생산의 문제설정에서 다루고 있는 보울즈/진티스와 윌리스의 논의는 우리에게 명백하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 두 논의는 미묘한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 보울즈/진티스는 미국의 학교교육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적합한 인간형들을 육성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당대의 시점에서 매우 적합한 문제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설정한 재생산의 관점은 선행하는 계급관계가 그대로 복제된다는 이해방식을 보이고 있다. 반면 윌리스는 보울즈/진티스가 괄호 쳐놓았던 ‘행위자’의 관점을 풀어헤친다. 윌리스의 관심은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노동계급으로서 긍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위치한다. 그 과정에서 ‘사나이들’은 학교교육이 설파하는 이데올로기들을 꿰뚫어보고 냉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인식은 명백히 분절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렇듯 이데올로기는 그 제작자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지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행위자들의 이탈적 행위와 인식을 재구조화하고 만다. 보울즈/진티스와 윌리스가 다른 점은 이데올로기의 작동과정에 대한 다른 이해에 있다. 보울즈/진티스에게 있어 이데올로기의 제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관계는 선형적이며 일방적이다. 그러나 윌리스가 발견한 둘 사이의 관계는 비선형적이었으며 (포섭되기는 하되) 다자적인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오늘날 교육의 문제는 매우 복잡한 지형을 그리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재생산의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단적으로 이데올로기 자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학생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교사들에게서조차도 이데올로기의 지형은 복잡하다. 다양한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가진 교사들이 존재하고, 또 교사 개인의 의식조차도 매우 모순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지배계급(의 대리자) 내부에 다양한 균열지점이 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며, 또한 지배이데올로기 자체가 매우 이질적인 형태로 유포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게다가 학생들조차도 교실이라는 장소 외에 가족, 학원, 종교, 또래문화, 대중문화 등의 장들을 통해 사회문화적 의식을 구성하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점들은 이데올로기와 계급관계의 재생산이라는 테제가 매우 복합적이며 총체적인 토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갈수록 분화되는 현대세계에서 보울즈/진티스와 윌리스의 연구가 곧이곧대로 적용된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이며, 구체적으로는 이데올로기와 재생산이라는 문제설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논의를 간단히 재구성하고 약평해보도록 하겠다.
학교는 불평등을 교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강제력을 지닌다. 보울즈/진티스의 관심사는 그에 따르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메커니즘 속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정당화된다고 보았을까.
그들은 기술·업적주의적 이데올로기(technocratic-meritocratic ideology)를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 ‘업적’이 강조되다보면 아이들은 복잡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구조적이라기보다는 소수 개인들의 기술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관료조직, 위계적인 권위체제, 업무분담, 불평등한 보수 등의 사회적 문제 역시 자연화된다. 심지어 저자들이 지적하는 당시의 IQ 논쟁은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를 유전적인 문제로까지 심화시키기까지 했다. 보울즈/진티스는 이러한 요인들이 결국 사회전반적으로 기술관료주의적 접근의 지지, 지위분배 기제의 강화, (능력에 따른) 직업기회의 한정 등의 현상을 유발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이 교육제도는 경제관계의 재생산을 위해 작동한다.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학교 안에서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경제적 생산성으로 귀결되는 경쟁적인 등수와 교육년수의 문제 등이 사회전체적으로 용인되는 효과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보울즈/진티스의 성과는 1970년대 미국의 자유주의적 교육체계가 사회전반적인 체계를 어떻게 재생산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방식의 교육제도 하에서 “교육은 가난을 개인의 실패 탓으로 돌리고, 권위를 정당화함으로써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현재 한국사회도 그러하지만,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교육이 실패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팽배했다. 교육이 사회에 기여하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어째서 능력 있는 인재들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인가. 왜 무수한 패배주의자들이 양산되는가. 교실은 왜 붕괴되는가. 아이들은 왜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명백히 부당전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보울즈/진티스가 확인하듯이, 교육 자체는 이미 자본주의와 동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은 ‘현대 자본주의는 왜 사회문제를 심화시키는가’로 수정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와 그에 기초한 인성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사회적 생산관계가 의식수준에서 재생산되며, 이러한 의식의 재생산은 단순한 메커니즘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들이 주목하는 지점은 가족과 경제체제 등을 포함한 일련의 제도들이다. 바로 교육이다. 개인의 자아개념 및 포부, 사회계급과의 일체감 등은 사회적 노동분업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테제를 수용한 흔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학교제도는, 첫째, “취업에 필요한 기술적·지적 기능들을 생산”해내며, 둘째, “위계적 지위에 적합한 인성적 특성을 양성하며 이를 고착화”하고. 셋째, “그로 말미암아 생긴 위계질서 유형을 통해 … 계층의식을 강화시킨다.”
한편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은 일상생활의 경험으로까지 확장 또는 심화된다. 여기서 보울즈/진티스는 대응원리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발견인데, 저자들은 학교 내의 사회관계가 학교 밖의 사회관계가 동형구조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해, 교장-교사-학생이 이르는 수직적 권위구조를 통해 아이들은 사회구조를 간접 경험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학습소외는 노동소외와 직결된다. 또한 노동자의 성취동기가 노동 그 자체와 기술의 습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승진 등에 있는 것처럼, 아이들의 성취동기 역시 학습과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과 같은 외적 보상에 근거한다. 이러한 원리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학습규율의 수용은 종국에는 노동규율의 내면화로 이어지며, 노동자들이 계급 내의 경쟁을 통해 자기-파멸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종국에는 작업장의 요구에 맞춰 자기 자신을 ‘파괴적’으로 발달시킨다.
그러나 아쉽게도 생산구조와 인성관계의 문제에 대한 보울즈/진티스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경제결정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 단적으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미래의 노동력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지, 개인의 전인적 발달이나 사회적 평등 실현과 같은 핑계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단정 짓는 데에는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이 따를 수 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수용되는 것인가.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실천적인 효과가 엄존하지 않은가.
윌리스의 논의는 마치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서는 어떠한 의견과 의식들이 교환되는지를 포착하고 있다. 보울즈/진티스의 재생산 관점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압도적인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집중한 나머지, 인간의 의식과 실천의 문제에 괄호를 쳐둔다는 점이다. 오히려 윌리스는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간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문제 역시 허위의식으로 단순화되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가 계급관계를 재생산하게 되는 제약조건 중의 하나로서 설명된다.
여기서 ‘간파’(penetration)란 특정한 문화 내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생활조건과 사회위치를 꿰뚫어 보려는 충동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조를 인식하고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간파는 그것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적 장애요소인 ‘제약’(limitation)으로 인해서 순수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부분적 간파’로 머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윌리스는 간파-제약->부분적 간파라는 변증법적 틀에서 이데올로기와 재생산의 문제를 입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울즈/진티스의 정태적인 재생산 관점에 비해 역동적인 속성을 보이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윌리스는 자신이 참여관찰한 이스트엔드 지역의 ‘사나이들’이 구성한 반학교 문화를 통해 그러한 과정을 확인한다. 반학교 문화의 의미는 단순히 퇴행적인 일탈행위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위문화론적 관점에서(윌리스 자신이 저명한 하위문화연구자 중 한 명이다) 지배적인 교육패러다임에 대항하여 학교교육이 가지는 맹점들을 간파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 그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반학교 문화 자체가 구조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필연적으로 탈구(혹은 탈구조화)의 계기들을 내재하는데, 그런 면에서 반학교 문화와 같은 것은 비단 교육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곳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탈구현상 역시 모든 사회문화적 행위양식이 그러하듯, 구조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탈구현상으로서 반학교 문화가 구조에 종속되지만은 않는다. 이러한 일련의 문제설정이 바로 구조의 가변성과 불변성을 함의하는 동학이다. 어쨌든 “반학교 문화는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성원들의 의지와 행동의 창조적인 역할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며 또한 그 스스로 구조를 생산, 혹은 재생산하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다.”
저자가 반학교 문화를 통해 개념화한 간파의 핵심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지식이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점에서도 의미 있는 등가물이 아니라는 점을 폭로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지점은 크게 세 가지 근거를 통해 설명된다. 첫째, ‘사나이들’은 자신들이 학교에서 순응하고 복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가가 공평치 못함을 꿰뚫어 본다. 달리 말해 희생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자격은 언제나-이미 제한적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학교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가치는 같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다. ‘사나이들’은 오히려 ‘얌전이들’을 씹고 비웃고 괴롭히면서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역전시키기까지 한다. 셋째, 자유주의체제 내에서 계급이동이 가지는 한계를 간파한다. 학교에서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순응을 강조하면서 개개인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개인논리를 펴지만, 아이들은 이 약속이 허구임을 알고 있고 오히려 우리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소결하자면, 그들은 이미 ‘무의지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반면, 이 ‘사나이들’은 몇 가지 분리의식을 통해 그들의 간파가 분절적인 간파로 머물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인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 남성과 여성의 분리, 그리고 백인종과 유색인종의 분리 등이다. 윌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분리의식은 “사나이들로 하여금 노동에 대한 합리적인 간파를 하는 데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학교교육에 대한 거부는 전도된 형태로 나타나서 정신노동을 평가절하하고 상대적으로 육체노동을 긍정하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졸업 후에 계급이동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노동계급으로 남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것은 왜곡된 사내다움에 대한 선망으로 드러난 채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을 형성하며, 그러한 사내다움을 위협하는 이웃동네 이주민 출신 ‘사나이들’에 대한 반발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분리의식은 얌전이-계집아이-깜둥이라는 일련의 사회문화적 계열을 형성하면서, 사나이라는 왜곡된 우월감에 빠지면서 스스로를 노동계급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러한 문제는 현실적으로 계급의식에 대해 지배이데올로기가 우위에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윌리스는 간파-제약의 변증법적 과정이 확정과 교란이라는 행위양식을 통해 작동된다고 설명한다. 즉, 특정한 사회계급은 자신이 선점하고 있는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문화들에 대해서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확정’(confirmation)하지만, 그러한 지배구조를 위협하는 문화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간파했던 것과는 모순적으로) 개인주의를 강조하여 방해하는 ‘교란’(dislocation)을 무릅쓰고야 만다.
노동계급 재생산 문제에 관한 윌리스의 문화기술지(cultural ethnography)는 우리에게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아이들의 경험을 통해 노동계급이 왜 계급문제 외의 문제에 있어 보수적이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둘째, 학교교육의 이데올로기적인 계급재생산 과정이 행위자 관점에서 어떤 메커니즘으로 전개되는지를 보여준다. 셋째, 이론적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어떻게 구체적인 행위자들과 교섭(negotiation)하면서 변증법적으로 구조화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에 대한 사회문화적 결과는 저자가 다음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자명하다. “이데올로기는 간파를 부분적으로 확정하고 그것을 교란시킨다. 그것은 ‘우리’(us)가 집합적 결속을 갖추고 자기선언적인 ‘우리’(we)로 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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