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의식, 이데올로기, 계급투표
― 프랭크 파킨의 「노동계급 보수: 정치적 이상함에 관한 이론」에 대한 노트
김성윤, 2006년 10월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방북한다고 했을 때, 들 떠 있던 한 노동자가 있었다. 그는 그 기차를 운전하기로 예정되었다. 공교로운 사실은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라는 것, 50대의 강성 철도노조원이라는 것, 그리고 전 대통령을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언가 불편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노동계급은 왜 보수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이것은 프랭크 파킨Frank Parkin이 말한 대로 일종의 ‘정치적 이상함’이다. 계급투표와 계급정치가 전무한 우리 입장에선 여전히 부러운 일이지만, 영국에서는 이미 노동자의 3분의 1이 보수당을 지지하고 있다. 한 마디로 문제적인 상황이다.
왜 이들은 자신의 계급 이해와 상반되는 투표 경향을 보이는 것일까. 맑스주의가 그렇게 깨뜨리고자 했던 허위의식 때문일까. 아니면 멕켄지와 실버McKenzie and Silver의 지적처럼 상위 신분에 대한 과도한 존중 내지는 동경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런시먼Runciman이 비판하는 것처럼 자기 계급위치에 대한 오인 때문일까.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심리학적이며, 태도의 차이를 지나치게 독립변수로 정당화한 혐의가 짙다.
1. 첫 번째 공백: 노동계급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란 무엇인가
파킨은 정치적 선택이란 폭넓은 범위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개인들의 애착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강조한다. 이 애착은 단순히 정당이나 어떤 프로그램 같은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인데, 왜냐하면 이렇게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육체노동자들의 노동당에 대한 충성심 하락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불행히도 파킨은 여기에 대해 속시원히 대답하지는 않는다.
이 공백을 우리 자신이 메워야 한다면, 대략 두 가지 정도의 답변을 내세울 수 있다. 하나는 물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둘은 서로 닮은 듯 다른 것이다. 물론 파킨 자신이 ‘허위의식’이라는 맑스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고 밝혔던 맥락에서, 그 ‘사회적 가치’가 물질성에 기반한 것으로 이해될 수는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증명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 문제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는다.
어쨌든 물신은 노동계급 자신도 잉여가치 혹은 잉여의 물질적인 그 무엇을 욕망한다는 담론 체계에서 나오는 개념이고,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물질성과는 동떨어진 채 부유하면서도 물질적인 사회적 관계가 유지․재생산된다는 맥락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는 데 따르는 이러한 갈림길은 실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자를 따를 경우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제학적인 가정(즉, 인간은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존재라는 전제)과 싸워야 하며, 후자를 따를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관념적인 체계들(즉, 물질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그 너머에 있다는 신념)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의 계급투표 양상을 ‘정치적 이상함’에서 그런대로 정상이었을 어딘가로 되돌려 놓길 바란다면, 노동계급이 애착하는 ‘사회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에 따르는 반사적인 실천reflexive practice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남긴 공백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논의에서 흥미 이상의 어떤 것을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다.
2. 두 번째 공백: 과연 그것이 구조적 요인이라는 말인가
일단 이 문제에 관한 언급은 자제하고 파킨의 논의를 계속 뒤따라보자. 파킨은 노동계급이 보수당을 지지하는 데에 어떤 ‘구조적 요인’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노동계급이 보수당에 투표하는 데에는 어떤 필터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는 이것을 ‘방탄환원’protective rings이라고 부른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체계에 얽매여 있는 개인들을 방패막이해준다는 것이다(여기서도 우리는 그가 말하는 지배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궁금해질 것이다). 그는 이 환원이 바로 노동계급 커뮤니티와 작업장의 하위문화라고 여긴다. 별도의 부연은 없지만 노동계급은 커뮤니티에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작업장에서는 공장 단위에서 계급의식의 자양분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노동자 개인을 둘러싼 환원의 개수가 줄어들면 보수당에 지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환원이 ‘규범적인 하위체계’를 형성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발견인데, 파킨은 립셋Lipset의 연구를 원용하여 공장의 규모에 따라 노동당 지지율이 비례한다는 점을 확인한다. 소규모 공장에서는 경영자나 소유자와 면대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온정주의에 쉽게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커뮤니티와 산업의 하위문화가 함의하는 이러한 규범적 구속성은 노동계급 여성과 퇴직자들에게서 보이는 높은 보수당 지지율에서도 재확인된다(노동계급 남성과 피고용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이것은, 파킨의 분석처럼, 노동계급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지층의 구성원들보다 오히려 중간계급과 개인적 접촉을 많이 했던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논의를 앞선 멕켄지와 런시먼에 대비시켜 ‘구조적 요인’에 관한 질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공백은 존재한다. 즉, 구조structure인가, 배치arrangement인가.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착취의 개념으로 설명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것을 구조주의적 사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파킨이 다른 논의들에서 언급했던 ‘사회적 폐쇄’와 ‘사회적 배제’ 개념에서도 뒤따르는 것이다. 사회적 폐쇄는 사회집단들이 배치된 양상과 동학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런 동학이 왜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해서는 난점이 따른다. 구조적인 변인이라 할 수 있는 착취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폐쇄와 배제는 오히려 착취과정의 일면적인 양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원래의 문제인 계급투표로 돌아오더라도 상황은 여전하다. 커뮤니티와 작업장 하위문화와 규범의 하위체계가 원환으로 둘러싸여 있는가 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노동계급은 정당선택은 외적인 계기를 통해서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두터운 방탄원환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정황에서처럼 노동당에 대한 실망이 팽배하거나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위력적일 경우 노동계급은 보수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방탄원환이 없을 경우에라도, 보수당의 독재와 부패가 만연했을 때 노동계급은 노동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그밖에 대중매체의 이미지 교란 등의 문제 역시 고려사항에서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계급투표 양상에 대한 파킨의 ‘구조적 요인’ 발견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불충분하다. 첫째, 파킨 스스로가 구조적 요인을 발견했다고 강조하더라도, 이것은 무언가가 투사된 ‘부분적인’ 배치 양상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계급투표의 메커니즘을 단순화시킨 나머지 보다 역동적인 구조, 즉 정세와 국면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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