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란차스와 E. O. 라이트의 계급론 비교

김성윤/2006년 7월 20일

0. 계급론 이해의 틀


계급은 집단을 말하는가, 단순히 사회적인 위치를 말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행위/구조, 개인/사회, 미시/거시 등과 같은 문제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조에 관해 사회학에는 상이한 이해 방식들이 있다. 구조는 우선 개인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출생이나 죽음과 무관하게 개인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관계들이며 그 구성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이런 측면에서 행위자의 행위는 구조를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때 개인의 행위는 구조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얼마나 그러한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 바로 ‘구조의 제약성’을 논하는 것이 된다.

구조에 관한 쟁점 중 하나가 바로 계급구조에 관한 논의이다. 계급구조를 말한다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를 논하는 것이다.

첫째, 계급구조를 말한다는 것은 불평등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때 불평등은 불평등의 양적 차이를 추적함으로써 확인이 가능할 수 있다. 직업지위, 평판, 소득 등에서 그러한 양적 편차를 알 수 있다. 또한 불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양적 차이를 확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의 관계와 경향성을 발견하는 것 역시 포함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성이란 양적 차이와 일치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맑스주의와 베버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이 시사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관계의 내용을 규명하는 것이다. 거칠기는 하지만, 맑스주의는 ‘착취’에 주목하며, 베버주의는 ‘권력분배’에 주목한다. 따라서 맑스주의에서는 자기를 위한 노동과 고용주를 위한 노동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임노동(추상화된 노동) 관계와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중요시한다. 물론 베버주의에서도 계급론을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경제적 권력과 지위의 문제가 주목을 받는다. 권력의 중심과 시장의 상황에 따라 권력 분배가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 계급구조를 다룰 때에는 어떻게 개인이 집단을 이루고 행위하는가라는 질문이 빠질 수 없다. 바로 계급형성의 문제이다. 집합적 행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 이론과 사회운동론 등의 핵심적 주제를 이루는 부분 중 하나이다. 이를 테면 집합적 행동(collective activity)은 개인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공토의 비극,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 등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제기된다. 행위자들의 행위는 매우 복잡한 맥락에서 일어난다. 행위가 단선적이지 않게 하는 것들을 과연 무엇인가. 우리 일상에 널려 있는 상식이나 종교적 코드와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문제는 또한 주체형성의 문제이자 문화의 문제이기도 한데, 가령 포스트맑스주의가 말하는 다중적 정체성의 문제설정 등이 그 일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통해, 주체와 행위가 일치하지 않게 되는 현상들(가령, 노동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오히려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단선적인 정체성(흔히 계급)만으로 이뤄진 사회학적 분석은 불충분할 수 있다.

계급문제, 정확하게는, 계급구조의 문제를 논할 때에는 구조/행위/주체를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직화된 개인과 그렇지 않은 개인 간의 차이를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양적 차이를 보이고 사회적 관계의 경향성을 띠는 불평등의 구조는, 특정한 사회관계의 맥락 속에서 계급을 형성하는 집합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의 행위와 조응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개인들을 복합적으로 만드는 복잡한 주체형성의 지도와도 공명한다.



1. 니코스 풀란차스의 계급론


풀란차스의 계급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질문이 앞서야 한다. 우선 그는 왜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계급론을 제시했는가. 둘째, 그의 계급이론이 역사적 맥락에 있다고 할 때 유로-꼬뮤니즘에서 필요했던 이론적 논의는 어떤 것이었나. 셋째, 그가 알튀세르의 제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계급론이 가지고 있는 구조주의적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그의 계급이론을 이렇게 맥락적으로 파악할 때, 맑스주의 계급론이 전반적으로 어떤 궤적 속에서 변화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갈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풀란차스의 계급론은 우선 계급을 위시로 한 경제결정론에 대해 비판했다는 점을 이해의 시작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는 ‘구조적 총체성’의 맥락을 지적하고 있는데, 풀란차스는 이를 ‘권력관계의 작동’으로 이어받는다. 이 둘 다 계급의 구조적 결정을 지적하면서 그 동력으로 이데올로기를 삼은 것이다. 이데올로기론의 도입으로 경제결정론은 상대적 자율성에 의해 극복된다. 이러한 일련의 계열들은 종종 ‘구조주의적 계급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게 된 계기는 과연 무엇일까. 풀란차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20세기 들어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이들로 인해 새롭게 형성된 조건 하에서 어떻게 정치활동을 전개하겠는가로 봉착한다. 예를 들어 화이트칼라 관리직이 등장했을 때, 그는 이들을 ‘노동자가 아니라, 새로운 쁘띠부르주아’로 분류했다. 왜 그랬을까. 그에 의하면, 이들은 경제적으로 노동계급이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노동계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분류가 까다로운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면서 그에 따라 새로운 이해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어떻게 하면 전통적인 노동의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이 새로운 흐름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인가.

풀란차스는 이를 ‘계급들의 연합세력’으로 분리해낸다. 그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는 계급을 아래 그림과 같이 분류하면서, 3번에 속하는 노동자들이 진정한 노동계급이며 나머지 부류를 새로운 형태의 쁘띠부르주아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들 1, 2, 4번의 사람들을 경제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동일한 계급이라고 단언했다. 이들은 성취지향적이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로서, 구-쁘띠부르주아와 같은 성격이라는 것이다. 또한 관리?감독?전문 직종에 속하는 이들이 자본주의 구조 내에서 재생산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 또한 풀란차스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샀다.

생산적

비생산적

1

2

정신노동

3

4

육체노동

어쨌든 풀란차스에게 있어서 노동계급의 진정한 주체는 생산하는 육체노동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계급범주에는 생산노동과 비생산노동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단점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 사회적으로 필요노동 개념이 개입하게 되면, 서비스직마저도 신-쁘띠부르주아에 포함되는 문제점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에도 애매한 점이 있는데, 간호사처럼 전문직이라도 육체노동자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애석하게도 풀란차스의 생각과 달리 구상과 실행에는 완벽한 분리란 있을 수 없다.

풀란차스가 가지는 이러한 문제점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는 이데올로기 문제를 중심으로 계급관계를 재정립했는데, 이데올로기 관계가 가지는 가변성 때문에 그의 계급구분은 그 기초부터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가령 프랑스 쁘띠부르주아가 우파를 지지하는 정치성향을 가졌더라도, 그와는 정치적 맥락이 다른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쁘띠부르주아는 좌파를 지지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자국만을 따지더라도 정치?경제?문화적 국면에 따라서 정치적 선택이 다양해질 수 있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로 계급성을 따지는 것은 애초에 위험한 발상이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이데올로기 측면에 천착한 나머지, 신-쁘띠부르주아와 구-쁘띠부르주아를 뭉뚱그리게 되면 이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상이한 경제적 이해가 아예 무시될 소지가 있다. 즉, 이데올로기 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관계를 무시함으로써, 오히려 비맑스주의적 경향에 매몰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풀란차스의 계급론에 이러한 맹점이 있다고 해서 그가 이룩한 국가론의 신기원적 측면마저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계급과 사회 범주에 있어서 그는 어디까지나 계급 역학을 추적하였고, 그 결과 계급 단위의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에 주목했다. 그를 주목하게 만든 것은 여기서 비롯되는 ‘권력 블록’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지배를 단일 계급의 순수한 지배로 보지 않는다. 그는 노동계급의 분화와 더불어 자본가계급의 분화 역시 목도했다. 풀란차스는 노동귀족의 대두, 쁘띠부르주아의 성격 분화와 더불어, 애초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해석에 따라 자본가계급에서도 민족자본과 매판자본이 구별되는 지층 또한 지적했다. 계급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국면에 따라 노동계급이나 자본가계급 모두 사회적 분절과 다양한 형태의 연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 블록은 일종의 지배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기와 지배의 문제, 즉 국가론이 대두된다. 맑스가 국가를 지배의 도구로 보았던 것과 달리, 풀란차스는 국가를 ‘지배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국가에는 재생산 기능이 있으며, 결국 노동의 동질화와 자본의 이질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풀란차스는 국가가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각 계급들은 국가를 차지하려 하고, 반면의 기성의 국가는 총자본의 이해를 강변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중 하나이다. 여기서 그는 지배계급은 지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든스의 지적처럼, ‘비즈니스 계급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다. 즉, 자본가계급의 관심은 지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있다. 현실적으로도 정치와 경제는 분리된 측면이 존재한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파정권이 들어선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구조 차원에서의 그 영향력은 지속된다.

풀란차스의 이론적 편력은 앞서 말한 대로, 중간계급의 대두와 이데올로기적 문제 설정을 기초로 하는 계급론과 국가론으로 살펴볼 수 있다. 풀란차스는 계급분석을 통해 현실정치를 볼 수 있는 일련의 레퍼토리(권력 블록, 헤게모니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준다. 이러한 지적 행로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중심으로 하는 유로-꼬뮤니즘이 발하는 당대의 사회적 요청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계급구분에 대한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실정치 분석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그동안 교조적 맑스주의가 가졌던 정치-경제에 대한 일치적 이해를 해소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이론이 계급관계와 국가의 상호연결성을 보여준 정치이론이라고 하는 점은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 E. O. 라이트의 계급론


라이트의 계급론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우선 그는 1970년대에 풀란차스와 계급론 논쟁을 펼쳤으며, 1980년대에는 애초부터 영향을 받았던 분석적 맑스주의 경향을 발전시켰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같은 분석 맑스주의자 로머의 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사회학적 완숙미를 더했다. 1976년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글을 기고하면서부터 시작한 그의 계급론은 1997년 Class Counts로 자신의 이론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집대성하기까지에 이른다. 따라서 그의 계급론을 보는 것은 그 22년 세월의 여정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풀란차스가 계급론에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 기반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접목시켰던 것과 달리, 라이트는 노동과정론을 중심으로 생산양식의 문제를 계급론에 끌어들였다. 그는 현대의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가정 중심의 소상품 생산양식으로 구분한다.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는 임금노동을 제공하는 사람과 이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어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그 근간을 이루는 노동과정에도 새로운 진화양상이 등장했다. 노동자를 관리?감독하는 새로운 피고용자가 등장한다. 특히 현대사회의 기업문화에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정착되면서 이중적 성격을 지닌, 매우 ‘모순적인 계급위치’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라이트는 단순히 계급이라 하지 않고 위치라고, 즉 ‘계급구조에서의 위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분업체계로 구성된 관리자와 감독자의 위치를 조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위 표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의 모순적 계급위치가 바로 CCL이다. 라이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소상품 생산양식간의 모순적 계급위치에 주목하는데, 소고용주나 반자율적 노동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때 모순적 계급위치는 가변성을 가진다. 풀란차스는 이 대목에서 이들을 쁘띠부르주아로 뭉뚱그리지만, 라이트는 이들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힘이 교환되는 방식에 따라 그 성향이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령 앨빈 굴드너가 인텔리겐챠와 ‘새로운 계급(new class)’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은 때때로 자본주의 내의 비판적 집단이 될 수도 있다. 지식, 기술자, 전문가들은 산업사회의 모순을 인식하며 해결하기도 하는 집단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의 CCL은 굴드너와 같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열어 놓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라이트의 계급론은 보다 역동성을 띠게 된다. 1972년 이래 시작된 분석적 맑스주의의 영향이 비로소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분석적 맑스주의자로 우리는 지금 논의하고 있는 사회학의 라이트를 비롯해, 꼬뮤니즘의 설파자로서 G. A. 코헨(철학), 사민주의 정치학을 강조하고 새로운 계급정치 경향을 목도했던 아담 쉐보르스키(정치학), ‘신 포도’를 통해 합리적 선택 이론을 활용한 욘 엘스터(정치학), 급진적 민주주의와 이른바 브레너 논쟁을 촉발시켰던 R. 브레너(역사학)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과학적 방법을 동원하면서, ‘부르주아 과학’론에 대해 다시금 생각게 했으며 맑스주의의 미시적 기초를 수립했고 주체에 대한 메커니즘을 해부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 중에서도 이 시기 라이트에게는 경제수학의 게임이론을 맑스주의와 접목시켰던 존 로머(경제학)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1982년 『착취와 계급에 관한 일반이론』을 통해, 로머는 착취의 세 가지 양상(봉건주의적 착취, 자본주의적 착취, 사회주의적 착취)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그는 노동시장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부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교환과 거래의 양식을 거쳐 착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임노동이 사라진다고 해도 착취는 발생하며, 정치적 지위에 의해 노동산물에 대한 통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없이 상품시장이 매개되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필수성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노동산물이 결국 부자들에게 이전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착안한 라이트는 로머와 마찬가지로 착취의 문제에 천착한다. 라이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착취의 형태로 생산수단의 소유에 따른 자본재를 우선 언급한다. 그 다음 그는 국가사회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착취를 주목하는데, 이것은 개인의 지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직재에 의해 발생한다고 이해했다. 가히 자본에 비견할 만한 조직재는 배타적인 혜택에 기반해 있다. 착취가 일어나는 세 번째 기제는 기술의 불평등 문제와 관련이 있다. 국가는 특정한 기술에 대해 자격증으로 경쟁 이외의 사회적 배제와 접근 제한으로써 사회구성원 일부에게 독점적 혜택을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기술재에 관한 핵심적 내용이다. 가령 인적 자본론 등은 이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자본재)

생산수단의 소유

소유

비소유

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

조직재

O

X

CCL

CCL

O

기술재

CCL

PT

X

왜 모순적 계급위치(CCL)의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PT)를 착취하기도 하는가. 이에 대해 라이트는 로머의 연역방법을 원용한다. 조직재에 있어서 보통 권력이 민주화되면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의 사람들에게는 물질적 혜택이 감소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기술재에서는 자격증 등이 일반화되면 될수록 그에 대한 혜택이 떨어진다. 따라서 특정한 기술이나 학력에 대한 접근이 통제적이며 독점의 양상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배타성에 기반하여 잉여이윤을 획득하고 결과적으로 착취가 필수적으로 일어난다. 라이트의 이러한 분석은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서 조직과 기술로 그 영역을 넓혔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언제나 착취조건이 철폐되는 것이야말로 역사발전이라는 말로 맑스 역사이론과의 절합 지점이 된다.

계급론에 관한 라이트 세 번째 걸음은 1990년대 들어 그가 로머의 게임이론 원용을 사회학적으로 전환시키면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먼저 계급착취 개념을 지배의 문제로 확장?대체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조직에서 권위 개념을 도입하고 기술재를 기술로 대체하는데, 자본은 소유가 가능하지만 조직은 소유나 이전이 어렵고 세습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권위의 개념을 거론하는 것이며, 기술재 역시 유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장교환의 상황에서만 그 혜택이 이뤄진다는 점에서(자본은 소유만으로도 혜택이지만) ‘기술’로 대체하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불평등을 더 이상 역사이론과 결부시키는 것은 포기했다는 점이다. 불평등의 문제를 역사이론과 연결하는 것은 도식적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불평등을 소비에트 사회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이므로 다소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위와 기술은 불평등의 문제를 야기하면서 왜 높은 임금으로 이어지는가. 그것은 충성지대(권위)와 독점지대(기술) 때문이다. 이것을 누리는 집단이야말로 모순적 계급위치이며 오늘날의 중간계급이라는 것이 라이트의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앞의 표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계급들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다시 정리될 수 있다.

권위

O

X

CCL

CCL

O

기술

CCL

PT

X

라이트의 계급론에서는 크게 3가지 쟁점을 확인할 수가 있다. 먼저 생산수단?권위?기술에 있어 착취의 다차원성을 거론하면서 불평등의 다차원성을 포착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피고용자 내부의, 즉 생산수단의 비소유자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할을 적실하게 강조할 수 있었다. 둘째로 현대의 계급이론을 물질적 관계로 분석할 수 있는 설명틀을 구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E. P. 톰슨류의 계급의식 형성에 관한 주장과는 자못 상반되는 대목이다. 조직화와 연대의 토대와 객관적 조건을 규명했기 때문이다. 고통의 연대의식이 없다면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독자적인 계급문화가 없더라도 계급이 부존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관계에서 계급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의식이나 활동의 문제가 오는 것이다. 라이트의 이러한 사회학적 관점은 역사학에서 이뤄지는 접근법과는 매우 다르다. 셋째로 엄존하는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설명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적합한지를 논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달리 말해서 기존의 맑스주의적 접근이나 다른 사회과학 이론에 비해 얼마나 더 타당한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의 비판적 접근의 계급논의는 이를 테면 계급투표와 같이 사회갈등이나 정치의식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설명되었다. 이것이 현실과 경험적으로 얼마나 잘 맞아떨어질 것인가의 문제에서, 라이트의 계급론은 기존의 계층이론보다 구조적인 설명틀로서 더욱 잘 수용된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라이트가 야기한 쟁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론은 기본적으로 생산관계 문제에 기반해 있다. 생산관계에 없는 아동, 실업자, 주부, 학생 같은 이들은 경제활동인구가 아니기 때문에 계급관계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라이트는 이들을 ‘매개된 계급’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아버지나 남편을 통해서 계급위치를 포착하는 것은 분명 쟁점사항이 되고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매개된 계급의 경우가 아니라, 한 집안에 다른 계급적 구성이 혼재됐을 때의 문제다. 이럴 때 이들을 개인 단위로 분석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 단위로 분석할 것인지도 논란이 된다. 라이트는 이러한 경우를 교차-계급가족이라고 부르며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다. 마지막 쟁점은 중간계급의 경우 사회성격에 따라서, 그리고 고용관행에 따라서 계급관계의 경우가 상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일본의 내부노동시장은 한 개인이 노동계급에서 중간계급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보이는 한편, 스웨덴의 중앙교섭체제는 조직내 권위의 경계가 매우 분명하다. 즉 계급경계는 계급구조가 아닌 다른 요인들(이를테면 교섭체제, 고용체계, 인사관행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이를 ‘비교연구’를 통해서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비교연구를 하게 되면, 이러한 요인들은 더 이상 확정된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유동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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