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1999. 이상훈 역. 「미국주의와 포드주의」. 『그람시의 옥중수고 1』. 거름
김성윤/ 2006년 4월 25일


미국화 국면의 정체는 무엇인가


생산력과 생활양식의 모델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의 인식론은 ‘생산력과 생산양식(관계)’의 고전적 모델이 아니라 『독일 이데올로기』까지 맑스가 설정해왔던 ‘생산력과 생활양식’이라는 문제-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포드주의적/테일러주의적 생산양식이 각 사회계급들의 생활양식 전반을 거쳐 어떻게 강제되는지(혹은 동의되는지)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물론 유럽 사회, 특히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변화를 추동하는 기본적인 동력은 바로 생산력의 지속적인 확장을 꾀하고자 하는 흐름에 있다. 필연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야말로 자본 일반이 자체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경로일 것이다. 그람시는 여기서 미국적 생산체제가 유럽사회에 도입되는 것이 하나의 국면을 형성하고 있음을 직시한다. 단, 이것이 자본주의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러한 흐름이 ‘정도의 문제’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브로델식으로 하면, 자본주의는 장기지속의 층위에 있으며, 미국주의는 콩종크튀르의 층위에 속하는 것이다.

유럽의 사회구조와 미국적 합리화의 모순?

미국은 유럽과 달리 봉건주의적인 잔재가 부재했다. 유럽과 같이 낡은 침전물(사회계급)에 따른 저항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전무했다. 그런 까닭에 생산양식의 합리화와 이를 둘러싼 국가/자본/노동계급의 역할분담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국가는 애초에 자유주의적 국가의 성격을 표면화했고(실상은 계획경제였겠지만), 자본과 노동 역시 새로운 세계적 흐름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와 사정이 달랐다(이것은 한국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럽에는 침전물이 두텁게 존재했다. 역사가 깊은 만큼 그 두터움 역시 내밀하다. 달리 말해 유럽의 인구학적 사회구조는 그 모순의 복합성이 특징이었던 셈이다.


그람시의 관심은 이렇게 복잡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대체 어떻게 미국주의가 이탈리아 사회에 관철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그는 이 과정에 기본적으로 몇 가지 요인이 있었음을 갈파한다. 첫째는 ‘저축생산자’라는 기생적인 금권정치적 계층의 새로운 행보(이것은 산업의 이윤율 저하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이고, 둘째는 여기서 파생된 사회적 강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동참 혹은 동의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국가가 최후의 보루로서 행했던 기능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관찰 대상이 된다.

미국화에 대한 반동과 찬양의 기로에 선 자본?

저축생산자들은 사실상 오늘날 한국의 부동산투기자본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따라서 이들의 존재는 나폴리와 같이 산업생산의 비중이 적은 곳의 대도시화 현상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전체 산업구조에 있어 기생적이며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체제 간의 경쟁에서 미국이 유럽을 압도했다는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로 점철된 미국의 극대화된 생산력은 낡은 유럽 사회에 있어 다분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관건은 생산양식의 미국적 합리화의 흐름이 유럽의 (사회구조적인) 전통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본 일반은 따라서 기로에 봉착한다. ‘반동할 것인가, 찬양할 것인가.’


명시적으로 서술하진 않지만, 그람시는 이 기로가 자본 일반의 존폐위기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이 혁신에 찬양을 하든 반대를 하든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화에 기꺼이 동참했을 경우, 개별 자본의 이해득실 문제는 비교적 자명하다. (노동계급이 새 체제에 동의했다는 전제 하에) 이들은 미국의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누리고 있는 잉여 향락을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흐름에 반동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저축생산’에 대한 국가 행정의 기능이 버팀목이 되고 있는 한, 이들은 효과적으로 새로운 축적 메커니즘에 적응하여 금융자본으로 변태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람시는 미국주의의 수용 문제는 노동계급에 떨어진 과제가 아니라, 순전히 ‘해체되어가는 낡은 계층의 몫’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인 국면의 성격 상, 지배층은 진화할 수밖에 없다(이 문제는 끊임없이 미국화를 주창하는 오늘날 한국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질의 개선으로 나아가는 노동계급?

유럽이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를 적용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자본의 이해관계 못지않게 노동계급의 강제적?자발적 움직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기 노동계급의 동학을 특징짓는 데에는 크게 두 흐름이 존재한다. 노동계급의 움직임에는 생활양식에서의 정신분석학적 계기와 더불어, 생산양식에서의 물질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생활양식의 차원에서 그람시가 주목하는 계기는 인간의 동물성이 산업에 의해 복속되는 지점에 있다.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가 추구하는 효율성의 원리에 입각했을 때, 노동자의 동물성은 철저한 삭제 대상이다. 따라서 성적 본능을 최대한 노동과정에 훼방되지 않도록 합리화하며, 주류의 양조?판매 역시 가능한 한 금지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작업의 합리화하는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게다가 청교도 윤리가 지배소로 자리 잡는 미국화의 맥락에서는 지배층 역시 노동계급처럼 ‘일에의 소명’을 중요하게 간주했던 탓에, 노동계급의 동의는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다(이로써 지배층 역시 고유의 방탕한 생활로부터 합리화된 생활로 전회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간의 성적 본능을 비롯한 여타의 리비도적인 힘은 철저히 억압되고, 여가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는 테일러주의로의 이행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물론 문제가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노동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게다가 욕망의 억압이 극대화됨에 따라), 노동자의 저항에의 의지 역시 고조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포드주의적 시스템의 기본적 요지가 생산물의 수송/분배를 효율화하여 상품 가격을 낮추면서 임금을 높게 책정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본과의 교섭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들의 의지가 고임금에 의해서 봉합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상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들의 노동 강도는 운명적으로 유지-강화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로써 새로운 작업과 생산 과정에 최적화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 생활양식과 생산양식 전반에 걸쳐 ― 합리적으로 양성되기에 이르렀다.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는 국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전체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가. 즉 후발국가로서 혁신적 조류에 동참하는 분위기에서 자유주의적 국가로 이행하는 것인가. 외견상 이 질문은 긍정될 수 있지만, 사실상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 왜냐하면 국민국가 내의 생활양식 규제에 있어 국가의 기능은 다분히 실질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금주령은 누가 내렸는가. 성적 도덕윤리를 유포하는 장치는 누가 관리하는가. 금융자본의 축적 기반은 누가 마련해주었는가. 공업사채 등의 부실성에 따른 최후의 보루는 누가 담당하는가.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에서 이러한 질문에 차근히 답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답변은 이미 행간 속에 암시되어 있다. 바로 국가이다. 미국화의 흐름은 국가가 파시즘으로부터 탈피하는 듯한 양상을 띠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 권위주의적 속성만은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생활양식 전반에 걸쳐 청교도적 윤리(우리 식으로는 내부노동시장으로 노동계급의 동의를 이끌어냈던 유교적 윤리)를 강화하고, 자본 일반의 이익을 ‘뒤에서 진두지휘’(이것만이 다르다)하는 특성은 여전히 전체주의적이며 계획경제적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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