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해제된 대학생들 ― 캠퍼스드라마와 대학생 재현의 정치


김성윤



1. 왜 캠퍼스 드라마인가


대학문화 만큼 오래되고 진부하며 강박적인 주제도 드물 것이다. 저항과 전복의 진지로서 가졌던 대학의 특권적 위상은 거의 사라진 게 사실이며, 게다가 문화에 대해 저항이나 전복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점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겠다. 대학문화는 청년문화다(그 역은 성립하지 않겠지만). 게다가 20대 초반의 절반 이상이 대학 문턱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대학문화는 우리 사회의 문화 구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적지 않은 문화연구자들이 대학문화에 관심을 끊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대학문화에 접근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대학문화의 개념화를 통해 대학생들의 욕망을 의미화하는 방식이다. 이 중에서도 문화정치학의 관점에서 대학문화를 지배적인 문화에 대응하여 ‘부상하는 문화’로 의미화하려는 작업들이 있는가 하면,1)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아직 의미화되어 있지 않은 ‘하위문화’의 영역으로 가늠하는 작업들도 있다.2) 또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대학문화론은 문헌적이거나 전혀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TV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재현되고 일상 개인들의 경험적 차원에서 깊이 수용되는 양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특정한 혹은 불특정한 재현체계를 통해 수용자들의 욕망을 상징화하면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기호화의 과정을 삽입하며, 구체적으로는 캠퍼스 드라마나 캠퍼스 시트콤 등을 통해 대학을 아예 전경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련의 코드들 속에 배경화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재현의 작동이 구체적으로는 정전문화-대중문화-하위문화의 삼각 축3)에서 대학문화를 하위문화의 긍정성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캠퍼스 드라마류가 공중파 방영에 의지하고 있는 한, 케이블TV 제작과는 다르게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감수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에서 국내 캠퍼스 드라마의 재현양식들은 생래적으로 보수성으로의 전회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캠퍼스 드라마의 사회적 위치와 개인에 대한 영향력, 나아가 캠퍼스 드라마를 통한 개인들의 자기 구성을 맥락화하고자 한다. 당대의 문화텍스트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문화적 규제 환경, 그리고 규제를 통한 생산, 그 생산물에 대한 소비, 소비를 통한 정체성의 구성과 재현의 정치가 어지럽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4) 이런 까닭으로 캠퍼스 드라마 역시 그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고, 생산-소비의 과정을 통해 어떠한 코드들이 재현되고 개인들의 정체성 구성과 연동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문화텍스트가 이를 수용하는 개인의 정체성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이미 학문적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상식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전혀 학문적?정치적 태도라고 할 수 없다.

TV드라마는 특정한 사회상을 끊임없이 재편한다. 그리고 사회는 우연적이든 필연적이든 변해간다. 그 변화의 지점에서 TV드라마는 일정한 재현의 고리 역할을 맡는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청년세대, 특히 대학생들이 사회 변화에 끼쳤던 지대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TV드라마 중에서도 캠퍼스 드라마와 재현체계에 대한 접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재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의미가 거울처럼 그대로 반사된다는 차원에서 언어 기능에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반사/모방의 접근). 둘째 의미를 작가의 의도로써 설명하는 방법이다(의도의 접근). 그러나 언어의 본질이 언어적 관습과 코드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두 방법에는 단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글을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언어의 대중적이고 사회적인 특성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재현 체계를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재현은 물질적 대상을 사용하는 실천이며, 의미는 물질적 특징이 아니라 상징적 기능에 의존하게 된다. 이 명목론적 유물론의 세계는 두 가지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삼는다. 재현체계는 특정한 사물과 세계에 대해 그 개념적 지도와 기호체계 사이에 상응해야 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와서는 개념과 이미지의 체계들과 함께 정신적 재현을 수행해야 한다.5) 재현체계를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이를 추적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재현체계를 물질의 동반과정으로 보는 한, 기호체계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그 이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캠퍼스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 텍스트만을 해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고, 당대의 문화적 지형도와 더불어 개개인의 역동적인 자기 구성과정을 함께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대학문화와 캠퍼스 드라마 간에 놓여 있는 지형도를 재현체계의 한 축으로 삼고, 이러한 문화적 지형이 개개인에게 어떠한 개념과 이미지들로 구성됐는지를 나머지 한 축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대학문화와 캠퍼스 드라마가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지를, 대학생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그리고 이 과정이 어떻게 다시 대학문화의 형태소들을 이루게 되는지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2. 캠퍼스 드라마의 계보학 ―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논스톱> 시리즈까지


(1) 당대의 캠퍼스 드라마들

캠퍼스 드라마의 첫 시작은 KBS의 <사랑이 꽃피는 나무>(1987~1990)였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기가 1987년이라는 점은 다소 흥미를 끌 만하다. 1987년은 6월항쟁과 한국사회 민주화의 표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당시에 시작한 <사랑이 꽃피는 나무>는 미디어 고고학적으로 접근한다면 단순히 캠퍼스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에만 그치지 않는다. 70년대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과 <고교 얄개> 시리즈 등으로 가히 청춘영화의 전성시대라 할 만한 시기였다. 반면 70년대 후반 이후로 청춘영화는 급격한 퇴조를 겪고 1983년 영화 <대학신입생 오달자의 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암울한 시기에 청년은 재현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불문율이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등장한 시기는 이 불문율이 철저하게 해소되던 때였다. 당시 영화로서는 이규형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가 있었고, 굳이 대학생을 재현하지 않더라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있잖아요 비밀이에요>(1990) 등 무수한 하이틴 영화들이 히트넘버로 기록됐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당시 캠퍼스 드라마를 비롯한 청춘극의 역사란 특정한 시대적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 되며, <사랑이 꽃피는 나무>는 그 계보에서 거의 시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1987년에 나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각각 캠퍼스의 시대적 아이콘이 될 뻔 했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와 <사랑이 꽃피는 나무>는 불행한 시대적 편린 그 자체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의 주인공들은 시험 답안지에 ‘사랑해요’를 가득 채우고 F학점을 불사하더라도 필사적으로 놀아보겠다는 인물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바보들의 행진>보다는 <고교 얄개>의 계열에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87년 이후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노조 결성으로 대학문화의 지배적인 코드에 사회 비판적 메시지들이 넘쳐나던 때에, 대학생에 대한 이러한 재현은 다분히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재현양식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도 드러난다.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서 브라운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릴 가능성이 높은 의대생들이었다. 이들은 캠퍼스를 활보한다. 이들을 따라가는 카메라 트래킹은 과격한 문구가 적힌 캠퍼스의 현수막을 배경화하며 스윽 지나가고, 그렇게 잔영으로 남는 메시지들에 아랑곳없이 인물들은 각자 주어진 대사들을 읊조린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새마을운동체제의 담지자들이 되어, 당시 들끓던 청년들의 에너지는 마땅히 기능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야 할 것을 은연 중에 강조한다.

시대의 결정적인 분기점에서 대학생에 대한 이러한 재현은 자못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대학문화는 당시 지배문화에 대항하여 부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스스로를 70년대적 우울한 하위문화 성격에서 시대의 새로운 정전(canon)으로 탈바꿈하려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1987년 캠퍼스 드라마를 통해 이러한 재현양상들은 대학생과 대학문화의 위치만을 비췄을 뿐 대학문화가 가지는 시대적 지향점은 철저하게 비가시화하고 뒤틀어버렸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 종영과 비슷한 시기에 방영을 시작한 MBC <우리들의 천국>(1990~1994)과 KBS <내일은 사랑>(1992~1994)은 대학문화의 시대적 전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천국>은 홍학표가 주연으로 나왔던 전반부와 김찬우?장동건이 주연으로 나왔던 후반부로 갈리는데, 전반부에는 다양성에 대한 강조가 특이점으로 자리 잡고 있고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물질 가치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우리들의 천국>은 앞섰던 캠퍼스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와는 다르게 주연과 조연의 위계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만큼 각 캐릭터들의 개인사적 접근(이를테면 서울 출신 홍학표와 시골 출신 정명환 등의 구도들)이 비중 있게 다뤄졌으며, 그러한 코드들은 다양성에 대한 이념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환기했다.

<우리들의 천국>의 그러한 그런 측면을 잘 설명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방영 초기에 홍학표의 첫사랑은 바로 선배 배종옥이었는데, 배종옥의 애인은 역시 선배로 위장취업으로 감옥에 다녀온 전력이 있는 문성근이었다. 고풍스러운 한옥 사랑방에서 배종옥의 아버지(중견기업의 사장)는 문성근과 배종옥을 나란히 앉혀 놓은 채, 문성근을 호되게 꾸짖고 노조의 폐해에 대해 훈시를 늘어놓는다. 여기에 문성근은 “사장님의 그런 욕심이 그치지 않는 한, 마르크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꾸한다.6)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문성근은 배종옥을 데리고 신접살림을 차리기 위해 세상을 등진다. 달리 말하자면, 극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부터는 홍학표의 시대가 도래한다. 그는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다. 90학번으로서 그는 소위 ‘낀 세대’이며, 맑스(를 사랑했던 배종옥)를 첫사랑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버림받은 비극적인 존재다. 이제 그의 욕망적 기표들은 가짜 대학생 최진실, 철부지 신입생 염정아 등으로 부유하다가 끝내 군입대라는 현실세계의 진입을 앞두고는 ‘현모양처’감 유호정에게 안착한다. 이는 우연찮게도 맑스주의라는 거대서사의 위기와 포스트주의의 득세라는 90년대 초반 당시의 대학사회, 더 크게는 한국사회의 맥락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천국>의 시대성찰적 면모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극 중반부터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박철이 등장하고 종영 즈음(최진영?전도연?이승연 등 주연 당시) 해서는 카페를 아지트 삼아 들락거리는 등,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지향적인 대학생으로의 재현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반면 <내일은 사랑>(1992~1994)의 키워드는 출발부터가 신세대였다. 이들의 아지트는 처음부터가 카페였고, 아르바이트 장소는 쇼윈도우로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커피숍이었다. 여자주인공역의 고소영(극 중반부터는 박소현으로 바뀐다)은 원룸에 자취하면서 원두커피와 함께 ‘논노’라는 패션잡지를 즐기는 대학생이고, 남자주인공역 이병헌은 당구?바둑에 관한 한 도가 텄고 건축학도임에도 인문학적 아포리아들을 줄줄 꿰고 다닌다. 마침내 각 학과에서 모인 출연인물들은 세미나 모임을 결성하는데, 그 이름이 바로 ‘문화비평재단’이다. 이들은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하는 등, 각종 문화담론을 소비한다.7) 물론 중반 이후부터는 연출진의 교체와 시청률 경쟁의 가속화로 주인공들의 사랑과 갈등으로만 초점이 이동하지만, <내일은 사랑>은 신세대 담론의 등장과 맞물려 대학문화의 중요한 전환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대학문화의 이러한 시대적 전환은 대학문화 자신이 점차적으로 잔존하는 문화로 위축되면서 사회적 발언도를 낮추고 있음을 방증한다. 물론 90년대 초반 이들 드라마가 재현한 대학문화는 매우 혼란스럽다. 시대적 거대서사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정말이지, 홍학표는 허구한 날 왜 그렇게 막걸리를 퍼마셨던 걸까)은 대학문화가 예전에 누렸던 부상하는 운동성이 사라졌다는 표현이다. 적어도 이들 캠퍼스 드라마만 보고 있자면, 하위문화로서의 대학문화는 예전에 목표로 삼았고 한때는 거드름까지도 피웠던 정전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대중문화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캠퍼스 드라마의 이러한 재현 행보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템포가 조금씩 빠르다는 점이 눈에 거슬린다. 국부를 늘리기 위해 ‘강간산업(관광산업)’을 활성화하자던 김영삼 정권의 ‘쎄게화’적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는 대중적 지지의 획득을 위해 익히 알려졌다시피 대중문화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대학문화는 일상적으로 점점 소비공간의 중간 점유지로 바뀌어 가고, 신자유주의적 기업형 인간의 탄생을 위한 학부제의 도입으로 대학문화는 학과 단위의 결속력을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카이스트>(1999~2000)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캠퍼스 드라마의 정통적인 계보상 <내일은 사랑>의 적자라 할 수 있는 <카이스트>는 표면상, 이전 드라마들과는 다르게 공대생들이라는 독특한 정서를 내세움으로써 특정 소수자적 정서를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의 뒷부분에 나오는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이스트>가 내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경쟁체제에 대한 극적인 재현 장치들이다. 더구나 방영 시점이 IMF 구제금융 시기 이후라는 점은, 갈수록 유연화되는 노동시장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지를 역설하는 것 같기까지 하다.


(2) 시트콤의 등장과 <논스톱>시리즈

TV의 재현과 대학생 정체성 혹은 대학문화를 떠올릴 때, 그 영역이 시트콤으로까지 나아간다면 암담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시트콤이 가지는 웃음의 정치학은 재현과 정체성의 문제로 넘어오면 심각한 결과를 동반할 수도 있다. 가령 오늘날 대학문화의 객관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누가 묻는다고 치자. 차라리 시트콤을 떠올리라고 말을 하는 게 설명이 편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트콤에서 재현되는 것처럼 현재의 청년?대학생은 대중문화에 대해 보여줬던 교섭적인 태도를 넘어서 아예 결탁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셋여자셋>(1996~1999)은 <카이스트>에 앞서, 그러니까 <내일은 사랑>과 <카이스트>를 잇는 중간 다리가 된다. 여기에는 1990년대 후반 사회경직성이 해소되면서 미팅, 연애, 대리출석, 음주 등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대학생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 우울하지 않다. 70년대의 전통을 따를 때, <우리들의 천국>이 <바보들의 행진>의 계보를 잇고 <내일은 사랑>이 <바보들의 행진>과 <고교 얄개>의 종합판이라고 한다면, <남셋여셋>은 다시 <고교 얄개> 시리즈로 돌아간 셈이 되었다. <카이스트>가 가지는 경쟁 이데올로기를 상기한다면, 묘하게도 <남셋여셋>은 소비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대학생(이 되려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무장해제 시킨 셈이다. 그리고 <카이스트>는 마치 이삭 줍듯이 무방비 상태의 이들을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포섭해버렸다.

이는 <남셋여셋> 이후 대학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 계보를 이은 <논스톱> 시리즈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논스톱> 시리즈는 모두 5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청률 경쟁에서 실패한 1탄(2000)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대학문화 자체를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시리즈가 가지는 초허구적인 모습들이다. 초호화판 기숙사, 위계가 완전히 무너진 교수-학생의 관계, 친구 같은 조교와의 관계, 완전히 부차적으로 밀려 버린 공부 등 대학문화의 현실적인 지형들과 전혀 딴판의 모습들이 재현된다.

물론 이러한 허구들의 긍정적인 모습들이 없지는 않다. 위계의 해체는 대학생문화에도 이어져 사제간의 엄숙적인 관계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도화선이 된다. 강의시간에 교수를 ‘여기요~’하고 부르는 진풍경이 종종 연출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교과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이러한 코드들은 대학의 커리큘럼 일반을 교육적 테일러리즘으로 간파하게 해주는 효과를 동반했다. 강의실 수준에서의 이러한 변화들을 시트콤 효과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반응들은 전혀 조직적이지 못할 뿐더러 분절된 사고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한계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논스톱> 시리즈는 2탄에 해당하는 <뉴논스톱>(2000~2002)에서 현재 <논스톱5>(2004)에 이르기까지 대학을 표방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대학을 재현하지 않은 전혀 이상한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 판타지이다. 뒷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현재의 대학생들은 <뉴논스톱>, <논스톱3>(2002~2003), <논스톱4>(2003~2004), <논스톱5>에 대한 태도가 거의 부정적인 데 반해, <카이스트>에 대해서는 자기 정체성을 그 코드에 맞춰 구성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아직 논의할 때가 이르기는 하지만, 현재의 중고등학생들이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앞으로 어떤 대학생으로 동일시하게 될까.



3. 한 가지 실험: ‘뭐가 생각나니?’


(1) 실험의 효과 - 문화적 관례 의미화하기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애초 나의 생각은 캠퍼스 드라마가 대학생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으므로, 실험은 평상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마련했던 것이다. 먼저 나는 <카이스트>와 <남자셋여자셋> 그리고 <논스톱> 시리즈 등 현재 1, 2, 3학년들이 즐겨봤음직한 드라마들을 제시하고 그 드라마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달라고 하였다. 이 실험의 의도는 명백하다. 대학문화가 위기다. 사회비판의식의 실종은 물론이고 외려 놀고먹는 대학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즘 TV를 보니 <논스톱>이라는 시트콤 시리즈의 대학생들이 완전히 그런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단순화시키자면 이러한 질문들이 이 실험의 주안점이 된다. 응답자들은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앙대학교의 학보사 학생들로 선정했다. 모두 13명이 실험에 응했는데, 그 중 실험의도를 미리 알고 응답했던 2명과 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했던 1명 등 총 3건의 경우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실험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상황이 어떤 자연과학적 법칙을 발견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표현상 실험이라는 용어를 빌렸지만, 이는 사회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초점집단(focused group) 연구에 가깝다. 그리고 ‘실험’의 성격이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어서 이 역시 구체적인 인과설명이 아니라 매체 수용자들에 대한 해석학적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방법론을 차용?제시하고자 하는데, 이는 구성주의적 관점에 기반을 둔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응답자들의 최대한 자연감정적 발로에 의존하고 그들의 자기-표현적 양식 속에서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특정한 문화적 관례(cultural convention)를 의미화하자는 것이다.

현대문화의 지극히 개인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개별적 경험’은 한눈에 보기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흔히들 이 지점에서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곤 한다. 따라서 여기에 개입되는 정체성은 본질주의적으로 명쾌한 답변을 내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심의 초점은 삶을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추적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자기-서사(self-narrative)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개인에 대해 정의내릴 수 없지만, 다만 그 개인이 일상의 서사적 맥락에서 삶을 진술하고 구성하는 ‘이야기’로서 서사를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가능한 창의성과 제약성 사이에 초점을 두고, ‘자기의 이야기들’을 생산하는 매개로서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의 서사적 관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8)


(2) 연예비평가?

그러면 이제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응답지를 회수한 결과, 애초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응답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가설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대학생들이 캠퍼스 드라마를 어떤 식으로든 수용하고 드라마 속의 스타일들을 동경하거나 흉내 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에게는 비평가적 태도가 있었다. 실험과정 자체에 대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실험에는 한 가지 중요한 오류가 있었는데 응답과정을 철저하게 개인 단위로 통제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연상하고 적어내는 데 있어 응답자들끼리 (마치 커닝을 하는 것처럼)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점이다.9) 실험과정을 통제하지 못한 실수로 빚어진 상황이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드라마와 수용자(혹은 수용자 자신이 연상하는 이미지) 사이에 무엇이 가장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는지를 해명해주는 결과를 제시해주었다.

응답한 학생들은 <카이스트>에서 <논스톱>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스타 이름을 빼먹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은 <논스톱>시리즈에서 크게 두드러졌는데, 워낙에 시리즈 자체가 5탄까지 나올 정도로 다양하다보니 학생들은 연상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혼란을 느꼈고 자연히 시리즈들의 구분을 위해 출연했던 스타들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구분점으로 스타를 연상하는 것은 물론 보편적인 드라마 수용태도이기도 하다. 비단 캠퍼스 드라마에 대한 이번 실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흔히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 누군가 옆에서 “왜, 누구누구가 나오는 거 있잖아”라는 한마디에 비로소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즉 이야기의 구분점이자 출발점이 바로 연예인이며, 우리의 의식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스타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셈이다.

드라마 담론의 공유는 스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문화텍스트이건 그 텍스트를 논의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텍스트의 플롯과 서사구조에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캐릭터에 관한 것이다. TV드라마의 경우 이것은 실재하는 인간과 그가 연기하는 인물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수용자는 기본적으로 브라운관의 저 인물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있다. 드라마의 허구와 배우의 연기라는 ‘그럴 듯함’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애초의 가설은 암묵적으로 드라마의 판타지에 오늘날의 대학생이 지배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응답자들은 그것이 허구이고 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다음 <표 1>처럼 정리되는 그들의 ‘연예비평가적 태도’가 이러한 점을 증명해준다.

<표 5)> 캠퍼스 시트콤에 대한 응답자들의 연상

스타 이미지

유행어

플롯

드라마 시스템

<남셋여셋>

아~ 나 이것 참,

아이고~ 아이고,

모여봐, 모여봐

실제와는 다른 대학생활의 모습들

시트콤 원조

<논스톱>

놀고 먹자판의 캠퍼스 풍경3),

재미 없음

남셋여셋의 짝퉁?,

처음에 신선도 떨어짐,

남셋여셋 카피했으나 실패한 이미지

<뉴논스톱>

골다빈

한턱 쏴~,

구리구리

장나라, 양동근의 말도 안되는 사랑,

학교생활을 다루지 않고 미팅, 사랑에 초점,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하는 대학문화,

발랄,

실제와 다른 대학생활,

시험공부 안한다

유명연예인 배출,

나오는 사람들 거의 다 떴음,

가수들의 연기,

유행어,

이제까지 나온 논스톱 시리즈 중 가장 성공

<논스톱3>

이진, 다나 이미지 완전 망가짐

<논스톱4>

현빈 짜증남,

연기 어설픔

뭐, 난 그렇다~,

짜증나 짜증나,

청년실업이 50만에 임박하는...

술마시는 문화가 대학의 낭만이라는 인식 심어줌

신인들 이미지 만들기,

새로울 것이 없음

<논스톱5>

웃자고 하는 얘긴데

우선 응답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문화적 관례’를 의미화한다는 차원에서, 나는 이들의 이러한 응답성향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싶다. 이렇듯 일관된 비평가적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선 실험자인 나와 실험참여자인 이들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지적할 수 있다. 거의 면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실험과정에서 이들은 객체적인 경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자신들이 관찰대상이 되는 상황에 대한 거부감 내지는 반발감이 이러한 응답태도를 낳은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연령주의상 연장자인 나, 그리고 조직 내에서 상급자인 나10)와의 위계적인 관계에서 이들은 일단 아래에 속한 집단이다. 게다가 실험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립된 뻣뻣한 위계관계는 응답자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이러한 질서 자체를 간파(penentration)하게끔 한다. 따라서 이들의 ‘연예비평가적 태도’는 실험을 주관하는 ‘나’처럼 혹은 ‘나’ 이상으로 자신들도 캠퍼스 드라마에 대해 비평을 할 수 있다는 호소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응답지 전반에 걸쳐 지나치다 싶을 정도 과잉된 비평 담론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관심사는 드라마에 대한 비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들을 읽어내는 수용태도에도 뻗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연예비평가적 태도’ 자체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들의 ‘비평 영역’은 스타 이미지, 유행어, 플롯, 드라마 시스템 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평의 경향이다. 응답자들은 줄기차게 자신들이 비평가임을 호소하지만, 그 비평은 문화정치학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한다. 문화정치학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규제, 재현의 사회적/역사적 생산, 정치경제적 과정으로서의 생산과 소비,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형을 보고자 함이다. 권력-기호체계-생산-자아의 역동적인 과정으로서 자아 테크놀로지를 설파하는 푸코11)나 규제-생산-소비-정체성-재현의 문화적 순환을 강조하는 개방대학의 작업들이 중요한 참고목록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이들의 비평가적 태도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모습이다. 바로 연예뉴스 기획의 전략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공중파를 통해 매주 방영되는 연예뉴스 프로그램, 그리고 인터넷과 신문 가판을 떠도는 연예소식의 기표들은 이들의 비평가적 태도에 거의 응집되어 있다. 스타 이미지를 평가하고 유행어를 목록화하는 담론 형식화 기법들은 이들이 캠퍼스 드라마의 플롯에 대해 허구이며 연기라고 지적하는 만큼이나 허구이며 연기에 불과할 뿐더러, 드라마 시스템에 대해 비평하는 맥락 역시 문화산업의 전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들이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정체성 생산 전략에 의해 포획되었다고 결론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이들과의 토론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카이스트>, 경쟁과 학습의 이데올로기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연예비평가적 태도가 <남셋여셋>이나 <논스톱>시리즈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통 캠퍼스 드라마라 할 수 있는 <카이스트>에 관해서는 이런 식의 응답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과연 왜 그런 것일까? <카이스트>에 대해서 응답자들은 (출연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 외에) 다음 <표 2>에 정리한 것처럼 연예뉴스적인 심적 태도를 거의 노출하지 않았다.

<표 6)> 드라마 <카이스트>에 대한 응답자들의 연상

캐릭터

라이벌, 학장(님), 남성스러운 여학생, 짧은 머리의 여학생, 천재, 공부벌레들, 선머슴, 떡진 머리, 다정스런 교수, 똑똑한 학생, 노력하지만 능력 없었던 학생, 엘리트, 범생

소품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훔쳐가지 않는 자전거, 항상 팽개쳐지는 자전거, 자전거, 로봇축구, 나무4), 안경, 컴퓨터, 자동차, 책, 막걸리, 검은 뿔테, 라면

상황/장면

로봇축구, 자동차 조립, 로봇경진대회, 보물찾기, 과학, 각종 로봇 이용한 게임, 잔디밭, 밤새기, 정신없이 공부하면서 햄버거 하나를 나눠먹는 장면, 유학 시험, 공부, 포항공대, 학교 내 카페에서 공부하고 얘기하고 밥 먹고 하는 장면, 추자연이 자동차 고치는? 만지는?

배경

나무, 동아리, 기숙사, 연구실, 카페, 대학교, 잔디밭, 실험실, 공대, 연구소, 대전

감성 상태

라이벌, 학구적, 천재, 경쟁, 의리, 캠퍼스 안에서의 치열한 승부싸움, 카이스트라는 대학의 이미지, 공부벌레들, 학생들이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 남성스러운 이미지, 우정, 배신, 정신없이 공부하면서 햄버거 하나를 나눠먹는 장면

패션

짧은 머리의 여학생, 캐주얼 차림, 체크 면남방, 면바지, 떡진 머리

비평

청춘스타들의 등용문

대사

<카이스트>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 연상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물론 응답결과를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듯이 응답자들은 무의식 어딘가에 남았을 대사를 거의 연상해내지 못했다. 앞의 <남셋여셋>이나 <논스톱>류의 시트콤들에서 유행어들을 기억했던 것을 상기하자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드라마의 재현 전략에서 언어가 수용자들에게 각인되는 효과에 관한 것인데, 대사 자체는 시트콤의 유행어처럼 이미지화되지 않는 한 기억이나 인상 따위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비평적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에 정리된 것 중 ‘청춘스타들의 등용문’이라는 응답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응답자 자신이 응답 전반에 걸쳐 연예비평적 태도를 과잉적으로 노출한 경우여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카이스트>에 대한 비(非)비평적 태도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일까?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이러한 태도의 차이가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언급해보자. 비평이라는 것은 대상과 거리를 두었을 때 가능한 행위라 할 수 있다. 물론 대상 텍스트와의 친밀감이나 몰입도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비평의 진정성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텍스트로부터 빠져나와 해당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가 가지는 관계 그리고 복합 텍스트로서 사회적/역사적 맥락과 닿아 있는 지점들을 밝히는 것이 선행조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카이스트>에 대한 응답자들의 기억은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이들은 시트콤과는 다르게 <카이스트>를 비평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로써 이들은 <카이스트>에 대해서만큼은 비평적 무방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응답 경향에 대한 해석이 이중적이라 했던 이유는 이러한 무방비 상태가 캠퍼스 시트콤에 대한 비평적 태도에 비해 덜 진화적이라거나 덜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미 전술했듯이 연예비평적 태도가 철저하게 연예산업적 논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면, 비평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비평적 태도는 차라리 건강하게 비춰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카이스트>에 대한 이미지 리스트를 보게 되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대학생활에 대한 판타지가 보인다. ‘정신없이 공부하면서 햄버거를 나눠먹는 장면’, ‘학교 내에서 공부하고 얘기하고 밥 먹는 장면’ 등은 고등학교의 소외된 학습경험과는 전혀 상반된 환영을 주조해내기에 충분하다. ‘캐주얼 차림’은 적어도 지겨운 교복에 비하자면 반대 위치에 있는 상상적 대체물이며, ‘자전거’는 집-학교-독서실의 쳇바퀴로부터 탈출하게 해줄 수 있는 환유적 기표이다. 물론 이러한 판타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곧잘 깨져버리기 일쑤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와 부모 그리고 학벌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학습노동이 소외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이들은 취업도구화되고 실용교육화된 대학 커리큘럼에 따라 탈숙련적인 학습에 복무해야만 한다. 또한 패션과 같은 갖가지 문화적 의미화실천 역시 취업전선이 다가올수록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예비자산이자 문화적 자본으로 전회하기 때문에 이 판타지는 곧바로 미끄러지는 기표에 불과하게 된다.12)

두 번째로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목도할 수 있다. <표>에서 보는 것처럼 응답자들은 <카이스트>에서 연상되는 정서로 대다수가 경쟁심리를 들었다. 라이벌, 경쟁, 캠퍼스 안에서의 치열한 승부싸움, 남성스러운 이미지, 배신 등의 정서들은 경쟁의 표상이다. 간혹 의리나 우정과 같은 정반대와 같은 정서들이 언급되지만, 이는 경쟁체제 편입에 대한 심리적 보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의리’는 ‘똑똑한 학생’과 ‘노력하지만 능력 없었던 학생’ 사이에 공정한(사실은 불공정한) 경쟁을 전제로 동원되는 수사이며, 약속이 깨지기 위해 있다는 시쳇말처럼 ‘우정’은 ‘배신’과 불안하게 공존할 때야말로 더 돋보이는 말이다. 게다가 로봇축구 경진대회, 자동차 조립, 보물찾기 등과 같은 각종 게임들은 이공계 특유의 객관성 신화를 공고하게 하는 한편, 드라마 방영시기 고등학생이었을 이들 응답자들로 하여금 경쟁체제가 일상화된 대학생활을 미리부터 가늠하게끔 했다. 이렇게 본다면 공부벌레, 범생, 책, 검은 뿔테 같이 판타지의 구성을 통해 소외된 학습경험을 유발하는 환유적 연상들과 이러한 경쟁 이데올로기가 맞닥뜨리는 순간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결국 이 두 정서의 상승효과로 인해 오늘날 우리의 대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 판타지가 깨지고 설사 학습노동의 소외마저 깨닫더라도, 간접경험이긴 하지만 이미 자연화되어 있는 경쟁체제를 통해 결국 공장-사회의 물화된 생산물로서 자신을 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세 번째로 여느 캠퍼스 드라마와는 다른 <카이스트> 고유의 두드러진 성적 이미지를 지적할 수 있다. 남성스러운 여학생, 짧은 머리의 여학생, 선머슴 등의 이미지는 여성에 대한 특정한 시선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이 여성은 ‘체크 면남방’에 ‘면바지’를 입고 ‘자동차를 고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소년적 재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 가능하다. 우선 여성의 무성화이다. 여성에 대한 소년적 이미지의 투영은 그 대상으로 하여금 뭉크의 <사춘기>처럼 아직 숙녀로서 사회화되지 않고 육체적으로도 완전하게 성숙되지 않은 상태를 갖추게 한다. 이는 채림이나 추자연의 캐릭터가 외화하고 있는 것처럼 차라리 미소년의 이미지에 가깝다. 이 중성적인 소년-되기는 여느 캠퍼스 드라마의 소년적 여성들보다도 가장 극단화되어 있다. <우리들의 천국>의 남주희나 <내일은 사랑>의 김정란 역시 소년적 특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들의 강도는 채림이나 추자연에 비해서는 훨씬 떨어진다. “욕망은 남성의 신체에서 떨어져나와 여성 쪽―아주 정확히 말하면 여성되기의 방향―으로 간다”는 가타리의 진술처럼,13) 이는 욕망의 진화단계를 함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적 재현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여성의 남성화라고 할 수도 있다. 바로 앞부분에서 드라마가 내장하고 있는 경쟁 이데올로기를 조명하면서 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 극적인 장치로 드라마 전반에 걸친 ‘남성스러운 이미지’를 들었는데, 여성의 남성화란 바로 여자 대학생들도 경쟁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나는 이 드라마의 작가가 송지나라는 이름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성차별적인 문제에 있어 여느 작가들보다도 가치중립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재현의 하위체계가 수용되었을 때 어떤 의도치 않은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경험적 준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4)

이제 캠퍼스 시트콤들과 <카이스트>의 상반된 연상 태도에 대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만약 앞서 해석했던 것처럼 실험에 대한 응답이 전략적으로 비평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라면, 아니 더 정확하게 실험자인 ‘나’를 의식했던 것이라면, 왜 <카이스트>에 대한 답변에서는 비평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은 이들이 각 텍스트에 대해서 몰입하는 차원이 아예 다르다는 사실이다. <논스톱> 시리즈에 대해서 응답자들은 분명 스타 이미지에 몰입했다. 그 결과 <논스톱> 시리즈가 퍼뜨렸던 유행어처럼 괜한 ‘남 걱정’ 하듯이, 스타 이미지가 부상했는지 훼손됐는지 그리고 텍스트가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를 추정하는 데에 집중했다. 반면 <카이스트>의 경우 이들이 몰입했던 것은 드라마 자체였다. 그랬기 때문에 실험의 애초 의도대로 드라마에서 연상되는 캐릭터, 소품, 장면, 심리, 배경, 패션 등의 이미지들이 효과적으로 열거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둘에 대한 상반된 태도의 원인으로 드라마 형식을 들어야 하는가. 물론 잠정적으로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대답은 유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형식도 문제일 수 있겠지만, 문화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들의 차별적 기호 역시 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자들은 분명 <카이스트>와 시트콤들 사이에 위계를 두고 있다. 상대적으로 비평이 전무한 <카이스트>에 비해서 시트콤에 대한 비판적 태도, 예컨대 ‘실제와는 다른 대학생활’, ‘놀고 먹자판의 캠퍼스 풍경’, ‘말도 안되는 사랑’, ‘새로울 것이 없음’ 등의 진술들은 차별과 폄훼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정 취향의 선언 혹은 미학적인 가치판단이 텍스트 몰입에 대한 차별성을 야기하고 마침내는 비평적 태도의 여하를 가른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4) <논스톱1>의 판타지-부재, 그리고 <남셋여셋>의 교환가치 문제

앞서 얘기했던 특성들만으로는 캠퍼스 드라마와 대학생문화의 자기-서사를 완성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 여기에는 왜 <논스톱1>에 대한 기억이 부재한지, 그리고 반복되는 <논스톱>의 각 시리즈들을 왜 헷갈려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도 부가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논스톱1>은 인기가 별로 없었다. 이 시트콤은 대학을 무대로 했던 게 아니라 어느 이벤트 회사와 의상 디자인 회사가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을 다뤘던 청장년 시트콤이었다. 50회로 조기 종영됐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시청률이 저조했을 뿐더러 2000년 방영 당시 중고등학생이었을 응답자들에게도 그다지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응답지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기재하던 당시에도 <논스톱1>에서 <논스톱5>에 이르는 공란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는데, 각 시리즈들이 정확하게 어떤 내용과 설정이었는지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출연배우에 대한 정보가 교환되면서 개별 시트콤과 이미지들이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논스톱1>이 이들에게 부재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시리즈들은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청률 문제만으로는 해석이 부족할 수 있다. 시트콤의 재미 문제도 관건이겠지만, 무엇보다 <논스톱1>과 다른 시리즈들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그 무대가 대학이냐 아니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뉴논스톱>은 문화대학 신문방송학과, <논스톱3>는 문화대학 사회체육학과, <논스톱4>는 대학 밴드부, <논스톱5>는 대학 영화동아리를 각각 배경으로 삼고 있다. 평일 저녁 7시대에 방영되는 시트콤에 있어 응답자들에게 일반회사 이야기는 애초부터 관심 대상에서 제외됐던 셈이다. 따라서 이 <논스톱1>의 기억 부재라는 특징은 응답자들이 포함된 매체수용자들에 의해 <논스톱> 시리즈가 특정한 방식으로 선별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들 수용자들은 어떤 집단인가. 우선은 허무맹랑한 배경과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판타지를 구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혹은 판타지 자체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연예인이나 줄거리를 비웃고 씹으면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연행(performance)을 즐겨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응답지에서 <논스톱1>이 부재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논스톱1>의 기억과 이미지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판타지 자체가 부재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제 응답지들 중에서 눈여겨 볼 사항으로 <남자셋여자셋>만 남았다. 분석대상이 된 10명 중 4명이 흥미롭게도 <남셋여셋>의 이미지로 ‘중앙대’를 들었다. 그것은 나도 기억이 난다. 학부시절 <남셋여셋>을 중앙대 캠퍼스에서 촬영하던 걸 몇 번이나 구경한 적이 있었고, 장면 전환마다 등장하는 학교장소의 스틸커트 ― 부감쇼트로 펼쳐진 청룡연못, 로우앵글로 위용을 자아낸 도서관과 자연대 건물 ― 를 보면서 실제로는 볼품없어 뵈던 우리 학교가 이렇게 멋지게 나올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한 적이 있었다. 어쨌든 재밌는 것은 이들 응답자들이 중앙대 학생이라는 점이며, <남셋여셋>을 통해 중앙대를 이미지화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그렇게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중학교 때 <무동이네 집>(1991~1992)을 보면서 청룡연못을 배경으로 펼쳐진 최민수와 김혜선의 로맨스에 매료됐었고, 중앙대 대운동장에서 미식축구 동아리 활동을 하던 최민수와 박형준의 우정을 통해 ‘싸나이’로서의 정감을 키웠던 바가 있다. 그리고 중앙대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천국>의 서강대, <내일은 사랑>의 서울시립대, <종합병원>(1994)의 아주대 같이 캠퍼스-장소를 등장시킨 드라마들은 어떻게든 대학체제에 편입되어야 살아남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교환가치를 제공해준다. 로맨스, 자유로운 학습 분위기, 잔디밭의 한가로운 공강 시간, 시트콤적인 수다, 가끔 볼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열정 등은 중앙대, 서강대, 서울시립대 같은 장소-기표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며 교환가치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게 된다.

<남셋여셋>과 중앙대는 이러한 상징적 과정을 통해서 매개된다. 갈수록 학력자본이 위용을 떨치는 요즘에 매스컴에서 발산하는 상징효과는 그것이 실제로 담지하는 차별-기호보다 더 큰 값어치로의 추산과정을 자연스럽게 동반한다. 문화산업의 논리에서 <모래시계>의 정동진이라든가, <겨울연가>의 남이섬이라는 식의 이러한 장소-마케팅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를 둘러싸고 행위자들이 펼치는 모습들이다. 교환가치화로 상품화된 대학에 입시생들이 호감 내지는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미디어가 남기는 이런 떡고물로 장사를 해보겠다는 심산까지 있을 정도다. 최근 중앙대에서 있었던 총장선거의 경우 몇몇 교수들이 신설된 학교병원의 수익을 꾀하기 위해 TV드라마를 반드시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참으로 어떤 정감으로 표현할지 애매한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4. 결론 ― 자기-서사의 완성


애초 나에게는 대학생들의 시트콤 수용태도에 대해 가설이라는 이름의 한 가지 선입견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응답지를 놓고 해석에 골몰하기 전까지 나는 시트콤의 쓸모없는 수다들과 지나치게 화려한 패션 그리고 차라리 초현실에 가까운 무대장치에 예비대학생들이 과도한 판타지에 빠져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 혹은 편견은 철저하게 깨졌다. 분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트콤류에 대해 응답자들은 비평적 태도를 통해 거리감을 보였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역동적인 캠퍼스 문화를 표방했으리라고 기대했던 <카이스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몰입도를 보였고, 이는 경쟁과 학습노동에 대한 긍정적 수용으로 연결되었다.

현실에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대학문화가 비판적인 목소리를 상실한 채 하위문화적인 지향을 져버리고 대중문화적 성격으로 전회한 것은 엄연한 사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보수적이고 물질 편향적인 가치관을 대학생 개개인들이 내장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카이스트>의 진지함보다는 시트콤의 가벼움이 오늘날 대학문화의 표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실험을 통해서 나는 이들이 고등학교 시절 시트콤을 보면서 가볍게 비웃어 넘겼던 과정을 목격했다. 그렇다. 관건은 오히려 <카이스트>의 진지함에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따라서 애초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현재의 대학생 지형은 <남셋여셋>으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카이스트>적 세계관으로 대학문화를 주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실험상황이라는 성격상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지금 오늘날 대학생의 정체성과 대학문화가 대중문화산업에 지배당하고 있다거나, 그 한 측면으로 연예비평가적이고 캠퍼스 드라마 판타지를 갖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경쟁 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채 학습 노동의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는 결론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그들 정체성의 특정한 측면에 불과하며, 이들이 빚어내는 대학문화의 구성적 원리 중 일부에 다름 아니다. 실험에 대한 응답을 통해 응답자들은 지배와 구조에 복속당한 스스로를 반영했다기보다는 사실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실험과정에 의도치 않게 개입했던 연예비평가적 태도의 과잉된 과시 같은 것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이를 통해 시트콤과 <카이스트> 간에 차별적인 취향과 가치판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쟁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 역시 이들이 무의식 중에 자신을 둘러싼 초자아를 폭로했다기보다는, 이들 스스로가 경쟁 논리에 매력을 느끼고 애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들의 자기 표현과 자기 서사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제한된 선택지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능동성이나 역동성에 한계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자신을 서사화하거나 분석적으로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 글은 여기서 끝나지만 자기 구성의 경험, 이것을 위해 나는 이들과 한 번 더 대면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서사를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2차적이고 최종적인 이 실험과 대화를 통해,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규제, 생산, 소비가 응축되어 있는 재현과 정체성의 구성적 정치학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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