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신용사회, 신용체제1)



김성윤



신용카드와 관련하여 두 개의 표적과 하나의 화살이 있다.2) 첫 번째 표적은 소비자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져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다는 이른바 악덕채무론이고, 두 번째 표적은 사태가 신용불량 400만에 이르도록 주도/방치해 온 국가-자본에 대한 책임론이다. 내가 겨냥하고 있는 이 두 논의는 어느 특정한 경제주체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공히 ‘도덕적 해이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의 신용카드문제를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돌린다는 것은 전혀 분석적이지 못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태도이다. 오히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담론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재하는 리얼리티가 전혀 논외가 되어버리는 효과이다.

따라서 두 표적을 겨냥하는 화살이 필요하다. 이 ‘하나의 화살’은 신용카드문제를 대할 때 필요한 오래됐지만 새로운 문제설정이다. 나는 신용체제 즉, 가히 신용의 정치라 할 만한 측면을 조명하고자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신용사회’라는 담론이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자본주의를 지탱시켜온 문화적/이데올로기적 과정임을 얘기하고, 그 과정은 단지 일종의 종교적 과정에 불과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현재의 신용카드문제는 가계-기업-정부 누구 하나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닐 뿐더러, 신용카드가 그동안 한국자본주의에서 어떠한 매개적 기능을 해왔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밑그림 속에서 신용체제가 자본조달의 융통성을 꾀하는 산업자본에게뿐 아니라, 개인가계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3)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실재하는 신용체제의 정체와 그에 따른 공포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신용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문화적으로 풀어낸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얘기이다. 단적으로 신용문제는 문화적인 요인보다는 정치경제적인 함수관계에 의해 설명될 때 더욱 명확해진다.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고집스럽게 신용문제를 문화적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여기에 관해 그동안 진행되어 온 논의들이 - 심지어는 비판적인 입장의 논의들이라고 하더라도 - 경제적인 분석과 해법에만 치중해온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소비주체형성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신용카드광고의 금지를 위해 시민사회가 발 벗고 나선 사례가 있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신용카드문제를 주로 거론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나 참여연대 혹은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과중채무자들의모임이 구축한 시민모임) 등 어느 한 곳에서도 이런 식의 문화정치적인 언급을 시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여, 나는 구조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신용카드문제가 오늘날 노정하고 있는 문화적/이데올로기적 과정을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1. 두 개의 표적 - 소비자와 국가-자본의 도덕적 해이


연일 매스컴이 보고하고 있듯이, 카드빚에 쫓겨 사채에 손을 대고 피할 수 없는 보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팔려나가는 사람도 있다. 공포에 질린 처자식과 함께 동반자살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울화에 치밀고 심지어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한 채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까지 있다. 지금 이 땅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다. 희망의 원리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공포만을 발견할 뿐이다. 이제 곧 신용불량 4백만의 시대가 다가온다고 한다. 확실히 공포가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소비자들의 사치와 과소비나 카드사의 횡포를 문제 삼을 것이다. 현재 신용카드로 인한 신용불량자의 숫자는 전체 360만의 63% 수준인 228만명이다. 그러나 소비자나 기업 어느 누구 하나만의 잘못으로 경제활동인구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과중채무에 시달리고 있고, 또 그중에서 60여%가 카드빚으로 허덕이고 있다는 설명은 어딘지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 사태가 여기까지 오게 된 책임은 누구 하나의 도덕적 잘못만이 아니다. 겹겹이 쌓여온 지층과 특정한 경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용불량이라는 말이 종종 양심불량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용되듯이, 대개는 신용불량자들을 과소비자 혹은 악덕채무자라는 이유로 꾸짖고는 한다. 악덕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듯, 신용불량자는 도덕적 해이의 장본인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낙인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대다수의 과중채무자들은 채무를 고의로 상환하지 않는다는 억울한 누명까지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카드빚을 갚겠다는 도덕적 책무감에 급한 대로 ‘돌려막기’를 택한 것뿐이었는데, 그래서 이내 그 빚이 눈덩이만큼 부풀려져 신용불량에 빠진 것인데, 정작 이 ‘신용사회’는 악덕채무자라는 꼬리표만 붙여준 셈이다.

그렇기에 정작 카드이용자들은 카드사를 욕한다. 길거리에서 돈다발을 흔들며 - 심지어는 대학캠퍼스에서조차 - 카드 회원으로 가입하라며 꼬드겨 놓고서는 이제 와서 막대한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으니 신용불량의 멍에를 쓰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채무자를 심리적 공황에까지 빠지게 만드는 온갖 빚독촉은 카드이용자의 뒤통수를 갈기는 것과 진배없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LG카드사의 부도위기에서 주지하듯이, 순진한 소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국내 금융산업 전반에까지 해악을 끼쳐온 카드사간의 과당경쟁은 누누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책의 실패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부정책은 카드활성화 정책 등을 통해 내수시장을 유지하고 생산력을 지속?확대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4분의 1에 달하는 경제활동인구가 자신들의 가처분소득으로는 소비수준을 감당하지 못한 채 신용카드에 손을 대게 되고 이윽고는 다중?과중채무에 빠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의 신용사회 대란의 원인은, 이른바 ‘고통분담’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개인가계의 출혈을 유도하고, 카드산업에 대한 관리감독 없이 거의 무정부 상태로 방치해온 정부의 도덕적 해이인 셈이다.

이러한 근거들은 분명 중요한 조건들이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면, 가공할 만한 정부-기업-가계의 트라이앵글 모럴 헤저드에 물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가계는 가계대로 채무를 감당 못할 상황에 빠진 일대의 도덕적 위기 시대인 셈이다.4)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신용카드산업이 활성화된 90년대 말이라는 시기와 외환위기로 경제적 고통이 서민들에게 ‘전담’되던 시기에 이르러 가계채무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는 점이다.5) 물론 그 주범 중의 하나가 바로 신용카드이다. 이는 달리 말해 정부-기업 수준에서 유지되던 과중채무체제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상당부분을 ‘분담’하기 위해 가계 수준의 개인들마저 자신들의 채무체제로 편입시켰다는 이야기이다. (개인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업을 살리기 위해 진행된 막대한 차원의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인수합병의 물결들은 많은 수의 사람들을 실업상태로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직장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마저 소득수준의 하락을 경험하게 했다. 정작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부와 기업은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효소비가 필요한 역설적인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용카드는 이러한 난국을 돌파할 거의 유일한 창구로 기능했던 것이다. 정부와 기업의 입장에서는 높은 실업상태에도 불구하고 소비수준이 유지되길 바랐고, 그것은 개인들조차 마찬가지였다.


2. 화살 찾기 - 신용카드와 신용체제의 함의


애초에 신용카드가 도입되고 보편화되던 시기에 사람들은 이 신종 플라스틱 머니의 출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단순히 지불결제의 새로운 수단으로서 화폐의 새로운 형태로서만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서더라도 △도난?분실로 인한 제3인의 부정사용 △가맹점 수수료 전가, 연체료 감액 요구 △연대보증인, 카드발급조건부 물품 판매 △우송 중 망실로 인한 피해 등 지극히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단점만을 다루는 것6)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신용체제를 일단 주어진 일종의 선험적인 조건으로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용카드문제의 기능적인 장단점만을 가려내고 애꿎은 가해자들을 가려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용카드가 가지는 진정한 함의는 오히려 신용카드 예찬론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현금이 필요 없는 ‘제3의 통화’, 신용공여로 대금을 분할 지급할 수 있는 ‘외상표’와 같이 우리가 익히 들어왔을 수사어들이야말로 신용카드의 진면목으로 인도해준다. 신용카드는 현재의 소비와 지불 사이에 시간이 개입된 소비자신용제도 중 하나로서, 현대 소비문화의 상징물이다.7) 소비와 지불 사이의 시간으로 인해 소비자는 일종의 분절을 경험한다. 원래 지급했어야 할 현금은 이미 인식의 차원을 넘어버렸고, 카드결제기의 작동소음(소위 카드 긁는다는 소리), 그리고 매출전표와 카드사용내역서에 찍힌 디지털 활자만이 소비자의 뇌에 입력될 뿐이다. 그 순간 신용은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암약하는 거대한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것은 마치 화폐가 등장하면서 상품의 물신성과 교환가치로의 몰입을 매개했던 것과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신용카드가 소비자들로 하여금 경험케 하는 분절은 이중적인 셈이다. 화폐의 물신화에 연이은 신용의 물신화이다. 노동력을 양도(alienation)함으로써 소외(alienation)를 경험했던 노동자는 경제활동인구라는 추상 속에서 소비자가 되며, 그 소비-노동자는 자신이 노동력을 판 대가로 얻은 임금을 물신화된 상품(생활수단도 포함하여)을 구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게 된다. 노동력과 마찬가지로 화폐는 그렇게 양도되고 소외된다. 그런데 이제는 신용이, 신용카드가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신용이 물신화된 지표가 바로 ‘신용한도’라는 개념이다.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한도액이 얼마이냐에 따라 카드 사용자들의 명암이 엇갈린다. 실제로 카드연체율이 급증하기 시작했던 2002년 9월 카드금융사들이 거의 일제히 현금서비스 한도를 축소하자 대량의 신용불량자가 발생한 사실이 있었다.8) 신용카드에 완전히 발이 묶여버린, 다시 말해 자기자신을 신용카드에 완전히 팔아버린 잠재적 신용불량자들로서는 자본이 책정하고 국가가 관리?감독하는 신용한도라는 지수에 따라 희비가 교차할 수밖에 없다. 또한 카드사용자들끼리의 일상에서는 자신의 서비스한도액과 타인의 것을 비교하면서 일종의 ‘신용자본’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는 촌극까지 빚어지기도 한다.

이번에는 자본의 입장에서 신용카드와 신용체제의 함의를 살펴보자. 사실 대기업과 대금융의 신용카드산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고리대금업은 애초부터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현금서비스나 연체이자 등을 통해서 카드사가 얻을 수 있는 이자이윤은 보통 11%에서 28%에까지 달한다. 이자율의 차가 이렇게 큰 것은 카드사가 판단하는 개인들의 신용도와 사용실적에 따라 이자율이 다르게 책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카드를 쓸 때 이용자가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달리 말해 계층적으로 상위에 속할수록 이자율이 낮다. 반면에 돈이 적은 사람일수록 이자를 많이 떼인다. 대번에 카드사가 계층구조의 불평등에 끼치는 악영향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카드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카드연체위험이 높은 사람일수록, 다시 말해 저소득노동자층일수록 기업에게 이자이윤을 많이 안겨준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대출 원금이나 이자의 연체가 발생해서 연체이자를 갖다 붙일 수 있는 명분(종종 채무자 윤리가 내세워진다)이라도 생긴다면, 이자이윤은 극대화되기에 이른다.9) 카드사는 여기에 제도금융이라는 공식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이용자들을 신용불량이라는 낙인으로 위협할 수도 있는 유리한 입장인 셈이다.

빚을 갚으려고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부재한 상태에서 저소득노동자로서의 한정된 가처분소득을 가지고는 질병의 발생, 친인척의 경제적 어려움, 소규모 창업 등 여러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카드사의 입장에선 군침을 흘릴 만한 고객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불안정한 채무변제조건을 악용해 고리를 취하는 전략이야말로 신용카드산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만들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카드채무자의 불안정성은 부메랑이 되어 카드사의 불안정성으로 전이된다. LG카드사의 몰락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드사 역시 자금을 차입조달함으로써 충당하게 되는데, (연체율 등을 비롯한 지표로 확인되는) 채무자의 불안정성이 외려 카드사의 신용도를 떨어뜨리고 차입금의 금리를 뛰어오르게 만드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히 신용의 역관계(trade-off)라 할 만하다. 이미 많은 논의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듯이 신용체제는 산업자본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요건 중의 하나이다. 물신화된 신용에 자신의 생계를 걸고 있는 저소득의 노동-소비자들이 있다면, 자본의 입장에서도 신용을 물신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소비자들의 신용을 밑천 삼아 하는 신용카드사라면, 자기 신용뿐만 아니라 남의 신용까지도 떠안는다는 점에서 신용과 이자의 역관계(소비자 신용이 낮을수록 이자가 높지만 기업의 신용 역시 동반하락하고, 소비자 신용이 높을수록 기업의 신용 역시 동반상승하지만 이자는 떨어지게 된다)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어쨌건 이는 신용과 신용불량을 이용해 유지하는 신용체제-소비체제-채무체제의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전통적인 논의에서 신용체제 하의 자본은 당연하게도 지불결제를 기약 없이 연기하려는 절망적인 요구에 빠져들게 된다.10) 그런데 신용체제에 대한 문제는 이제 맑스나 룩셈부르크가 비판했던 산업자본주의 수준이 아니라, 신용카드라는 매트릭스를 통해 연결된 개인소비자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일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순간부터 자본가뿐만 아니라 일반소비자들에게까지도 자본의 자기운동은 개개인의 의지를 뛰어넘어 하나의 강박이 된다.


3. 하나의 화살 - 채무체제-신용체제의 종교적 과정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제를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보고는 한다. 그러나 “경제 과정은 이른바 하부구조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종말이 무기한적으로 연기되는 종교적 과정이다.”11) 나는 신용카드문제로 대변되는 지금의 거대한 채무체제를 산업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해 도입된 소비체제와 신용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확장시키고자 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여기서 또 하나의 내기물을 걸겠다. 난 신용카드문제의 원인을 차라리 카드광고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아니, IMF 구제금융 시절 벤처이데올로기나 허리띠 졸라매지 않기 캠페인이라고 말하겠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3저호황의 말미부터 시작된) 내수시장 확대논리에 의해 유포된 소비 중심의 문화담론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한 때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부루마불 게임도 문제 삼고, 이제 선진국이라며 마이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던 7, 80년대의 수출 신화를 문제 삼겠다. 문화론의 문제설정에서 본다면 신용불량을 둘러싼 문제들은 이제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정치/경제/이데올로기의 모든 층위가 동원된 거대한 체제적 문제이다. 신용불량의 문제는 신용카드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체제와 이 소비체제의 종말을 무기한으로 연기시키려는 신용체제의 문제이다.

저축이 개인소비자의 미덕이던 시대가 있었다. 저축왕을 선발해서 국가 차원의 표창을 하고 일반 시민들이 닮아야 할 표상으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에서 저축이 미덕이라는 말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미덕의 형상이 저축에서 소비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실학자 박제가의 소비관이 부활했는가 하면, TV브라운관을 통해 터져 나오는 스펙터클과 상업광고는 한국자본주의사회의 시민주체를 저축-노동자에서 소비-노동자로 재형성시키는 기제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생활수단 이외의 것을 소비해왔다. 대량생산-대량소비체제와 맞물려 문화산업을 비롯한 각종 교환가치들이 사용가치를 완전히 압도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항간에 요즘 사람들 중에 빚이 없는 사람들이 없다고들 한다. 빚 권하는 사회라고도 한다. 모두가 더 나은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며 빚을 진다. 이제 저축을 통해서는 현실의 나와 환영 속의 나 사이의 차이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 간극을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채워나간다. 베블렌의 과시적 유한, 벤야민의 환영, 드보르의 스펙터클, 부르디외의 일루지오 등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의 정체이자 그 동력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들 소비자에게는 그러한 규모를 감당할 만한 소득이 없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이태백, 명예퇴직, 청년실업, 비정규직, 불안정노동 등의 유행어와 화제어들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지표가 된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지출규모를 줄이기가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지출규모는 늘어만 간다. 자본주의 꽃 상업광고는 매순간 더 나은 계층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을 소비를 통해 대리충족 하게끔 해준다. 과잉소비는 이 순간에 발생한다. 소비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소비자는 임금노동을 통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적 공공성이 전무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더욱 임금노동에 대한 의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데 일자리가 없다. 소비를 하러 진열장을 어슬렁거리는 순간, 자신의 지갑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대량소비체제의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노동력의 탈상품화(de-commoditification)가 진행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문제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노동자 개인이 직접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12) 이 점이 바로 신용카드 사용자들을 무턱대고 사치, 낭비, 과소비, 도덕적 해이 같은 말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저귀값, 분유값부터 해서 사교육비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부담해야 할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천정부지로 솟구치기만 한다. 사회보험은 거의 전무한 채 사보험이 시장을 전제(despotism)하고 있고, 공교육은 붕괴된 채 강남 중심의 사교육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의료체계 역시 선진국에 비하자면 터무니없는 복지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도 한국의 복지체제가 김대중 정권 이래로 노동연계형(welfare-to-work) 사회복지체계를 지향하는 생산적 복지정책을 추진함으로써13), 일자리가 없는 시대에 일하지 않으면 복지를 누리기 힘든 역설에 부닥치게 되었다. 가령, 가족 구성원 중 어느 하나가 암과 같은 질병에 걸렸다고 하자. 한 달 수입 2백만원으로 이 치료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빚을 안 질래야 안 질 수 없는 사회가 바로 이 땅인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종교적 과정’은 이 간극을 신용카드라는 플라스틱 머니로 슬그머니 채워버렸다. 대량소비체제를 유지시켜나가고,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대리시키는 매개로 신용카드가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신용카드가 매력적인 것은 자신의 임금 수준 이상으로 소비를 유지시키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적인 소비이든, 사회적인 소비이든 상관없이 지불결제가 연기됨으로써 어느 정도 노동력이 탈상품화된 것 같은 순간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 순간에는 신용을 둘러싼 어떠한 형태의 소비이든지간에 일종의 게임이 되었다. 신용카드의 주된 사용이 2~30대가 소비형, 4~60대가 생계형14)이라고는 하지만, 지불연기 수단으로서 신용의 사용은 상징적 차원에서 수행된다는 점에서 게임의 수행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게임에서는 소득이 전혀 없는 대학생과 미성년에게도 카드를 발급하고, 신용카드 가입 혜택으로 각종 부가서비스를 실시하고, 교통카드 등과도 통합연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게임규칙이 작동한다. 게다가 한국의 신용사회 외부를 포섭해 들어가는 첨병 카드결제기, 그리고 플라스틱 머니를 대체하겠다는 야심찬 신용수단 마이너스 통장과 모바일결제(mobile-payment) 등 역시 이 신용게임을 더욱 확대재생산하는 일종의 장치들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 게임은 상품화의 지연이었을 뿐이지, 중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결제의 시점 다가오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상품화해야만 한다. 이미 소비수준은 배를 넘었으므로 그 때의 상품화는 두 곱절, 세 곱절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재생산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노동력과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는 카드대금의 결제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고 만다.


4. 결론을 대신하며 - 착취의 메커니즘


문제는 이런 와중에도 일반인들이 채무를 그 실체에 비하여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은 예로, 이제 외상 거래는 거의 사라졌다. 신용을 통해 교환한 물건에 사람들은 어떤 신령스러운 힘(mana, 마나)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구멍가게 같은 소매상들과의 접촉빈도가 줄어들면서 마나로 유지되던 신용거래는 사라지고, 온라인상의 디지털 데이터로 존재하는 신용거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재의 신용체제는 외부의 신비로운 모든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마나로 유지되는 윤리와 상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작한다. 달리 말해 신용체제 자체가 종교적 과정임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용체제는 일반 시민들에게 신용(credit)을 허락하지만 신뢰(trust)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채무의 압박감과 가공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대적으로 빚 관계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신용카드에 손을 대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거래는 지불결제의 지연이자 단기채무에 다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용카드와 신용을 둘러싼 메커니즘은 결국 자본의 착취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생산라인에서의 착취에 지친 우리의 소비-노동자들은 신용카드 덕분에 순간적으로 ‘마술적으로나마’ 노동의 탈상품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마술은 소비자들을 마치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게임의 세계로 인도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에서 착취의 일반적 형태 중 하나인 이자의 착취가 일어난다. 계층별?소득별로 신용한도를 책정하고 거기에 따라 고리와 폭리를 취하는 탈상식적인 과정이 진행된다(‘신용사회’라는 담론은 우리 사회가 신용한도를 매겨야 하는 ‘불신사회’임을 반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특정한 지층으로 형성해온 신용의 게임에서 벗어나오기가 힘들다. ‘돌려막기’는 소비자들이 이 게임의 룰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돌아오는 채무상환기일에 맞춰 다시금 자기의 노동력을 재상품화해야 한다(이 역시 착취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자기 임금이 더 이상 돌려막기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에 다다르는 순간, 신용불량의 빨간불이 켜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일부에서는 신용카드문제로 우리보다 먼저 홍역을 치룬 바 있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배우자는 주장도 거론하곤 한다. 일본의 경우, 시민사회의 요구가 관철되면서 카드 사용으로 인한 신용불량자의 약 90%가 곧바로 파산-면책 선고를 받은 바 있다. 신불자를 대거에 정리하면서 경제회생을 노린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무리한 채권추심을 견제하는 한편, 소비자들에게 금융교육을 권장하는 방편을 모색해왔다. 그러나 신용체제 전반을 문제 삼는 입장으로서는 왜 하필 신용카드문제가 일본과 미국에서 불거졌는지가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에 주목한다면, 이 두 국가가 고도산업국가라는 점과 비교적 낮은 수준의 복지수준을 가진 국가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두 나라의 해결방안이 신용체제라는 이자 착취의 메커니즘 자체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신용카드 산업이 활성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은행권의 마이너스 통장을 통해 신용체제가 유지되고 있고, 미국도 금융교육을 통해 착취의 신용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능주의적 프로그램만을 가동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나는 신용카드사가 망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사적 이윤만을 겨냥하는 우리나라의 기업풍토에서는 자본가 수준에서 해결될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 몫은 국가와 개인소비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가 역시 발전국가체제를 유지해 온 이상 스스로 조정국면을 창출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가능한 한 가지는 소비자들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비자들이 신용카드를 쓰되 일시불 결제만 하는 것이다. 카드사끼리의 과당경쟁으로 연회비가 거의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절대로 할부 결제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일종의 사보타지가 되는 셈이고, 결국 이자(돈놀음 생산라인에서의 이윤)가 생기지 않는(혹은 줄어드는) 카드사는 자기 자산과 부채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운동으로 보이콧 운동15)을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LG카드사가 먼저 자기 부채규모를 견디지 못하고 기권을 하고 말았다).

어쨌든 현재의 국면으로서는, 선언적으로 말할 수밖에는 없지만, 노동의 탈상품화, 화폐의 탈물신화, 신용의 탈물신화 등과 같은 특정한 계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이 순수한 자유노동이던 시절, 화폐가 순수한 매개에 불과하던 시절, 신용(credit)이 외상거래 등에 이용되던 신뢰(trust)이던 시절로부터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상상력을 얻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할부결제 거부와 같이 소비와 신용의 어떤 특정한 국면에 개입할 것인지, 사보타지와 같이 생산과 노동의 어떤 특정한 국면에 개입할 것인지, 그리고 노동의 탈상품화와 같이 계급투쟁의 어떤 특정한 국면에 개입할 것인지와 같은 문화적이고도 정치적인 전략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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