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 Pecheux, "The Mechanism of Ideological (Mis)recognition", Slavoj ?i?ek, Mapping Ideology, Verso, 1994
김성윤/2006년 5월 22일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전화의 이데올로기적 조건
◎ 논의의 경계 대상들
- 우선 담론에 대해 유물론적 기초에 입각할 것. 지식과 정치실천의 생산에 관한 실천의 논점을 명확히 할 것
- (a) ‘최종심에서’ 경제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심지어는 경제적 생산 자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 (b) ‘재생산/전화’는 생산양식의 모순적 특질을 명시하는 것. 따라서 생산관계들의 재생산과 그 전화에 대해 차이점을 상정하는 것은 실수이다. 계급투쟁은 ISAs를 ‘겪어낸다’(pass through). (141)
◎ ISAs의 모순적 조건들
- 1. ‘ISAs는 이데올로기 일반의 실현이 아니다.’ … 이데올로기는 시대정신(Zeitgeist)의 일반 형식으로 그 자신을 재생산하진 않는다.
- 2.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갈등 없는 실현도 아닐뿐더러...’ … 각각의 계급에 고유한 이데올로기를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Ideology) 개념의 복수화인 것. 물론 ‘보다 강력한’ 계급의 승리로 귀결된다.
- 3.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신의 은총으로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 ISAs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게 아니다. 지배실현의 영역이자 수단일 뿐이다.
-4. ‘(ISAs의) 설치는 그 자체로 모든 게 성취되진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매우 쓰라리고 지속적인 현존하는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계이다.’ … 이것은 ISAs가 생산관계 전화의 영역과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동시적으로 그리고 모순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 이유로 ‘전화/재생산’이란 표현.(142) 이러한 모순적 조건은 사회구성체에 포함된 일련의 복합적인 ISAs에 의해 구성된다. 일련의 복합성이란, 요소의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주어진 정세 속에서 요소들 간의 모순-불균등성-종속의 관계를 동반하는 것이다.
◎ 계급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실천적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계급실천이다. 이데올로기 구성체는 ‘국지적’ 특성을 가지고 계급위치와 연결된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연후에 상이한 국지적 이데올로기 ‘대상들’에 적용되는 계급위치란 없다는 것이다.
-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생산관계의 재생산과 전화 사이의 모순적인 접속이 이데올로기적 층위에서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적어도 국지적인 이데올로기 ‘대상들’이 별개가 아니라 영역들에 들어맞는 분할과 그 영역들 간의 불균등성-종속의 관계를 취하는 한에선 그러하다.
◎ 이데올로기로 이미 구조화된 계급투쟁
-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지배는 생산관계의 전화를 재생산이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는 사실로 특징 지워진다(예. 노동조합과 정치정당을 포함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143) 따라서 생산관계의 전화에 대한 투쟁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은 불균등성-종속의 새로운 관계를 부과하는 투쟁 속에 놓인다. 재생산/전화의 모순이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을 지속화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하나의 구조이다.
- 그와 동시에 이 모순의 형식은 두 힘들 간의 대립으로 사유될 수는 없다. 적대적인 두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생래적으로 체계적이지 못하다. 투쟁 이전에 명백한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발리바르가 지적한대로 계급관계는 국가장치의 작동 속에서 감춰진다는 것이다. (144)
◎ 재생산과 이데올로기의 호명
- 사실상 생산관계의 재생산(변형도 마찬가지)은 간파(penetrate)되어야 할 미스터리를 간직한 객관적 과정이다.
-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라는 테제가 이 미스터리를 간파한다. 이는 생산관계의 재생산/전화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대한 문제설정을 절합된 담론 과정의 유물론적 문제설정으로 직접 이어준다.
- 1. 이데올로기에 의하지 않은 그리고 이데올로기 안에 있지 않은 실천은 없다. 2. 주체에 의하지 않은 그리고 주체들을 향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는 없다. (145)
이데올로기, 호명, 뮌히하우젠 효과
◎ 이데올로기 구성체, 지배적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일반의 구분
- ISAs로는 실현되지 않는(따라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이데올로기 구성체와 일치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 일반은 또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이 아니다.
- ‘이데올로기들은 각각의 역사를 가진다.’ ‘<이데올로기> 일반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146)
◎ 이데올로기와 무의식
- 슬로건들만으로는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개념적 절합의 수행으로 인해 벌어진 결핍을 채울 수 없다.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으로 비교되어 불리는 두 구조의 공통적 지형은 이것들이 ‘주체’라는 자명한 진실의 그물망을 생산함으로써 그 작동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는 사실이다.
- 여기서 ‘주체’는 ‘주체를 정념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의 자발적 현존에 대한 자명함은 알튀세르의 또 다른 자명함(이데올로기적 효과)과 비견된다. (147)
◎ 의미와 주체의 연결, 그리고 호명 테제
- 주체의 자명함은 의미의 자명함으로 이어진다. 의미의 구성에 대한 질문은 주체의 구성에 대한 질문과 연결된다.
- 알튀세르가 시사했듯이, “인지하긴엔 충분히 ‘구체적’이지만, 사유가능성과 사유에 대해선 다분히 ‘추상적’인 ‘호명’은 하나의 ‘예시’이다.” (종교와 경찰을 연상시키는) 이런 그림은 몇 가지 이점을 준다.
① ‘호명’의 이중적 의미 → ‘법 안에서의 주체’(RSA), ‘이데올로기적 주체’(ISAs)
② 의식의 극장 → 주체가 발화할 수 있기 전에, 주체는 특정하게 그리그 누군가에게 발화된다.
③ ‘개인’/‘주체’ 공식의 불일치 → 주체가 실존으로 불리는 역설
- 호명 그 자체는 모든 개인이 ‘언제나-이미 주체’라는 결과와 함께하는 소급효과이다. (148)
◎ 주체와 정체성
- 주체의 자명함은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하며 본인에 일치하는(identical with himself) 것으로서 그러하다. “거기 누구지?”라는 질문에 “나야!”라는 부조리하고 자연스러운 답변.
- 정체성(identity)의 ‘자명함’은 그것이 주체의 동일시(identification)-호명의 결과라는 사실을 감춘다.
◎ 불일치와 징후
- 전(前)구조화의 이 효과는 개인이 주체로서 호명되는 불일치의 담론적 양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 농담, 말장난 등은 사실상 이 불일치에 생래적인 모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그 징후를 구성한다.
◎ 기표과정으로서의 주체와 뮌히하우젠 효과
- 징후의 역할은 호명-동일시에서 기표과정의 존재를 상정하게 한다. 여기에는 기호(누군가에 무언가를 명시함)나 기표(다른 기표에 대해 주체를 표상하는 것)가 소환되는데, 두 번째 가설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기표의 그물망에 의해 구성된 비-주체 내부에 있는 (표상의) 과정으로서 주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149)
- 그는 ‘자기 원인’(cause of himself)으로서 결과한다는 스피노자의 의미. ‘자기 원인’인 주체 안에서 그가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필연적으로 망각한 결과 중 하나는 일련의 형이상학적 판타지들이다(예. 두 손으로 다른 그림 그리기, 공중부양의 판타지). ‘뮌히하우젠 효과.’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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