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연대에서 했던 특강 원고입니다.

스포츠 영웅 신화 : 김일에서 박지성까지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2007.2.7



1. 스포츠 영웅의 문화적 의미


드라마/영화에 스타가 있는 것처럼, 스포츠에도 스타가 있다. 때로 이들은 영웅으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스타와 영웅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대중은 둘 모두를 사랑하지만, 영웅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 예컨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영웅이 있다. 그는 어떠했는가. 신으로부터 불을 뺏어 인류에게 전해주었으며 지구를 받들어 영안을 얻게 해주었다. 그는 초인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유물론적 이해를 따르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맞아 경외감을 갖고 종교를 창안했다. 그리고 신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의 형상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 형상을 섬겼다. 인간 소외는 인간 존재가 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로부터 기꺼이 지배를 받는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초인될 수 있음을 망각한 채, 신의 이미지들을 복제해낸다.

인류가 신에게 도달하자, 또 다른 종교가 생겨났다. 하나는 물신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파시즘이었다. ‘물신’(物神)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 인간은 상품을 섬기며 화폐를 신봉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회가 고도로 조직화되면서부터 재래의 종교로부터 달아난 인류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으니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대중들은 스스로 초인임을 선언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도자를 앞세워 신의 형상을 입혔다.

중세 기독교 사회의 순례자와 성직자들이 대중들을 위안했던 것처럼, 파시즘의 독재자는 사회경제적 곤궁을 종교적인 힘으로써 망각하게 해주었다. 신과 영웅은 이렇듯 상보적이다. 인간이 신에게 언제나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범할 수 없기에, 영웅을 내세워 신에게 불평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인간에 대한 신의 무심함을 영웅의 대활약을 통해 잊어버리기도 한다.

군사적 파시즘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현대사회에서 그 영웅의 자리에는 누가 있는가. 물신의 무심함에 불만,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존재에 대한 의심은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가. 우리는 대중문화(mass culture)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중요한 축으로 스포츠 영웅들을 빼먹을 수도 없다. 스타와 영웅은 다르다. 우리에게 있어 영웅은 종교적인 힘을 행사한다. 스포츠 영웅을 분석해낸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 전체를 까발리는 일일 수도 있다.



2. 스포츠 보기와 영웅 만들기


오늘날 우리는 스포츠를 직접 하기보다는 보면서 열광한다. 스포츠를 하지 않고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심지어 신종 스포츠라고 하는 e-스포츠에서조차도 우리는 보면서 환호하고 탄식한다. 현대는 가상의 세계이다. 가상이 아닌 것은 없다. 실물이 아니라 언제나 허상이 우위에 있다. 이 세상은 기호의 세계이며 진짜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영화와 마찬가지로 스포츠 역시 하나의 텍스트이다. 어느 축구해설가의 말처럼, 스포츠는 단지 ‘각본 없는 드라마’일 뿐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 각본이 있는 스포츠도 있다. 가까운 예로 이탈리아 축구 Serie A의 승부조작 사태가 그러하고, 프로레슬링은 아예 그 자신이 엔터테인먼트임을 표방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포츠에 각본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아니하며, 그것이 제공하는 극적이면서도 비(非)-극적인(그렇기에 더욱 극적인) 향락을 만끽한다.

대중이 텍스트에 몰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동일시(identification)이다. 관객으로서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부동의 자세를 취한 채,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자신의 시점을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시킨다. 이러한 1차적 동일시는 2차적 동일시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카메라가 주요 인물을 포착한다. “박찬호 선수, 오늘 공 끝이 묵직하죠?” 혹은 “박찬호 선수, 축이 되는 왼쪽 다리가 자꾸 주저앉는 경향이 있어요.”라는 해설자의 멘트가 거의 무방비 상태인 ‘나’의 뇌리에 입력된다. 애증이 발생한다. 프레임 속의 인물에 대한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을 그와 밀착하거나 구분하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한다. (이것은 우리가 객석에 있을 때조차 마찬가지이다. 객석에는 두 가지 부류의 ‘나’가 있다. 하나는 응원하며 밀착하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평론하며 구분하는 ‘나’이다.)

이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스포츠 스타가 탄생한다. (추앙 받는다는 점에서 다를 뿐인) 영웅 역시 비슷한 메커니즘으로써 만들어진다. 영웅은 초인적인 과업을 달성해낸다. 그 일들이란 사실 ‘나’ 자신이 하고 싶고 해야만 할 일들이다. 나아가서는 ‘나’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 면에서 영웅은 스타 이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신드롬이다. 1차적 동일시를 통해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된 ‘나’는 2차적 동일시를 통해 스스로 욕망하는 ‘나’가 된다. 그리고 욕망하는 ‘나’가 욕망하지만 감히 욕망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초인이며 영웅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고 있고 입으로 말하고 있는 영웅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상징적으로 실체화된 것이다.



3. 스포츠 영웅 신화에 대한 질문들


스포츠 스타-덤을 왜 영웅 신화로 확대해서 보는가. 그것은 우리 시대 스포츠 스타의 탄생과 그 열광이 종교적인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종교는 가상 세계에 열광하는 것이며, 그로써 현실 세계의 가치체계에 대해 판단하는 시뮬레이션이다. 스타덤과 영웅 신화는 구분되어야 한다. 스타가 구체적인 ‘나’를 호명한다면, 영웅은 집합적인 ‘나’를 불러낸다. 따라서 영웅 신화는 언제나 광대하며 서사적이다. 스타가 욕망하는 ‘나’와 관계 맺는다면, 영웅은 욕망할 수 없는 ‘나’와 위계를 맺는다. 따라서 영웅 신화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이다. 요컨대, 스포츠 영웅 신화를 분석한다는 것은, 스포츠라는 장(場)과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의 사회문화가 조직화되는 경로를 탐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의 스포츠 영웅 신화들을 살피기에 앞서, 우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첫째, 스포츠는 왜 영웅 신화와 결합하는가. 협소하게는 그냥 운동에 불과한 스포츠가 왜 그리고 어떻게 사회문화적인 이야기 거리들을 낳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스타나 영웅이란 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인가.

둘째, 스포츠 스타와 영웅은 다른 점이 있는가. 구체적인 스포츠 스타들을 비교하면서 앞서 말한 차이점들이 부각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스포츠 스타들은 어떻게 해서 영웅이 될 수 있었는가.

셋째, 왜 사람들은 영웅을 찾고 또 열망하는가. 달리 말하자면,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동일시는 왜 일어나는가. 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 영웅이 되지 못하고, 다른 영웅들을 보기만 하는 것일까.

넷째, 이 신화는 누가 만드는가. 어떤 이야기이든 화자나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스포츠 영웅 신화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산물인가. 어떤 미디어인가.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를 발굴하고, 또 어떻게 각색하는가. 또, 이 신화에 열광하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실제로 영웅 신화에 열광하고 있는가.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포츠 영웅과 그 신화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섯째, 영웅 신화는 어떤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는가. 스타, 영웅, 신을 막론하고 그들과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서 그 맥락들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4. 우리 시대의 스포츠 영웅들


연 대

이 름

수식어

핸디캡

주요 업적

1960년대

김 일

박치기 왕

일본 불법체류

WWA 제23대 세계헤비급챔피언

장 훈

안타제조기

자이니치

최다안타 기록, 명예의 전당 헌액

1970년대

홍수환

4전5기의 신화

원정경기, 4번 다운

세계챔피언

양정모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

뮌헨올림픽 참가불허

정정당당한 첫 금, 엘리트 체육의 도화선

조오련

아시아의 물개

대한해협 횡단

차범근

한국의 가마모토

군 복무 의무

5분 동안 3골, 분데스리가 진출

1980년대

차범근

차붐, 갈색폭격기

UEFA컵 2회 우승, 외국인 최다 골

선동렬

무등산폭격기, 국보급 투수

해외진출 불허

0점대 방어율

임춘애

헝그리 정신

가난, 라면이 주식

아시안 게임 육상 3관왕

장정구

짱구, 한국의 매

길거리 인생

세계챔피언 15차 방어(당시 세계최다기록)

박철순

불사조

최동원의 그늘, 잦은 부상

최다 연승, 최고령 승리 기록

이충희

슛도사

작은 키

농구대잔치 4,412점

허 재

농구천재(이후 농구대통령)

연고대 기득권

중앙대, 기아 신화

1990년대

선동렬

나고야의 태양

일본 야구 부적응

일본 대표하는 마무리

박찬호

코리안 특급

동양인 최다승

박세리

요술공주, 골프계의 신데렐라

명예의 전당급 활약

2000년대

홍명보

아시아의 베켄바워 [리베로]

J리그팀 주장, 월드컵 4강

히딩크

희동구, 4강의 마법사

한국 축구/미디어 풍토

월드컵 4강

워 드

슈퍼볼 영웅

흑인 혼혈

NFL 슈퍼볼 MVP

박지성

산소탱크, 맨유의 신형엔진

평발, 작은 키

프리미어리그(맨유) 한국인 첫 진출


위의 표에서 일별한 것을 토대로 앞서 제기했던 질문들에 답해보기로 하겠다.


(1) 스포츠는 왜 영웅 신화와 결합하는가: 전술했던 것처럼, 스포츠는 극적인 요소가 있다. 각본이 없는 ‘드라마’이다. 청중은 극을 보면서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재확인할 때 안도한다. 물론 다소 새로운 것이 있어야 열광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너무 새로우면 낯설어지고 불편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이 환호하는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의 재확인이란 선을 넘지 못한다. 예컨대,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라는 상투 어구를 상기해보라.

또한 극에는 극을 이끌어 갈 인물이 필요하다. 극은 현실을 다루어야 하고, 현실이 인간 삶의 집합인 이상, 그 드라마 역시 인물이 주도한다. 이 인물 역시 낯익어야 한다. 낯익음은 그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음으로, 혹은 나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고조된다. 오늘날 스포츠가 사회문화적으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기본적인 틀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스포츠의 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다.


(2) 스포츠 스타와 영웅은 다른 점이 있는가: 이 둘은 스포츠라는 텍스트에 나타나는 표상적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른 점은 스타가 개인과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영웅은 집단과 위계적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스타는 팬들 하나하나와 별개의 관계 속에서 대화한다. 그러나 영웅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집합체로서 불러내며 메시지를 일방향적으로 발신한다. 스타는 팬미팅을 하지만, 영웅은 모셔진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적으로 가지는 파급력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스타덤은 개인 주체들의 욕망의 향연이지만, 영웅 신화는 그러한 욕망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해가는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스포츠 영웅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파급력이라 할 수 있다.


(3) 왜 사람들은 영웅을 찾고 또 열망하는가: 영웅 신화에는 공포와 희망의 변증법이 내재해 있다. 신화는 가상의 공포를 통해 현실의 공포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영웅 신화를 통해 불법체류(김일), 이방인(장훈, 워드), 낯선 환경(홍수환), 권위의 억압(양정모, 차범근, 선동렬, 허재), 하류인생(장정구), 신체적 불편함(이충희, 박철순, 박지성), 가난(임춘애) 등에 대한 공포심은 언제나-이미 극복 가능한 것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 신화들에는 희망의 정서들이 충만해 있다. 예컨대 IMF 구제금융 시기에 등장한 박찬호와 박세리가 온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해결은 언제나 비논리적이다. 그 자신감의 근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도 할 수 있다’에서 ‘나’와 영웅 간의 차이, ‘나’의 상황과 영웅의 상황 사이의 차이는 왜 언제나 계산되지 않는 것일까. 따라서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희망사고(wishful thinking)의 개념처럼, 신화의 수신자들은 자신이 편한 대로 세상을 이해한다. 이것을 영웅 신화의 주술성이라 부를 수 있다.


(4) 이 신화는 누가 만드는가. 또 이 신화에 열광하는 자는 누구인가: 어떤 텍스트이든지 거기에는 제작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웅 신화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자본인가, 권력인가. 물론 이들이 이 신화로 인해 큰 혜택을 얻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그 신화의 태도로 살아가는 이상, 기존의 질서는 온전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견지에서 봐도, 정부나 기업이 나서서 신화를 유포하는 일은 볼 수 없다. 오늘날 영웅 서사는 미디어가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미디어는 자본과 권력에 유착해 있다는 말인가. 달리 말해, 광고의 제약과 정권의 규제 때문에 미디어가 봉사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신화는 뉴스와 입소문에 의해서 생산된다. 독립적인 행위자로서 이들 생산자는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이들은 독립적으로 행위한다. 단지 그들의 이해관계와 심리상태가 자본과 권력의 것과 합치될 뿐이다.

그렇다면 스포츠 영웅 신화는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앞서 이 신화가 이데올로기적이라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미디어에 의해 생산되는가. 우리는 좀 더 유보적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생래 상 대중들의 정서 상태로부터 생산물의 원천을 추출하기 때문이다. 즉,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거리들을 모아 신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신화의 또 다른 생산자로서 우리는 그 자리에 대중을 올려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욕망이 지배계급의 이해에 합치될 뿐이다.

신화에 열광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열광의 축제이다. 대중들이 열광하며, 미디어도 열광한다. 그리고 정말로 열광하는 부류는 자본과 권력이기도 하다. 이들은 대중의 욕망에서 기인한 신화를 토대로, 이러한 장사를 하며 정치를 한다. 영웅 신화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별개로 존재하는 주체들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담론구성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두고 담론구조의 행위 주체들로서 이해할 수 있다.


(5) 영웅 신화는 어떤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는가: 신화는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스포츠 영웅들이 직면한 핸디캡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 특히 가난과 굶주림(장정구, 임춘애)의 문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이 시점을 즈음하여 절대적 빈곤의 상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권위주의(차범근, 선동렬, 허재) 역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세계화 추세에 걸맞게 사회적 폐쇄성이 완화되는 징표이다. 많은 스타들이 해외로 진출했고(박찬호, 선동렬, 홍명보, 박세리, 박지성), 외국인(히딩크, 워드)이 국내적인 차원의 스포츠 영웅으로 대접받기까지 한다.

이러한 경향은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이들 영웅 신화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서가 아니다. 이들 스포츠 영웅들에게 닥친 사회적 시련의 문제가 해소되는 과정 자체가 주술적이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의 현실, 권위적 억압의 현실, 국가주의적 봉합의 현실 등은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즉, 영웅의 천재성)으로 해결해야 할 성질의 것이 된다.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인종적 분열의 문제(워드), 미디어의 폭력성의 문제(히딩크), 세계화의 문제(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등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지했듯이, 영웅 신화는 대중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영웅 신화의 담론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개인의 과제로 치환시킨다. 그러면서 사회적 문제들은 봉합되고, 사회 적응에 대한 성패의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도 돌아간다. 이것은 영웅 신화의 사회적 봉합성이다.



5. 마침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웅시되는 스포츠 스타의 이야기들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첫째, 자기 분야에서 특정한 업적을 이뤄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둘째, 이러한 업적이 내셔널리즘의 문제와 연결된다. 다른 나라의 선수들을 제압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맹활약하는 모습들은 민족주의를 장착하고 있는 대중들에 있어 범접할 수 없는 욕망의 지점을 제시해준다. 셋째, 그러한 결과들은 저마다 처해 있는 시련과 역경을 극복한 산물이다. 가난/차별/신체적 핸디캡/사회적 제약 등을 딛고 일어선 성공신화는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영웅 신화 분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들은 대중들에게 어떠한 사회문화적 파급효과를 가져다주는가. 운동선수들이라면 자신이 속해 있는 장에서 이들을 하나의 역할 모델로 삼을 수 있다. 일반대중들 역시 저마다의 장에서 이 신화를 재전유한다. 현실 속의 ‘나’가 맞닥뜨리는 세상의 시련 앞에서 ‘나’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미디어가 제시하는 저 영웅들이 ‘나’ 자신과는 별개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영웅들의 태도를 내면화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외면적으로 순종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실의 역경을 뚫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계급구조와 담론구조가 고도로 조직화된 현실에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조금도 없다. 비정규직인 나는 정규직이 될 수 있는가. 장애가 있는 나는 도로를 활보할 수 있는가. 이방인인 나는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가. 키가 작은 나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나이 많은 나는 나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 세상의 오해를 사고 있는 나는 내 진가를 보여 줄 수 있는가. 가난한 나는 쪼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스포츠 영웅 신화들은 ‘yes’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신화들을 듣는 사이에 삶에 대한 ‘나’의 태도 역시 긍정적이고 희망에 가득 찬 것으로 바뀐다. 그러나 종교가 대중의 아편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 희망은 공허하기만 하다.

Posted by 김성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