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밑의 글이 웹진에 실리기 전의 완성본입니다.

빈곤과 문화, 관계 맺어주기

―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겠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


김성윤/ 2006.10.26



이 글의 제목이 ‘빈곤과 문화’이긴 하지만, 이 ‘와/과’라는 말은 참으로 정치적인 말이다. 자기 글에 제목을 달아본 사람들이라면 공감이 갈 것이다.

‘빈곤과 문화’라는 말은 참으로 많은 뜻을 가진다. 빈곤의 문화라는 것인지, 빈곤한 문화라는 것인지, 혹은 문화의 빈곤이라는 것인지, 문화적 빈곤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빈곤을 위한 문화라는 것인지, 문화를 위한 문화라는 것인지 등등. 그런 까닭에, 이 글은 참으로 난감한 제목을 달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워진다. 그래도 누군가가 반드시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고 목이라도 조른다면, 빈곤과 문화를 다루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향이 있기 때문에 사정이 좀 곤란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① 빈민들에게는 그들 고유의 빈곤문화가 있어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② 빈곤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깨뜨려야 할 보수주의적인 담론에 불과하다.

③ 빈민들은 다른 계층에 비해 불평등하게 문화경험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빈민들의 문화적 권리를 신장함으로써 불평등을 해소하고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④ 빈민들이 체험하는 빈곤의 현실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차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차별의 맥락을 짚어내고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난점이 따르는 까닭은 사실 이 두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히 어떤 판정이나 합의가 내려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다른 지면에 글을 쓸 때 주로 ④번의 논지를 활용하는 편인데, 스스로 경험했던 문제인 데다가 현재 전공이 사회학인 이유가 큰 것 같다. 어쨌거나 많은 경우엔 위의 네 가지 논지 중 하나가 쓰이거나 아니면 몇 가지가 혼융되곤 한다.

그러면 위의 네 가지 경우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빈곤의 문제와 문화의 문제를 다룰 때 마주치게 되는 갈림길의 의미를 밝혀보도록 해보자.



빈곤문화는 없(어야 한)다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척 맨지오니의 유명한 곡 <Feel So Good>은 사실 영화 <산체스네 아이들Children of Sanchez>의 삽입곡이다(잠시 삼천포 - 나도 OST만 들어봤을 뿐, 영화는 구하기가 힘들어서 아직은 본 적이 없다. 영화 보여주실 분이 있으면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이 영화는 원래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라는 인류학자가 멕시코 빈민가족을 참여관찰한 동명의 연구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루이스는 빈곤의 문제를 학술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 큰 획을 그었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빈민들에게는 고유의 ‘빈곤문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실제로 그럼직하다. 몇몇 연구결과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몸이 조금 아플 때 병원에 바로 직행하는 비율은 계층별로 어떤 계층이 제일 저조할까. 당연히 빈민층이다. 빈민들은 당장에 들어갈 병원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아닌 이상 참는다. 이러한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혀를 찰 노릇이다. 그러다 병을 키우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치료비가 들 텐데 말이다.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문화가 아닌가.

그 외에도 차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숱한 예들이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빈곤문화’ 때문에 몇 가지 역설적인 효과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루이스 자신은 ‘객관적으로’ 산체스네를 연구한 것이었지만, 후대의 학자들과 행정가들은 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달리 말해, 빈민들이 그렇게 곤궁하게 사는 것은 자기 자신들이 자초한 결과라는 식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그들은 현대의 빈민들에게 ‘불가촉 천민’ 혹은 ‘하층계급’under-class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빈곤과 문화의 문제를 접할 때, 항상 이 불편한 문제에 답을 내려야만 한다(이 바닥에선 그래야만 보수주의자나 정책결정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겠는가). 빈곤문화는 있는가. 아니면 있는데 없다고 얘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은 없는 것인가.



그럼에도 빈곤문화는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빈곤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매우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학과 사회복지학 그리고 활동가들을 통틀어서, 빈곤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빈곤문화’를 ‘공식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보수주의에 이용되기만 할 뿐 아닌가.

그러나 빈곤문화는 엄연히 존재한다. 빈곤문화가 아닌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과 어머니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며, 굳이 빈민이 아니더라도 제3자가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빈민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빈민층 고유의 어떤 근성 같은 것은 분명 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빈곤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일단 형식상 이율배반적이다. 그리고 빈곤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빈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내기 어렵다. 혹 그와 비슷한 어떤 감을 잡더라도, 그것을 언어화하거나 의미화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빈곤문화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학술활동이나 실천을 했던 결과 그동안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경도되었다. 하나는 경제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온정주의이다. 물론 이 두 경향의 성과는 지대했다. 경제운동을 통해 소위 판자촌이라 불렀던 무허가정착지의 주거환경은 임대아파트 등으로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온정적 태도를 통해 빈민들의 소외 현상은 지속적으로 위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불행한 일이며 불만족스러운 일이다. 여기에서는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비문화적이다. 게다가 경제주의/온정주의에는 곤궁한 빈민들에게 더 많은 물질적/정서적 혜택을 부과한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것은 논리상 빈민들이 결핍의 존재라고 상정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상 반문화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솔직한 심정으로 빈곤문화를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면 오히려 좀 더 획기적인 전환점을 구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위생 관념이 없다. 보건 관념이 없다. 학습 관념이 없다. 성취 관념이 없다. 자활 관념이 없다. (사적)소유 관념이 없다. 합리적 사고 관념이 없다. … 이 모든 것들은 평균적으로 그리고 빈도 상 사실이다. 이러한 서술들은 그 자체로 배제와 억압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현대자본주의의 경계 외부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불가촉 천민’이라고 한다. 정말로 듣기 싫고 거북한 이름표지만, 우리는 되로 받고 말로 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빈곤의 현실이야말로 자본의 영토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불가촉한’ 차원이지 않은가.



빈곤한 ‘문화적 권리’의 문제


지금까지 나는 ‘빈곤문화’와 관해 이야기했는데, 잠시 요약하자면 이렇다. 빈곤문화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보수주의에 악용된다는 위험 때문에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나 빈곤문화를 부정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문화에 대한 언급 또한 불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를 거론해야만 하는 현실에서는 빈곤문화에 관해 재론할 필요성이 있다. 혹여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이더라도, 문화가 가지고 있는 생성적인 힘을 발견한 이상, 새로운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져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들어 빈민운동에 문화운동을 결합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빈민들의 문화적 경험이 다른 계층에 비해 불평등하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이다. 여기에 ‘문화복지’ 혹은 ‘문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도시빈민지역의 주민들은 먹고 사는 1차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 등 소위 ‘2차적인 부문’들을 요구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 부분은 매우 핵심적인 체크사항이다. 교육과 문화라는 것은 ‘빈곤의 대물림’ 현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최근 소외계층에 대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2차적인 부문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도시빈민들이 이제 먹고 살 만해졌다는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빚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마당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불편함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문화에 대한 요구이다.

그렇다면 이제 빈민지역운동의 문화프로그램에 대해 찬찬히 살펴봐야 하는데,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대개의 프로그램들에서 ‘문화적 권리’에 대한 개념이 아직 모호하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그동안 빈민운동에서 문화 개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문화운동에서 문화 개념이 모호하다는 문제로 넘어온 셈이다. 현재까지의 논의와 활동들은 대개의 경우, 어떻게 하면 빈민들의 여가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문화예술의 생산경험을 통해) 자치와 참여의 기회를 늘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집중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권리의 향상이라는 기조는 권능부여empowerment;임파워먼트라는 틀 속에서 추구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을 매우 소극적인 운동방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임파워먼트라는 프로그램은 사회구조적으로 제한적인 개인의 역량을 최대화하자는 취지인데, 자칫 여기에 만족하다가는 사회전반에 고착화되어 있는 불평등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지 않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찌 보면 이 문제는 문화운동 진영 내에 빈곤의 문제설정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문화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따라서 ‘문화적 권리’라는 가치를 진정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빈곤과 문화에 대한 문제설정 자체를 더욱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앞선 목록 중 ④번의 관점이다.

오늘날의 빈곤은 ‘절대적 빈곤’에 더하여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알기 쉽게 설명해서, 학교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절대적 빈곤이라면, 교실에서 친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없어 속상한 것이 상대적 빈곤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도시빈민들은 이중의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빈민들의 문화적 권리란 바로 이 상대적 빈곤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민들에게 당면한 생존권 문제가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도 관통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문화를 문제 삼게 된 이상, 우리는 빈민들의 문화적 정서 역시도 고려해야만 하는데, ‘박탈감’과 같은 문제가 절대적 빈곤에서보다 상대적 빈곤의 문제에서 더 중요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회구조의 양식이 글로벌 소비자본주의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문제는 더욱 더 첨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빈민들에게 핸드폰을 사주고 인터넷을 깔아주고 명품을 사주자는 이야기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박탈감을 내면화하는 구조를 규명하고 그에 맞는 제도적 개입을 병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8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자기가 사는 버스정류장에 내리지 않고, 옆 동네 중산층 단지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중산층을 동경하는 것은 허황된 꿈이라고 알려줘야 할까. 자기 동네에 내려 꿋꿋하게 걸어가라고 충고해줘야 할까.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너도 중상층이 되라고 격려해줘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너의 행동에는 타인의 시선이 배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해줘야 할까.

앞서 나는 “빈민들이 체험하는 빈곤의 현실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차별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차별의 맥락을 짚어내고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문화적 권리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그 아이에 대한 다정함은 물론이고) 우리는 도시빈민들이 살아가는 문화적 환경이 왜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구조적인 접근을 취해야 한다.

실제로 빈민들이 처한 문화적 환경은 거의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도시공간 속에서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빈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빈민들의 주거공간이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중산층들이 임대아파트 주변에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다는 것은 빈민을 표적으로 계층 간에 적대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빈민층 자녀들이 제 동네에서 버스를 내리지 못하고 중상층 동네 정류장에서 내리고 있다는 것은 상위계층에 대한 동경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사회적 삶은 문화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절대 해결 불가능한 문제이다. 그리고 임파워먼트 프로그램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다.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애초에 나는 빈곤문화가 존재함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오늘날 도시빈민들의 문화적 조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도시빈민지역운동에서 ‘문화적 권리’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을 짚어보았다. 요즘 회자되는 문화적 권리에서 문화는 사실상 빈민들의 능력과 활력을 돕고자 하는 맥락에서 기획된 것인데, 이것으로는 빈곤과 문화에 관한 관계맺기가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화란 단순히 어떤 즐거움 따위를 희구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영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빈곤과 문화의 관계라는 것은 빈민이라는 특정계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애초에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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