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과 문화, 관계 맺어주기

― 쇠뿔 단 김에 뽑아보자는 아주 발칙한 상상


김성윤/ 웹진 <문화사회> / 2006.10.26



지난 2004년 상도동 달동네 철거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서울에는 빈민 집성촌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 때 ‘쪽 팔렸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파문놀이’로 시작된 서울의 빈민촌 철거가 근 40년 만에 마무리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흥미로운 것은 대중들이 자기-기만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서울의 빈민을 망각해버린 것 같다. 물론 빈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작은 잔상조차 남지 않도록 자기 기억에서 빈민을 지운다.

도시의 잉여에서 기억의 잉여로까지 전락해버린 도시 빈민은 자신들의 거주공간에서 철거되고 대중의 기억에서도 축출됐다. 그러나 공간과 기억이 없어졌다고 해서 도시의 위계구조에 변동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우리가 소각하고 남은 잔상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도시빈민은 엄존해 있다.



‘33번지’와 ‘오탁의 거리’


천재시인 이상을 흉내 내 서울을 산책하다보면, ‘33번지의 18가구’는 쪽방과 반지하와 150세대 8평 임대아파트로, ‘경성역의 티이루움(tea-room)’은 서울역의 쇼핑몰로 대체됐을 뿐이다. ‘미쓰꼬시’ 백화점과 ‘오탁의 거리’가 지녔던 위계는 프레이저 스위츠와 노숙의 거리로 잔존해 있다. 사실상 ‘33번지’와 ‘오탁의 거리’는 그대로이다. 도시의 빈민들은 표류하면서 엄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이다.

사실 빈민촌의 철거와 빈민의 표류는 그다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60~70년대 경기 광주․성남 강제이주 정책 때도 그러했고, 80년대 합동재개발 전략 때도 그러했다. 빈민은 무허가정착지에 집성하고(판자촌), 쫓겨나면 흩어지고(철거․이동), 그러다 빈틈이 생기면 재집결한다(달동네). 이것은 임대주택 정책 시기라 할 수 있는 현재에도 예외가 아니다(달동네-철거-이동-노숙․쪽방). 즉 대도시 서울과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게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게임 와중에, 최근 대중들 사이에서 새로운 인식이 돌고 있음이 감지된다. 임대주택 시작 이후 빈민들이 부재한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빈민의 존재를 다시금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이라는 담론적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분산돼 있던 도시빈민들이 쪽방 등지로 ‘서서히’ 재집중하고 있는 풍경, 즉 실천적 효과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양극화 해소와 빈곤의 퇴치가 당면한 사회적 의제로도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겸연쩍은 기분을 거둘 수 없다. 1백년을 넘게 장기지속하고 있는 도시 빈민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학적․복지학적 문제로 국한할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견 도시 빈민은 일순간의 경제적인 이유로 배태된 집단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빈곤은 우리의 전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불가결하게 수반되는 구조적인 결핍이자 공백이다. 우리에게 있어 도시빈민의 문제는 수십년을 반복하고 있는 게임이 아니던가. 즉, 부의 (일시적인) 재분배를 넘어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다. 분명, 이제는 그 게임을 종료할 시점이다.



빈곤한 ‘문화적 권리’의 문제


그 게임에 종말을 알리는 것이 바로 빈곤문제의 문화 논의이다. 최근 들어 빈민운동에 문화운동을 결합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빈민들의 문화적 경험이 다른 계층에 비해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화복지’ 혹은 ‘문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도시빈민지역의 주민들은 먹고 사는 1차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 등 소위 ‘2차적인 부문’들을 요구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 부분은 매우 핵심적인 체크사항이다. 교육과 문화라는 것은 ‘빈곤의 대물림’ 현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최근 소외계층에 대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2차적인 부문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도시빈민들이 이제 먹고 살 만해졌다는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빚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마당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불편함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문화에 대한 요구이다.

그렇다면 이제 빈민지역운동의 문화프로그램에 대해 찬찬히 살펴봐야 하는데,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 논의들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대개의 프로그램들에서 ‘문화적 권리’에 대한 개념이 아직 모호하다는 점 때문이다. 앞선 시기 도시빈민지역운동에서 문화 개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문화운동에서 문화 개념이 모호하다는 문제로 넘어온 셈이다. 현재까지의 논의와 활동들은 대개의 경우, 어떻게 하면 빈민들의 여가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문화예술의 생산경험을 통해) 자치와 참여의 기회를 늘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집중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권리 향상이라는 기조는 권능부여empowerment;임파워먼트라는 틀 속에서 추구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을 매우 소극적인 운동방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임파워먼트 프로그램은 사회구조적으로 제한적인 개인의 역량을 최대화하자는 취지인데, 자칫 여기에 만족하다가는 사회전반에 고착화되어 있는 불평등의 구조 자체를 망각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찌 보면 이 문제는 문화운동 진영 내에 빈곤의 문제설정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문화적 권리’라는 가치를 진정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빈곤과 문화에 대한 문제설정 자체를 더욱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오늘날의 빈곤은 ‘절대적 빈곤’에 더하여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알기 쉽게 설명해서, 학교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절대적 빈곤이라면, 교실에서 친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없어 속상한 것이 상대적 빈곤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도시빈민들은 이중의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빈민들의 문화적 권리란 바로 이 상대적 빈곤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민들에게 당면한 생존권 문제가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도 관통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상대적 빈곤이 생존권과 직결된다니. 그러나 생각해보라. 핸드폰이 없어 자살을 생각하는 청소년이 느끼는 빈곤의식과 그 옛날 보릿고개에 굶주려 느꼈던 빈곤의식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아니라, 세상의 룰이 바뀌고 있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문화를 문제 삼게 된 이상, 우리는 빈민들의 문화적 정서 역시도 고려해야 하는데, ‘상대적 박탈감’과 같은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회구조의 양식이 글로벌 소비자본주의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문제는 더욱 첨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빈민들에게 핸드폰을 사주고 인터넷을 깔아주고 명품을 사주자는 이야기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박탈감을 내면화하는 구조를 규명하고 그에 맞는 제도적 개입을 병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8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자기가 사는 버스정류장에 내리지 않고, 옆 동네 중산층 단지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중산층을 동경하는 것은 허황된 꿈이라고 알려줘야 할까. 자기 동네에 내려 꿋꿋하게 걸어가라고 충고해줘야 할까.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너도 중상층이 되라고 격려해줘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너의 행동에는 타인의 시선이 배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해줘야 할까.

빈민들이 체험하는 빈곤의 현실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차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이 경험하는 문화적 차별의 맥락을 짚어내고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 만약 문화적 권리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그 아이에 대한 다정함은 물론이고) 우리는 도시빈민들이 살아가는 문화적 환경이 왜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맞는 구조적인 접근을 취해야 한다.

실제로 빈민들이 처한 문화적 환경은 거의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도시공간 속에서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빈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빈민들의 주거공간이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중산층들이 임대아파트 주변에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다는 것은 빈민을 표적으로 계층 간에 적대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빈민층 자녀들이 제 동네에서 버스를 내리지 못하고 중상층 동네 정류장에서 내리고 있다는 것은 상위계층에 대한 동경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사회적 삶은 문화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절대 해결 불가능한 문제이다. 임파워먼트 프로그램조차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요즘 도시빈민지역운동에서 ‘문화적 권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실상 빈민들의 능력과 활력을 돕고자 하는 맥락에서 기획된 것인데, 이렇게 소극적인 문화적 권리로는 빈곤과 문화에 관한 관계맺기가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화란 단순히 어떤 즐거움 따위를 희구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영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빈민들에게도 문화적 권리가 당연한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문화의 지평을 더 두텁고 폭넓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장기지속하는 빈곤의 게임이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된 것 같다.

Posted by 김성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