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Willis, Learning to Labor: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s, ; 김찬호?김영호 역,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 민맥, 1989
5. 간파(Penetration) : 현실을 꿰뚫어봄
분석의 요소
반학교문화와 그 과정은 특수한 역사적 관계 속에 있는 일정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결코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조적 결정을 인정한다고 해서 창조성의 의미가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못박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창조성이란 결코 개인적인 행동이나 한 특정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그 논리는 집단의 수준에서만 생겨난다. 두 번째 창조성을 어떤 유일한 능력이라든가, 무한한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도 그것은 미래나 현재를 지배한다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주관적 확신이 너무 넘쳐남으로써 생기는 깊은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183)
실제로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바로 문화적이고 주관적인 과정이며 거기서 비롯되는 행동이다. 이런 계기를 통해서 구조적 결정은 비로소 사회적 사회에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183)
모든 집단은 그들의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억제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결정 조건을 간파하고 있는 셈이다. (184)
한 문화에서 가장 선명한 창조적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다른 모든 행동과 기쁨은 바로 그렇게 깊이 개발된 ‘통찰’의 토대 위에서 영위된다. (184)
이러한 ‘통찰’은 비틀리고 뒤집혀 또 다른 형태―육체노동에 대한 주체적 긍정 같은 것―로 바뀌어 버리는데,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변화를 두고 본다면 논리적인 말로 쉽게 표현되는 것은 고사하고 도대체 그 문화에 합리적인 중심요체가 있었는가, 그리고 있을 수나 있는가 하는 의심마저 갖게 된다. (185)
지금 논의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통찰이 어느 한 사람 또는 동질적인 집단의 정신 속에서, 의식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85)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이고 명확한 의식은 우리에게 가장 쓸모없고 비합리적인 길잡이 일 수 있다. (185)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형태에 대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실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의 문화형태는 자본주의가 타도된 이후 이뤄질 삶의 구체적인 윤곽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186)
노동자계급이 지금 취하고 있는 사회적 형태 속에서 복합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용하여 결국 노동자들이 그런 변혁에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 문화 특히 노동자 자녀들이 반학교문화가 담고 있는 이러한 합리성 및 미래의 요소들이다. 노동자들이 지금 처해 있는 궁핍한 현실을 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내면화하는 외관상의 문화적 상승(cultural ascension)이다. (186)
문화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이러한 큰 역량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의 더 깊고 복잡한 함정을 초래했다. 어떤 방식으로 취해졌건 간에 이 역량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전혀 단정할 수 없다. (187)
한 집단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공유되는 집단적 견해와 목표가 있어야 한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높은 사기(high morale)라고 부른다. (188)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수준에서 간파가 부분적으로 밖에 이뤄지지 않아 그것이 충분하게 합리적으로 전개되어 표출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188)
이런 저런 대상이나 인공물 또는 상징들 속에서 어떤 전위(displacement)나 투사(projection)를 통해 무엇이 표현되는가? 바로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반학교문화가 그 상황과 조건을 간파하려는 합리적 충동을 규명할 수 있다. (190)
간파
그 모두가 기존체제에서 내놓는 ‘등가물’의 본질을 폭로하는 게 핵심이 있다.
첫째, 반학교문화에서는 학교가 노동자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기대하는 순응과 복종이 가져다주는 보상에 대해 비교적 미묘하고 역동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거기에는 말하자면 ‘성공의 기회를 잃는’ 대가가 뒤따른다. (중략) 대단치도 않은 자격을 얻어내느라 지금 ‘얌전이’가 된다는 것은 어느 때에라도 즉시 유쾌함을 만들어내 누릴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아예 차단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그 문화적 선택은 순응주의의 소심한 안전과 기껏해야 상대적이고 심지어 허황되기까지 한 공식적 진보에 도전하는 시민사회의 불확실한 모험을 향한 것이다. (하략)
두 번째로 반학교문화는 노동자 자녀들이 장차 선택할 수 있는 일의 질에 대해서 나름대로 어떤 평가를 내려준다. (중략) 그러므로 자격이란 것의 효험과 목표가 모두 불확실한 마당에 그것을 따내려고 그렇게 아둥바둥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이냐고 반문할 객관적인 증거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중략) 자격이라는 것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이런 평가가 정확하다면, 그것은 노동자 자녀들이 졸업장과 자격증에 연연하는 것이 미련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하략)
끝으로 반학교문화는 개인논리와 집단논리의 차이, 그리고 현대교육에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혼동의 본질이라 불리울 수 있는 무엇을 실제로 간파하고 있다. 학교에 관련된 문화적 간파―이것은 그 나름의 관행과 대상들을 담은 문화적 맥락에서 행위자들 스스로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이뤄지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집합적인 관점을 결정하는―의 핵심은 계급이나 집단이익의 논리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중략) 계급이나 집단의 그 나름의 수준에서는 사회적 이동이란 전혀 무의미하다. (중략) 반학교문화와 그밖에 다른 노동자계급의 문화형태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요소를 담고 있다. (중략) 한 개인으로서 그 기울기 모델에서 상향이동하는 것은 지혜이지만, 한 계급의 구성원들로서는 어리석은 짓이 되어 버린다. 학교교육의 핵심에 있는 모순을 간파함으로써 반학교문화는 그 성원들을 순응주의와 관례적인 학업성취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에 힘입어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과 잠재력의 뿌리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게 된다. (이상 191~196)
노동력 : 독특한 상품
반학교문화는 노동력의 독특한 본질을 그 나름대로 인지하고 그에 반응한다. 그 문화가 노동력을 제한하는 것은 무슨 본능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이다. (197)
‘사나이’들이 자기들의 문화적 원천을 근거로, 자신의 노동력을―일의 세계와의 각별하고 특권적인 결합이라기 보다는―일의 세계로부터 부과되는 부당한 요구를 막아내는 방법으로 간주하는 것을 우리는 1부 현장기술지에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곧바로 반항적인 노동현장문화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 문화의 목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생산,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잠재적으로 탐욕스런 요구들을 제한하는 데 있다. (199)
일반화된 추상적 노동
현대의 일을 한 동아리에 묶어서 무의미하다고 보는 전제는 훨씬 더 광범위한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00)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교사이건 사회사업가이건, 마치 지금 연관공이나 목수가 그러하고 자본주의 속의 모든 산업노동자들이 그래왔듯, 매일 작업예정표의 표준시간을 메꾸는 것이 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실체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203)
우리는 반학교문화의 요소들은 문화적 간파로서 뿐만 아니라, 이런 지배적인 시간의식을 제한적으로나마 타파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204)
시간과 동작연구같은 조직 및 절차에 관한 현대적 기술의 전체 목표는 한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간격을 좁히는 데 있다. (204)
6. 제약(Limitation) : 간파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
어떤 의미에선 문화적 간파와 그에 관련된 실천들이 사회를 변형시키는 정치적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중정당도 문화적인 수준을 해석해서 동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정치적 조직의 결여, 그 자체는 간파가 부분적으로 밖에 이뤄지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215)
반학교문화의 반(半)거부와 간파는 항상 잠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또 아주 가까스로 현재 상태에 순응하지만 결국에는 완전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215)
분리(division) : 육체/정신노동, 남/녀, 인종차별
학교라는 가면극에서는 정신노동이라는 것이 부당한 권위와 결부되어있고 허황된 장래만 기약하는 여러 자격이 거기에 연계되어 있는데, 개인주의가 타파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가면극의 일부로서이다. (216)
일반적 노동환경의 한 모습이 되는 특유한 성차별을 경험하기가 쉽다. (217)
노동력과 가부장제
그런데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정신노동의 보상과 만족을 모든 사람이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가 그런 균열(split)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왜 그런 필요가 충족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218)
자기들을 가늠하는 정신/육체노동의 기울기 도식의 평가기준을 뒤집어버린다. (219)
노동자들이 그런 구분을 무슨 억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상 무조건적으로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되지는 않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220)
현장기술지에서 보았듯이, 체계들 사이의 맞물림은 이론이 아닌 경험세계에서 확인된다. 정신/육체노동의 분리와 성적 분리가 지속되는 비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계급체계 속에서 그 둘이 서로 맞물리는 데 있지, 결코 그 자체의 순수한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220)
그러한 성적 분리가 그 자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정당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정확하게 말해서, 객관적으로는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만 가부장적인 틀 속에서는 거꾸로 뭔가 유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분리체계들이 학교와 노동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221)
교차적인 가치평가의 결과는, 문화적 간파가 이뤄지면서, 특히 일반화된 추상적 노동에 대한 인식이 싹트면서 그것이 노동력에 대한 놀라운 긍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221)
더 나은 학업성적과 미래에 대한 통상적인 희망에도 불구하고 ‘얌전이’들과 그들의 계획은 무시될 수 있는데, 이는 그들 성공의 양식(mode)이 수동적이고, 정신적이며 강건한 남성성을 결여한 것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221)
추상화된 일반노동의 원리가 노동의 의미를 그 내부로부터 소진시켜버린 데 반하여, 변형된 가부장제가 노동의 바깥으로부터 의미를 채워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222)
남성성이라는 독특한 보상이다. (222)
정말로 일을 하려는 의향은 착취의 논리가 아니라 그저 남성다움의 논리로 상정된다. (223)
반학교문화에서 애당초에는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의 공통적 본질과 노동제계급에 속한다는 것의 정체성에 대한 통찰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육체노동만을 주장하고 결국 그것에 대한 기묘한 긍정으로 왜곡되어버린다. (224)
정신노동과 기술주의(technicism)가 유능한 인재를 뽑아 생산의 효율성을 증진하기 보다는 우선 기존의 계급관계를 유지시키는 데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떻게 동원되는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224)
노동자계급을 기존의 위치에 머물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정신적 능력이다. (225)
인종차별과 노동력
아주 수월하거나 정신적인 노동은 ‘째째한’ 것으로 낮게 매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가장 어렵고 거칠은 일이라고 해서 꼭 사내다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민자들의 노동과 결합되면서 더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226)
중미 인디언들 2세 중 일부의 경우, 그들의 문화적 반응과 과정은 ‘사나이’들의 그것과 비길 수 있다. (중략) 무임금과 빈곤의 문화를 물려받았다. (중략) 그것은 어떤 종류의 노동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모든 노동에 대한 거부이다. (227)
부록 :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사나이들의 생각
일상적 삶은 최상의 경우에 예술처럼 혁명적이다. 최악의 경우 그것은 감옥이다. 성찰은 최악의 경우에 보통 비평이 그렇듯이 그저 반동적이다. 최상의 경우 그것은 탈출을 위한 계획을 창안해낸다. 성찰하기 위해 삶의 세세한 부분들에 관여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최악의 경우들을 결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다는 식으로 성찰함으로써 삶의 순수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279)
5. 간파(Penetration) : 현실을 꿰뚫어봄
분석의 요소
반학교문화와 그 과정은 특수한 역사적 관계 속에 있는 일정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결코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조적 결정을 인정한다고 해서 창조성의 의미가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못박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창조성이란 결코 개인적인 행동이나 한 특정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그 논리는 집단의 수준에서만 생겨난다. 두 번째 창조성을 어떤 유일한 능력이라든가, 무한한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도 그것은 미래나 현재를 지배한다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주관적 확신이 너무 넘쳐남으로써 생기는 깊은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183)
실제로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바로 문화적이고 주관적인 과정이며 거기서 비롯되는 행동이다. 이런 계기를 통해서 구조적 결정은 비로소 사회적 사회에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183)
모든 집단은 그들의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억제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결정 조건을 간파하고 있는 셈이다. (184)
한 문화에서 가장 선명한 창조적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다른 모든 행동과 기쁨은 바로 그렇게 깊이 개발된 ‘통찰’의 토대 위에서 영위된다. (184)
이러한 ‘통찰’은 비틀리고 뒤집혀 또 다른 형태―육체노동에 대한 주체적 긍정 같은 것―로 바뀌어 버리는데,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변화를 두고 본다면 논리적인 말로 쉽게 표현되는 것은 고사하고 도대체 그 문화에 합리적인 중심요체가 있었는가, 그리고 있을 수나 있는가 하는 의심마저 갖게 된다. (185)
지금 논의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통찰이 어느 한 사람 또는 동질적인 집단의 정신 속에서, 의식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85)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이고 명확한 의식은 우리에게 가장 쓸모없고 비합리적인 길잡이 일 수 있다. (185)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형태에 대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실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의 문화형태는 자본주의가 타도된 이후 이뤄질 삶의 구체적인 윤곽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186)
노동자계급이 지금 취하고 있는 사회적 형태 속에서 복합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용하여 결국 노동자들이 그런 변혁에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 문화 특히 노동자 자녀들이 반학교문화가 담고 있는 이러한 합리성 및 미래의 요소들이다. 노동자들이 지금 처해 있는 궁핍한 현실을 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내면화하는 외관상의 문화적 상승(cultural ascension)이다. (186)
문화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이러한 큰 역량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의 더 깊고 복잡한 함정을 초래했다. 어떤 방식으로 취해졌건 간에 이 역량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전혀 단정할 수 없다. (187)
한 집단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공유되는 집단적 견해와 목표가 있어야 한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높은 사기(high morale)라고 부른다. (188)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수준에서 간파가 부분적으로 밖에 이뤄지지 않아 그것이 충분하게 합리적으로 전개되어 표출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188)
이런 저런 대상이나 인공물 또는 상징들 속에서 어떤 전위(displacement)나 투사(projection)를 통해 무엇이 표현되는가? 바로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반학교문화가 그 상황과 조건을 간파하려는 합리적 충동을 규명할 수 있다. (190)
간파
그 모두가 기존체제에서 내놓는 ‘등가물’의 본질을 폭로하는 게 핵심이 있다.
첫째, 반학교문화에서는 학교가 노동자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기대하는 순응과 복종이 가져다주는 보상에 대해 비교적 미묘하고 역동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거기에는 말하자면 ‘성공의 기회를 잃는’ 대가가 뒤따른다. (중략) 대단치도 않은 자격을 얻어내느라 지금 ‘얌전이’가 된다는 것은 어느 때에라도 즉시 유쾌함을 만들어내 누릴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아예 차단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그 문화적 선택은 순응주의의 소심한 안전과 기껏해야 상대적이고 심지어 허황되기까지 한 공식적 진보에 도전하는 시민사회의 불확실한 모험을 향한 것이다. (하략)
두 번째로 반학교문화는 노동자 자녀들이 장차 선택할 수 있는 일의 질에 대해서 나름대로 어떤 평가를 내려준다. (중략) 그러므로 자격이란 것의 효험과 목표가 모두 불확실한 마당에 그것을 따내려고 그렇게 아둥바둥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이냐고 반문할 객관적인 증거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중략) 자격이라는 것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이런 평가가 정확하다면, 그것은 노동자 자녀들이 졸업장과 자격증에 연연하는 것이 미련하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하략)
끝으로 반학교문화는 개인논리와 집단논리의 차이, 그리고 현대교육에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혼동의 본질이라 불리울 수 있는 무엇을 실제로 간파하고 있다. 학교에 관련된 문화적 간파―이것은 그 나름의 관행과 대상들을 담은 문화적 맥락에서 행위자들 스스로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이뤄지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집합적인 관점을 결정하는―의 핵심은 계급이나 집단이익의 논리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중략) 계급이나 집단의 그 나름의 수준에서는 사회적 이동이란 전혀 무의미하다. (중략) 반학교문화와 그밖에 다른 노동자계급의 문화형태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요소를 담고 있다. (중략) 한 개인으로서 그 기울기 모델에서 상향이동하는 것은 지혜이지만, 한 계급의 구성원들로서는 어리석은 짓이 되어 버린다. 학교교육의 핵심에 있는 모순을 간파함으로써 반학교문화는 그 성원들을 순응주의와 관례적인 학업성취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에 힘입어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과 잠재력의 뿌리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게 된다. (이상 191~196)
노동력 : 독특한 상품
반학교문화는 노동력의 독특한 본질을 그 나름대로 인지하고 그에 반응한다. 그 문화가 노동력을 제한하는 것은 무슨 본능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이다. (197)
‘사나이’들이 자기들의 문화적 원천을 근거로, 자신의 노동력을―일의 세계와의 각별하고 특권적인 결합이라기 보다는―일의 세계로부터 부과되는 부당한 요구를 막아내는 방법으로 간주하는 것을 우리는 1부 현장기술지에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곧바로 반항적인 노동현장문화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 문화의 목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생산,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잠재적으로 탐욕스런 요구들을 제한하는 데 있다. (199)
일반화된 추상적 노동
현대의 일을 한 동아리에 묶어서 무의미하다고 보는 전제는 훨씬 더 광범위한 맥락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00)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언젠가는 교사이건 사회사업가이건, 마치 지금 연관공이나 목수가 그러하고 자본주의 속의 모든 산업노동자들이 그래왔듯, 매일 작업예정표의 표준시간을 메꾸는 것이 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실체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203)
우리는 반학교문화의 요소들은 문화적 간파로서 뿐만 아니라, 이런 지배적인 시간의식을 제한적으로나마 타파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204)
시간과 동작연구같은 조직 및 절차에 관한 현대적 기술의 전체 목표는 한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간격을 좁히는 데 있다. (204)
6. 제약(Limitation) : 간파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
어떤 의미에선 문화적 간파와 그에 관련된 실천들이 사회를 변형시키는 정치적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중정당도 문화적인 수준을 해석해서 동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정치적 조직의 결여, 그 자체는 간파가 부분적으로 밖에 이뤄지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215)
반학교문화의 반(半)거부와 간파는 항상 잠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또 아주 가까스로 현재 상태에 순응하지만 결국에는 완전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215)
분리(division) : 육체/정신노동, 남/녀, 인종차별
학교라는 가면극에서는 정신노동이라는 것이 부당한 권위와 결부되어있고 허황된 장래만 기약하는 여러 자격이 거기에 연계되어 있는데, 개인주의가 타파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가면극의 일부로서이다. (216)
일반적 노동환경의 한 모습이 되는 특유한 성차별을 경험하기가 쉽다. (217)
노동력과 가부장제
그런데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정신노동의 보상과 만족을 모든 사람이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가 그런 균열(split)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왜 그런 필요가 충족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218)
자기들을 가늠하는 정신/육체노동의 기울기 도식의 평가기준을 뒤집어버린다. (219)
노동자들이 그런 구분을 무슨 억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항상 무조건적으로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되지는 않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220)
현장기술지에서 보았듯이, 체계들 사이의 맞물림은 이론이 아닌 경험세계에서 확인된다. 정신/육체노동의 분리와 성적 분리가 지속되는 비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계급체계 속에서 그 둘이 서로 맞물리는 데 있지, 결코 그 자체의 순수한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220)
그러한 성적 분리가 그 자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정당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정확하게 말해서, 객관적으로는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만 가부장적인 틀 속에서는 거꾸로 뭔가 유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분리체계들이 학교와 노동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221)
교차적인 가치평가의 결과는, 문화적 간파가 이뤄지면서, 특히 일반화된 추상적 노동에 대한 인식이 싹트면서 그것이 노동력에 대한 놀라운 긍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221)
더 나은 학업성적과 미래에 대한 통상적인 희망에도 불구하고 ‘얌전이’들과 그들의 계획은 무시될 수 있는데, 이는 그들 성공의 양식(mode)이 수동적이고, 정신적이며 강건한 남성성을 결여한 것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221)
추상화된 일반노동의 원리가 노동의 의미를 그 내부로부터 소진시켜버린 데 반하여, 변형된 가부장제가 노동의 바깥으로부터 의미를 채워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222)
남성성이라는 독특한 보상이다. (222)
정말로 일을 하려는 의향은 착취의 논리가 아니라 그저 남성다움의 논리로 상정된다. (223)
반학교문화에서 애당초에는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의 공통적 본질과 노동제계급에 속한다는 것의 정체성에 대한 통찰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육체노동만을 주장하고 결국 그것에 대한 기묘한 긍정으로 왜곡되어버린다. (224)
정신노동과 기술주의(technicism)가 유능한 인재를 뽑아 생산의 효율성을 증진하기 보다는 우선 기존의 계급관계를 유지시키는 데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떻게 동원되는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224)
노동자계급을 기존의 위치에 머물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정신적 능력이다. (225)
인종차별과 노동력
아주 수월하거나 정신적인 노동은 ‘째째한’ 것으로 낮게 매겨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가장 어렵고 거칠은 일이라고 해서 꼭 사내다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민자들의 노동과 결합되면서 더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226)
중미 인디언들 2세 중 일부의 경우, 그들의 문화적 반응과 과정은 ‘사나이’들의 그것과 비길 수 있다. (중략) 무임금과 빈곤의 문화를 물려받았다. (중략) 그것은 어떤 종류의 노동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모든 노동에 대한 거부이다. (227)
부록 :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사나이들의 생각
일상적 삶은 최상의 경우에 예술처럼 혁명적이다. 최악의 경우 그것은 감옥이다. 성찰은 최악의 경우에 보통 비평이 그렇듯이 그저 반동적이다. 최상의 경우 그것은 탈출을 위한 계획을 창안해낸다. 성찰하기 위해 삶의 세세한 부분들에 관여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최악의 경우들을 결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무슨 잘못된 것이 있다는 식으로 성찰함으로써 삶의 순수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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