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탈근대적 양상들, 대도시 속의 영구임대아파트 - 서울 가양동과 등촌동을 중심으로


김성윤



1. 도입


최근 사회적으로 신빈곤 현상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빈곤층의 주거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진행되고 있는 빈곤의 이러한 양상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우선은 빈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빈민촌의 강제 철거를 통해 집촌을 형성했던 빈민들이 도시 전역으로 유입되면서 노숙인으로 흩어지기도 하고, 다세대주택의 반지하 공간에 의해 덮어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 빈민들의 비가시화 양상을 지적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빈곤의 ‘재집중’ 양상이다. 소위 달동네와 꽃동네 등에서 집단 주거하던 빈민들이 쪽방 등지로 이동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세 번째로는 ‘은폐’와 ‘재집중’의 특성(남원석, 2004)이 복합된 ‘혼종’의 양상이다. 특히 영구임대아파트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빈민 수용 체제의 양상들을 함축하고 있다(김성윤, 2003).

빈곤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빈곤의 새로운 주거양상으로서 영구임대아파트의 사회학적 의미는 점점 그 중요성이 높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영구임대아파트에 관한 논의는 그동안 사회복지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학문적 특성상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한 사회복지학적 접근은 아파트 단지의 주거 일상을 사회병리학적 시각에서 보거나 온정주의적 시각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다 보니 임대주택의 수급?입주?관리문제나, 단지 내 빈민들의 생활 실태, 사회복지관의 운영, 빈곤문화 등의 문제로 천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김성윤, 2002).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매해 반복되는 이러한 연구들은 대개 ‘일단 공급하는 게 최우선’이라는 생산력주의로 귀결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아파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조차 아동?청소년 심리나 생보자 빈곤문화처럼 사회병리적 현상의 처방으로 천착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기껏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론적 휴머니즘에 매몰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러나 빈곤 주거의 새로운 경향을 함축한다는 의의가 있는 이상,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한 접근은 더욱 이론적이고 분석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 빈곤층의 새로운 생활양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계층적 의식이 어떻게 체계화?구조화?자연화하면서 자리 잡아 가고 있는지를 고찰해야 하는 것이다(조은?조옥라, 1992).

물론 빈곤에 대한 문화론적인 접근이 없지는 않았다. 빈곤문화론이 대표적인데, 그러나 이는 정작 영구임대아파트와 관련한 담론들이 정작 불평등의 해소와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 내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로 작용한다.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로부터 차용한 개념인 빈곤문화는 국내 사회복지학 분야 등에서 거론되고 있는데, 여기에 기대어 말하자면 영구임대주택의 입주자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뿌리깊이 각인되어 있는 어떤 고약한 습성 때문이라는 식으로 귀결된다. 물론 국내 연구자들의 경우 이 ‘고약한’ 빈곤문화의 존재여부에 대한 판단은 아직 조심스러운 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개념들이 등장하면 할수록 불평등 문제의 측면이 갈수록 희석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빈곤문화를 토대로 하는 근본적인 판단들은 대개 이들이 게으르다는 것이며, 여기에 따른 처방은 입주자 개개인의 노동 강도 향상을 위해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복지’를 위한다는 명목이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해 빈곤문화론에 기반한 연구성과물이 쏟아지는 한, 영구임대정책이 복지의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적 지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다.



2. 분석의 틀 ― 문화적 순환


여기서는 선행연구들이 그동안 물질성을 중심으로 불평등 양상을 추적했던 것에 반하여, 의미론적 체계 즉 의미생산의 영역에서 사회적?문화적 불평등이 고착화하면서 개인들의 정체성과 의식이 형성되어가는 유형들을 눈여겨보고자 한다. 의미생산의 영역에 대한 접근은 Hall(1992)이 언급했던 대로 우리 사회 연구에 ‘필수적인 이탈(necessary detour)’을 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상징체계의 문제, 특히 빈곤을 의미망을 추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빈곤의 담론이 생산?재생산되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현실이 아래의 <그림 1>(Hall, 1997 등; 영국 개방대학 필진들이 작업함)과 같이 규제, 소비, 생산, 정체성, 재현의 문화적 영역 전반에 걸쳐 얼마나 치밀하게 조직되어 일상에 침투해 들어가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림 2)> 문화적 순환


사실 이렇게 유물론적 체계와 의미론적 체계의 혼재된 양상을 통해 담론과 개인의 구성적 과정을 보려한 것은 영국 개방대학만이 아니다. 푸코(1997)의 ‘자아 테크놀로지’ 개념 역시 권력, 생산, 기호체계, 자아의 네 가지 축으로 같은 목적을 수행하고자 한 바 있었다. 그러나 푸코의 개념틀이 대다수 그 수용자들로 하여금 정치적 전유를 곤란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를 사용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푸코의 생산 개념은 이후 네그리에 의해 차용된 바 있는 것처럼 소비적 기제까지도 함의하고 있는데, 소비가 가지는 사회전체적인 의미생산 과정을 눈여겨보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경우 대중들의 일상 속에서 현실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과정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또 자아의 개념 역시 한계점을 가지고 있는데, 타자와 병존하는 구성물로서 자아를 보게 한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다른 자아와 더불어 동일성(identity, 즉 정체성)을 구성하는 맥락에 대해서는 의제 설정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개방대학의 문화적 순환(cultural circuit) 모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푸코의 권력에 해당하는 규제(regulation) 개념이 미시화되어 있는 체계들로 전환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는 하지만, 헤게모니적 함의로서 조절(regulation)이라는 뜻 또한 함축하고 있어서(Thompson, 1997) 푸코의 권력 개념을 보충해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문화적 순환 모형이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큰 점은 푸코와 다르게 소비와 생산을 나눴다는 점인데, 이는 소비와 생산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법과는 다소 다른 측면이 있다. 문화적 순환 모형에서 소비가 함의하는 바는 차라리 푸코의 생산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무방할 것이다(Miller, 1997). 또한 정체성과 재현의 문제에 있어서도 차이의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푸코와 달리 집단의 정체성을 고려하는 한편(Woodward, 1997), 재현의 정치학에 있어서도 유물론적인 강조가 눈에 띤다(Hall, 1997).



3. 영구임대아파트에 대한 개략적 접근


영구임대 정책의 도입과 그 의도는 모자가정, 생계곤란노인, 생활보호대상자, 소년소녀가장 등에 대해 처음 3백여만원의 보증금으로 입주할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주거보장이 마무리되진 않는다. 매해마다 재계약으로 인해 보증금을 인상해야 하고, 자녀가 성년이 되면 보증금을 대거 2백만원 정도나 추가해야 한다. 그렇게 해마다 오르는 보증금은 7백만원~1천만원을 호가하게 된다. 게다가 8~10평 짜리 아파트의 월임대료에 관리비 등을 총합하면 한달에 20~30여만원을 납입해야 하는데, 초저소득에 저축능력조차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속은 셈’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빚을 구해야만 하거나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빈민촌을 찾아 떠나가야만 한다. 결국 우리나라의 영구임대아파트는 빈민들 중에서도 한정적으로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영구임대정책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복지 정책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역시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영구임대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말로만 영구임대인 것처럼, 복지의 성격에 있어서도 엄밀한 사회복지와는 동떨어져 있다. 우선은 이 정책이 서서히 입안되던 시기를 추적해보면, 정책수립의 목적이 빈민구제나 복지차원 같이 순수한 의도였다기보다는 거시경제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단은 대량의 영구임대아파트 건설을 기회 삼아 주택임대업의 산업화와 건설산업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전세금 폭등으로 인해 활발해지던 사채시장을 견제함으로써 유휴 자본을 제도금융화하며 △주택 대량 공급을 통해 자기집을 가지려는 수요를 억제하고 이로써 주택가격을 안정화해보겠다는 목적이었다(박청해, 1984).

영구임대주택의 주공급자인 대한주택공사 역시 이런 발상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임대인 측면 즉 임대주택의 공급자 측면에서 보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부동산투자보다 경영의 합리화를 통하여 최대의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업이 되는 것이다.”(대한주택공사, 1980) 대한주택공사는 1999년을 기준으로 현재 연매출 4조1천6백51억원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이 정책이 애초에 빈민들과 무관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이 영구임대주택을 건설공급함에는 단기적으로 볼 때는 자금회전이 느리고 수익성이 낮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영리성이 높을 수도 있으며 일정기간의 내구연한이 지나서 재개발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는 주민의 반발없이 쉽게 도시재개발을 할 수 있어 도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황명연, 1984)



4. 규제


(1) 강서양천지역의 도시구획 성격

서울 강서지역에는 양천구와 강서구가 있다. 양천구는 목동이 강서구는 화곡동이 그 중심인데, 단적으로 말해 목동은 부자 동네고 화곡동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네다. 목동은 2003년 3월 국내 최고층인 69층짜리 고급주상복합아파트가 지어졌을 정도로 부가 집적되어 있는 동네이다. 아파트 가격도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강남지역을 호가할 정도다. 반면 화곡동은 다세대주택 건물들이 키치적으로 밀집해 있는 전형적인 서민공간이다.

개인의 취향과 정서에 따라 다르겠지만, 목동에 가면 대개 숨이 턱 막히는 편이다. 계획지역답게 가지런히 뻗은 도로(게다가 이 도로들은 십수개의 대규모 일방통행 도로들로 철저하게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죽죽 솟아있는 고층아파트의 스카이라인, 아무런 변주 없이 천편일률 반듯하게 박혀 있는 창문들. 목동이 그런 식이라면, 상대적으로 화곡동은 목가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여기저기 70년대 부실공사들을 땜질하기 위해 소음이 그치지 않고, 교통은 난잡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어지럽다.

흥미로운 것은 화곡동과 목동에 깃들어 있는 어떤 욕망을 발견할 때이다. 그것은 앞에서 열거한 외관상의 감상만으로 발견되는 문제가 아니다. 화곡동과 목동이 각각 어떤 권력의지의 산물인지 구체적으로 포착해내는 것이다. 화곡동의 ‘새마을운동본부’1)와 목동의 ‘종합운동장’은 이 두 지역의 욕망의 원천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실마리가 된다. 서울의 도시 공간에 자기 욕망을 점철시키는 데에 혈안이 됐던 두 권력자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화곡동은 6, 70년대 도시구획에 의해 만들어진 동네다. 우면산을 깎아 주택지역을 확보하고 까치터널을 뚫어 도로를 냈다. 거기에 택지를 지정하고 집을 짓게끔 한 동네이다. 새마을운동본부는 이 거대한 토목사업을 자축하는 70년대의 버젓한 기념물이다. 반면 목동은 80년대 도시구획에 의해 만들어진 동네다. 아파트촌, 그 한마디만으로도 대강 눈치를 챌 수 있다. 거기에 덤으로 얹힌 종합운동장에는 신군부의 3S 신화를 이어나가려던 어떤 의도가 배태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강서지역의 잔해더미인 셈인데, 그 잔해라는 것은 거기에 그치질 않고 아직도 계속 쌓여가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 강서지역의 흔적들을 살피면 일종의 토목적 근대가 목격된다.

그런데 90년대부터의 강서지역은 그런 식의 토목적 성격을 탈피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영구임대아파트’에 관련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곳을 애초에 구획한 정부의 국가적 힘, 이 일대를 발판 삼아 한 몫의 비상을 꿈꾸는 사적 자본의 힘, 그리고 주거공간을 실제로 점유하고 있는 노동빈민들의 민주적 힘들이 교차한다. 이 힘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가양동과 등촌동을 통해 잔해더미 강서지역의 현재적 지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게토화와 도시중산층화

가양동과 등촌동의 영구임대아파트들은 얼핏 보기에도 15평 내지 20평은 족히 되는 것 같다. 못 산다면 서민 정도나 살지, 빈민들이 자리할 곳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목동단지에 부럽지 않을 만큼 잘 정돈된 길, 강서정보도서관, SBS 등촌동 공개홀, 등촌자동차종합시장 등이 뿜어내는 스펙터클은 결코 이곳에 가난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내버려두질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한마디로 속임수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8~10평짜리 좁은 곳에 2~5인 가족이 정말 저열할 정도로 살고 있는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에 가난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버린다(<그림 2> 참조).

일반인들 중에는 등촌동 아파트 단지에 대해 얼핏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 아파트 단지가 영구임대주택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정식 명칭 자체가 ‘등촌주공아파트’이지, ‘등촌동 영구임대아파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가양동도 마찬가지여서 가양단지의 정식 이름은 ‘가양동 도시개발아파트’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인근을 아무리 들락거려도 이렇다 하게 ‘빈티’가 흐르는 행색과 광경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이곳이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파트 공간도 그다지 후져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뿜어내는 도시스펙터클은 결코 이곳에 가난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역설이 바로 90년대 강서지역의 흔적이요, 화곡동?목동과 가양동?등촌동의 다른 점이다. 그 차이점이란 단순히 90년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편의적인 도식이 아니다. 화곡동과 목동은 공간적 지배소가 어떻든 자기의 정체를 대수롭지 않게 드러낸다. 재래시장?다세대주택?새마을운동본부가 6~70년대의 아이콘 노릇을 하며, 대형몰?중대형아파트?종합운동장은 80년대의 아이콘이 된다. 반면 등촌단지는 좀처럼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누구도 감히 이곳을 성격 지어서 말하기 힘들다. 물론 이 구역을 좀 아는 사람들은 빈민 출신 등의 사람 8할에 저소득 주택청약자 2할 정도가 머무르고 있는 현대판 빈민촌이라 하겠지만, 외부인은 물론이고 내부인조차도 이곳의 성격을 쉽게 눈치 챌 수 없다. 집단적으로 몰아넣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즉 은폐하고 재집중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양동 영구임대아파트의 정식 이름처럼 90년대) ‘도시개발’의 흔적이다. 따라서 이곳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빈민들의 흔적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권력과 규제이기도 한 셈이다.

이 지역에 은폐하고 있는 일종의 어떤 힘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가양동, 등촌동 이 두 지역은 게토화되어 있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집단 수용해 외부와 격리한 게토 말이다. 이곳에 살고 있으면 삼중의 답답함을 느낀다. 여덟 평 좁아터진 닭장에서 사회적 노동력이라는 계란을 낳고 사는 신세가 답답하고, 앞 뒤 시야가 꽉 막혀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15층짜리 콘크리트밖에 없는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고, 닭장과 콘크리트에서 벗어나더라도 진정 신체의 자유를 탐닉하기 위해서는 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장막’을 건너뛰어야만 하기 때문에 답답하다. 바로 이 장막이라는 것, 영구임대단지가 게토가 된 이유는 바로 단지를 둘러싼 거대한 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등촌동 영구임대아파트단지의 경우, 해당지역 전체가 상업지역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그림3> 참조). 1단지, 2단지 등의 개별단지들은 소차로를 통해 인접하면서 내부적으로 소통이 자유롭지만, 거대한 단지 전체는 상업지구에 의해 포획되어 있다. 상업지구가 주택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보니 외부의 대차로를 누비는 사람들에게, 영구임대주택의 광경은 자신이 영구임대단지라는 사실을 숨긴다. 피자헛, 아웃백스테이크, VIPS, 대형 수산회 전문점 등 각종 외식코스가 남쪽 공항로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 북쪽 양천길에는 등촌자동차종합시장, SBS 공개홀 등이 영구임대단지의 노출을 철저히 차단한다. 이 대로들을 다니면 상업지역 너머로 영구임대아파트들이 ‘아련하게만’ 보일 뿐이다. 아련하게 보이는 집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8평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결코 밝히지 않고, 오히려 20평짜리 유령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착시현상이 빚어지는 바로 그 순간, 외부의 시민들은 도시에 더 이상 빈민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저곳에 설마 가난한 사람이 있을까.’ 도시공간의 이미지 전략은 이렇게 실재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

올림픽대로와 인접해 있는 옆 동네 가양단지의 경우, 흥미롭게도 아파트들이 강변과 직각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그림 4> 참조). 이러한 배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창을 통해 강을 볼 수 없게끔 한다. 물론 가양동 영구임대단지에서 강변을 마주하는 아파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강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한참 물러난 곳에 배치되어 있다. 반면 대아동신아파트나 한강타운아파트 같이 단지 내부에 섞여 있는 중산층 아파트들은 강변에 전면 배치되어 있다.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이 상존하는 셈이다. 이로 인해 한강을 조망하고자 하는 영구임대아파트 거주자의 시선은 차단되고 만다.

거주자의 시선뿐만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올림픽대로를 주행하는 사람 역시 이 아파트의 실체를 짐작하지 못하게 되는 효과가 생긴다. 등촌단지와 마찬가지로 이곳 가양동 역시, 빈민들의 거주공간이라는 사실을 절대 들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강변에 중산층 아파트만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양단지는 빈민촌이 아니라 오히려 신흥부촌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적지 않다. 이 장치는 생각보다 더 치밀하다. 산책을 몇 번이나 반복해봐도 그 어떤 빈틈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외부인들이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 동시에 내부인들이 외부를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고착화한 것이다.


(3) 중산층과의 공존

가둬진 공간, 영구임대아파트단지 내부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아파트를 가리고 거주자를 관리하려는 전략은 단순한 격리 수용 차원을 넘어선다. 앞서 이곳이 마치 게토 같다고 했지만, 여기에는 빈민만이 수용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즉, 거대한 띠로 둘러쳐진 이 ‘섬’에는 빈민들뿐만 아니라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등촌동에는 부영?진로?대림?동성 등이 있고, 가양동에는 동신?대림?한강타운?우성?현대강나루 등이 산포되어 있다(<그림5>와 <그림6>).

이런 내부 구도 속에서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이 지역이 외부인들에게 종종 중산층 거주 지역으로 오해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중산층들이 거주하고 있고, 아파트단지 주변 환경 역시 중산층들의 수준에 맞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까르푸, E-마트, 그랜드마트 등 대형유통할인점이 세 곳이나 자리하고 있고, 주로 자가용을 가지고 드나들게 되어 있는 외식업소들이 줄지어 있다.

그 틈바구니에 영구임대단지의 노동빈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의 계급?계층간 복마전은 직접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판독해내기 어렵게끔 펼쳐지고 있다. 행색이 초라한 빈민들을 멸시하는 중산층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쪼개 단지 내의 빈민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중산층도 있다. 또 위화감 덩어리인 중산층을 극도로 증오하는 빈민들이 있는가 하면, 저들 중산층을 닮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빈민들도 있다.


(4) 규제-탈규제-재규제

이곳에서 발견되는 규제 양식은 90년대 이전의 억압적 방식의 규제를 풀어 신자유주의적인 탈규제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70~80년대의 빈민 주거 정책은 대개 강제력에 기반했다. 그리고 최근 마지막 달동네가 철거되기까지, 그 방식은 대체적으로 해당 지역의 재개발 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고 가양동과 등촌동 영구임대아파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90년대부터 들어선 빈민주거지역에 관한 강제적 규제는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빈민층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것 같은 형국이지만, 사실상 이들은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힘을 감지하게 된다. 바로 ‘게토화’와 ‘도시중산층화’라는 상징체계적 규제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탈규제의 양식을 빌린 재규제(re-regulation)에 다름 아니라는 Thompson의 지적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쪽방이나 노숙인 등에 대해 ‘무허가’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억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다소 양성화됐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집단에게마저 규제가 존재하며, 그 양상이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하다.



5. 소비와 생산


(1) 문화의 경제적 과정과 경제의 문화적 과정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의미론적이고 상징적인 체계에서는 소비와 생산개념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소비와 생산이라는 통념이 가리키곤 하는 물질 생산양식으로부터 의미 생산양식으로 그 외연을 이동해보자는 의도이다. 이를 테면 공간의 소비는 공간의 점유인 동시에 새로운 풍경과 공간의 생산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나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광고나 그 밖의 사회적 담론들에 의해 상품에 축적되어 있는 의미를 소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상품을 소비할 때에는 의미화된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며, 따라서 특정한 시공간에 압축분할되어 있는 의미를 소비하는 것이다. 바르뜨는 기호란 하나의 기표와 기의가 만나는 현상이며, 이 기호에 또 다른 기의가 덧붙는 현상을 신화의 구축이라고 지적했는데, 그의 논법에 따르면 이 또한 다른 기호의 구축이 되며 여기에 현대적 의미의 기의들이 계속 접붙여지는 양상이 반복?확대된다고 지적할 수 있다. 기호학의 이러한 해석틀은 의미화된 상품과 코드화된 시공간의 소비가 다른 차원에서는 기호 생산과 세계의 구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 준다.

가라타니(1998)의 말처럼 더 이상 “경제는 하부구조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빈곤을 연구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물질 생산양식에서 의미의 생산양식으로 영역을 이동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나 소비의 개인적 계기와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있어, 이러한 관점은 매우 유용하다.


(2) 상품 소비와 계층 상승의 마술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열심히 일하면 빈민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생활보호대상자 중에서도 소년소녀 가장, 저소득 모자가정, 철거세입자들, 저소득 청약저축 가입자……, 이들은 구원과 행복의 이미지를 잔뜩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희망한다. 그런데 영구임대아파트의 일상이 정말 묘한 것은, 이 희망의 담지자들 눈앞에 그 실체가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블록블록마다 박혀 있는 24시간 편의점,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는 그랜드마트?E-마트?까르푸 등 대형유통할인점, 그리고 언젠가 ‘내’가 살게 될 중대형 민영 아파트들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분명 이전에 살던 곳에서는 쉽게 마주치기 어렵던 광경이다. 이것들을 통해 영구임대단지 거주자들은 일종의 환영을 품게 된다. 가시권에 들어선 중산층 아파트는 예전 달동네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남의 것’이 아니다. 주위에 널린 외식단지, 학원가, 마트들은 중산층으로의 욕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로써 등촌동, 가양동 사람들은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상품 스펙터클에 매료되며 이것을 구입하곤 한다. 삶의 조건이 바뀌고 있는데, 이것을 따르지 않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독거노인 등 정말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은 사회적 노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구매력으로 복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한 가지 전망을 해보자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이러한 풍경은 더욱 잦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 작년 “8월말 현재 영구 임대주택 19만여 호에 거주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중 소득증가 등으로 입주자격을 상실한 경우가 6만3천여세대(33%)에 달”한다고 한다(한국일보, 2002). 즉 영구임대단지 안에는 이미 소비자본주의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물론 대다수의 거주자들은 빈곤을 세습하면서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앞으로는 갈수록 입주조건이 완화되고 임차권의 활용 또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머니투데이, 2002). 달리 말해 영구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이 재산관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리라는 얘기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빈민들로 하여금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더 이상 빈민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도시계획과 소득수준을 넘어설 만큼의 과다지출을 유도하는 스펙터클의 배치를 간과할 수가 없다. 그들은 노동빈민이다. 그런데 대도시 서울은 지금 빈곤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와 실체를 은폐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우리 자신조차도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도록 이차원(異次元)의 환영을 품게 한다. 대도시 서울에서만큼은 생산관계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6. 재현-정체성-차이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재현은 불평등이 본질적인 것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Woodward, 1997). 비본질적인 이해관계의 맥락이 집단적인 단일성을 구성하면서 마치 본질적인 것으로 외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학적 함의를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재현과 차이를 둘러싼 언어와 담론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요긴한 작업이다.


(1) 영구와 범생이

이 지역의 계층간 문제를 압축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동안 중고딩들 사이에서 구별짓기는 흔히 범생이-날라리로 이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서동진, 2000). 그런데 이 구도가 영구임대아파트를 둘러싼 중고딩들의 일상에서는 조금 엇나간다. 물론 이 동네 역시 통칭 범생이와 날라리가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항이 첨가된다. 마치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 아이들 사이의 구분이 윗동네 출신과 아랫동네 출신으로 나뉘듯, 중산층 청소년과 영구임대아파트 청소년으로 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중산층 친구들을 범생이라 부르고, 영구임대아파트 친구들을 ‘영구’라고 부른다. 이 동네 또래에서는 널리 알려진 구별 방식이다. 물론 속칭 영구들은 ‘영구’라는 호칭에 거부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 호칭에 바보라는 의미가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갈등은 가양동과 등촌동이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고등학교의 경우 강서구의 다른 동네 출신 아이들이 적지 않다보니, ‘영구’라는 존재가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따라서 그런 호명 자체가 성립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중학교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가양단지에는 경서, 공진, 성재 등 3개 학교가 있고 등촌단지에는 등명, 등원 등 2개 학교가 있다. 영구와 범생이의 구별은 바로 이들 중학교에서 제일 활발하다. 왜냐하면 학생들 대부분이 가양단지와 등촌단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양동과 등촌동이 다른 점은 바로 가양동에 위치한 성재중학교 때문이다. 등촌동에는 등명, 등원 둘다 중산층 자녀와 영구임대아파트 자녀들이 섞여서 학교생활을 한다. 그러다보니 범생이와 영구 사이에 심리적인 갈등이 첨예한 편이다. 반면 가양동은 성재중학교가 별난 역할을 한다. 이 학교는 학군상 중산층 아파트가 속해 있는 지역에 있기 때문에, 범생이와 영구가 서로 섞이는 경우가 거의 드문 것이다. 등촌동이 교실 안에서 계층 갈등을 보인다면, 가양동은 성재중과 경서중?공진중이 학교 그 자체로서 위계화된 듯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가양동 중산층 부모들은 성재중에, 등촌동 중산층 부모들은 다른 동의 중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려고 위장전입 등 갖은 수단을 쓰고 있는 현실이다. 또 범생이 자녀들 역시 그들대로 동네 길가를 다닐 때 날라리 영구들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를 쓴다.


(2) 영구의 일상: 현광이와 우현이

그러면 좀 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청소년의 일상을 관찰하도록 하겠다. 현광이와 우현이라는 녀석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현광이는 고1때 자퇴하고 아르바이트 삼아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고 있는 녀석이다. 현광이는 빈부격차와 계층갈등에 대해 날라리 영구들이 어떤 삶의 결을 취하게 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녀석은 빈민-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극단으로 몰고 나간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현광이가 속한 무리들은 범생이들의 중산층 문화권력에 대항해서, 나름대로 ‘개날라리’로서의 권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본드를 불기도 하고, 대마초를 구해다 피기도 하고, 매일 같이 술로 고주망태가 되기도 했다. 책상을 빈 교실에다 치워둔 뒤 땡땡이를 치고, 좀 약해 보이는 애들 삥도 뜯어본 경력을 가지고 있다. 비단 현광이 뿐만 아니라 영구임대아파트 청소년들의 경우 일탈의 빈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다. 밥 먹듯 하는 가출은 일상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심한 경우에는 부모를 폭행하기도 하는 등 전형적인 일탈의 모습을 보인다.

마치 Willis(1989)가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에서 분석했던 것들이, 이곳의 일상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분명 이런 타입의 영구 아이들은 일찌감치 스스로 계급이동의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불온한 언행과 심각한 일탈수준으로 자기들만의 문화권력을 구성하려고 한다.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까마득한 빈부격차가 늘상 폐부를 찌르고 그것들이 계속해서 불만으로 쌓여간다.

현광이의 경우가 이곳에서 일어나는 계급 갈등의 양상을 드러낸다면, 우현이는 좀 다른 경우다. 문제아로 낙인 찍혀 살다가 자퇴를 하고 일찌감치 부모계급을 세습해 생활하고 있는 현광이와 달리, 우현이는 비교적 성적이 좋은 편이고 좋은 대학과 직장을 발판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가진 녀석이다. 두 친구 모두 빈민-노동자의 자녀라는 계급적 현실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본인이 무엇을 욕망하고 움직이는가를 따진다면, 우현이는 오히려 범생이의 전형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치 가난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법고시 공부에 매진하는 신파극의 캐릭터와 같다. 그러다보니 우현이는 현광이와는 상대적으로 범생이라고 불려지는 중산층 또래들과 잘 어울려 다니는 편이다. 같은 단지 내에 친구가 없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의 날라리-영구들을 경계하는 편이다.

우현이와의 얘기 중에 재밌었던 것은 보통 필요 이상으로 돈을 많이 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범생이 친구들과 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의 수준에 맞춰 게임을 즐겨야 하고, 음악 CD를 구입하고,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보러 다닌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원을 다녀야 하는 것이 녀석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집에 학원비를 마련해달라고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의 초과지출 경향은 우현이 본인을 더욱 더 범생이-지향적으로 만든다. 돈을 쓰려면 결국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돈이 있으려면 지금보다 나은 계급상태로 올라가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그러기 위해 우현이는 더욱 더 범생이로서의 입지를 굳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영구 출신 범생이들은 늘 괴롭다.


(3) 갈등의 지점들

정체성을 둘러싼 계층간 갈등 양상은 정체성을 고착화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 정체성의 재현을 둘러싼 집단 간의 언어적 각축이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영구’ 담론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를 둘러싸고 한 쪽은 다른 쪽의 정체성을 고착화하고 자연화하려 한다. 그리고 상대편은 호명된 정체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막 나가거나’ 사회적 권력과 타협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중의 전략은 빈곤문화나 빈곤의식 같이 그동안 제기되어 온 빈곤에 대한 정태적 개념들이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복마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할 수 있다.



8. 결론


이 연구는 문화적 순환이라는 분석모형을 통해 빈곤 현실에 대한 분석을 정교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함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문화적 생산물이나 장에 적용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이다. 한편으로는 소비와 생산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지구적 차원, 즉 세계체제와 조응하는 정도에 대한 분석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영구임대아파트에 관한 차후 과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연구는 구체적인 정책 프로세스와 연결되어야 마땅한데, 속도전을 요하는 정책 입안 과정으로 인해 이러한 방식이 정책적 프로세스와 맞물리기 힘들 수 있고, 사전적 ‘개입’보다는 ‘사전조사’ 정도로 얄팍하게 이해될 수 있는 몇 가지 현실적 제약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방법론적인 부분을 더욱 정교화해야 한다는 필요성 역시 제기될 수 있다. 이 부분은 향후 추가적인 현장 조사를 통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본 연구를 통해 의미론적 체계에서 현재의 빈곤이 외부적인 규제 현실과 조응하여 다분히 역동적인 양상을 연출할 수 있다는 점을 탐색했다. 빈민에 대한 규제 양식은 전통적인 강제력을 버렸지만 여전히 상징적인 제약을 남겨놓고 있다. 주거지역 구획의 게토화되고 도시중산층화된 양식들이 이러한 점을 잘 설명한다. 그리고 소비와 생산의 맥락에서도 빈곤화의 문제가 단순히 말 그대로 빈곤화에 빠지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산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 또한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그러한 의미들은 물론 정체성의 재현과 표출에 맥이 닿아 있다. 이 내부 공간 특유의 공간적 규제와 생산?소비의 양식은 계층간의 위화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 개인들은 한편으로 정체성에 대한 호명에 대해 반발하거나 조응하면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원리를 구성하고 있다. 빈곤의 이러한 측면들을 통해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진행된 우리 사회 빈곤의 혼종적이고 탈근대적인 양상이라고 재확인할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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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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